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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10.10 조회 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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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슬로 모션’ 장면에 대한 노트: 홍콩, 안무, 그리고 말하기

윤수련_퍼포먼스 연구자

최근 홍콩에선 ‘말하기’의 문제가 큰 화두 중 하나이다. 그 배경에는 홍콩인 88%가 광동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가운데 ‘보통화’(표준중국어) 사용을 공식화하고 광동어 사용을 제한하려는 홍콩 정부의 제도적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에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어지고 있다는 점이 자리한다. 광동어 사용이야말로 홍콩 정체성 근본을 구성한다고 믿는 많은 홍콩인들에게, ‘보통화중심주의적’ 흐름의 가속화는 일상적 긴장을 조성하는 요인이자, 한편으로는 회피 불가능한, 임박한 미래의 프리뷰에 가깝기도 하다. 1997년, 150년간의 식민통치를 끝낸 영국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반환된 홍콩은 50년의 유효기간 동안 ‘일국양제’ (One Country, Two Systems, ‘하나의 중화인민공화국’ 속에서 홍콩의 법적 제도, 행정 제도 등은 분리존속하며 중국 중앙정부의 침해를 받지 않는다는 원칙)를 약속 받았다. 다만 유효기간 만료 시점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마치 왕가위 감독의 <2046> (2004)에서 끊임없는 숫자 ‘2046’의 나열, 종착지가 불분명한 미래의 고속철도, 강박적인 글쓰기 등의 이미지들로 그리고 있듯이 확인하기 두려운 것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홍콩의 현재가 중화중심주의적 중국 대륙에의 흡수라는 시나리오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면, 1997년 직전의 홍콩의 시간은 반대로 20세기 말 잔존하는 몇 안 되는 왕령식민지(crown colony)로서 대영제국의 과거 ‘영광’을 반복재생 및 확인하는 듯한 회귀의 시간이었다. 왕령식민지로서의 홍콩은 식민지 교육 제도를 통해 영어를 공식화시켰고, 광동어의 일상적 사용이 금지된 바는 없지만 홍콩의 문화적 ‘표준’은 언제나 ‘영어권 문화’에 참조점을 두고 있었다. ‘중국 아니면 영국’이라는 선택지 아닌 선택지 사이에서 홍콩 정체성의 문제, 그리고 나아가 정체성을 명명하는 언어 그 자체에 대한 문제는 보다 중요해진다. 그러나 다만 홍콩인의 발화행위가 이미 참조점을 회피하는데 실패한 행위가 되어버렸다면, 이에 몸의 개입을 통한 새로운 인식론과 감수성을 구성할 수는 없을까.
최근 발표된 몇 개의 안무작들은 이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즉시 내리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비슷한 고민 지점에 가닿아 있는 듯 보인다. 주제는 경찰권력에 대한 문제제기, 감시체제 하에서의 자유, 홍콩 정체성에 대한 재고 등 다양하지만, 이들 안무작들은 대부분 급변하는 정치상황과 말하기의 자유라는 이슈에 수렴하고 있다. 특히 관심 가는 것은 그러나 주제 자체보다, 이 주제를 풀기 위해 어떤 안무적 움직임을 차용하고 있는가이다. 더불어 안무적 움직임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감수성을 구현할 수 있는가도 함께 물어야 한다. 이 물음에 대해, 아이작 총 와이(Isaac Chong Wai)의 <미래 리허설:경찰 훈련 연습(Rehearsal of the Futures: Police Training Exercises)>(2018), 유리 음(Yuri Ng)의 <레퀴엠 HK(Requiem HK)>(2018), 상 지지아(Sang Jijia)의 <미스터 블랭크(Mr. Blank)>(2018)는 각각 홍콩 집회 현장 진압시 경찰 대응 매뉴얼에 대한 문제제기, ‘사라져가는’ 홍콩 정체성에 대한 애도, 검열과 온·오프라인 감시가 심화되는 최근 상황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홍콩 현대무용 씬에서 왕성하게 활동해온 시티 컨템포러리 댄스 컴퍼니(CCDC)의 2017-2018시즌 막바지에 발표된 유리 음의 <레퀴엠 HK(Requiem HK)>는 무용과 아카펠라의 접목을 통해 홍콩 역사를 향한 ‘장송곡’(requiem)을 수행한다는 콘셉트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1920년대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아카펠라 음악은 재즈, 펑크, 블루스, 락 등을 포괄하였고, 무용수들은 소리와의 대화를 통해 드라마틱하고 큼직한 몸짓들보다는 미시적 움직임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구체적인 서사성은 없지만 대신 이 작품은 상징적 이미지들의 나열을 통해 정체성의 결핍, 발화 불가능 및 소멸에 대한 충동과 강박의 인상을 되풀이했다. 솔로 장면들 속 무용수들은 무대 위에 설치된 스탠딩 마이크를 붙잡거나 점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나 마이크 밑으로 미끄러져 쓰러지고, 또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설치된 듯 허락된 공간이 반경 1.5 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제한된 조건에서 최대한 춤을 추려 애써야 하는 노력들을 펼친다. 다른 장면들에서는 무용수가 마이크에 대고 입을 뻐끔거리나 나오는 소리와 입모양이 불일치하는 것, 아카펠라 합창이 사운드 이펙트를 통해 흐릿하고 번지게 들림으로써 판독 불가의 상태에 이르는 것들도 볼 수 있다. 가장 극단적인 장면들은 솔로 무용수 한 명이 다른 공연자들과 떨어져 쓰러짐으로써 ‘고독사’하는 이미지, 또는 무용수 전체가 관객을 향해 무대 가장자리에 서서 쓰러질 듯 말 듯 앞뒤로 위태롭게 기우뚱거리는 순간들(이는 아카펠라 가수들의 휘파람, 숨소리 등에 힘입어 무용수들이 ‘바람 부는 벼랑 끝에 서서 균형을 잡으려는 모습’으로 구현되었다)로 이어진다. 종국에는 무대에 스피커들 여러 개가 ‘무덤’이 된 채 버려지고, 공연자들은 이 앞에서 애도한다. 이처럼 <레퀴엠 HK(Requiem HK)>는 제목에 충실하게 죽음의 몸짓과 소리로 가득하다. 그러나 다만 임박한 자기 소멸에 대한 극심한 공포, 비애, 불안을 일단 확인하고 나면, 그것을 뛰어넘는 몸짓, 안무를 상상할 수는 없는지 고민이 되풀이된다. ‘홍콩성’(Hong Kong-ness) 또는 광동어를 통한 자기 실존이 종국에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위한 장엄미사를 작곡할 것이 아니라, 그 뒤의 삶을 위한 찬가를 작곡하기 위해 안무적 진보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물을 수밖에 없다. [사진1] [사진 2]





유리 음(Yuri Ng)의 <Requiem HK(2018)>. CCDC 공연, 홍콩 콰이칭 극장, 2018. 사진작가 CHEUNG Chi-wai ⓒCity Contemporary Dance Company (CCDC)
유리 음(Yuri Ng)의 <Requiem HK(2018)>. CCDC 공연, 홍콩 콰이칭 극장, 2018. 사진작가 CHEUNG Chi-wai ⓒCity Contemporary Dance Company (CCDC)
역시 CCDC의 2018-2019 시즌 작품인 상 지지아의 <a미스터 블랭크(Mr. Blank)>는 심화되고 있는 감시사회에서 자유의 의미를 찾는다. 관객들이 블랙박스 형식의 스튜디오 공연장 안으로 입장하면 블랙박스 한 쪽 벽면에 투영된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현재 이 곳을 감시 중입니다”라는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블랙박스 내 곳곳에 CCTV 화면을 설치하여 다른 관객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감시’할 수 있도록 셋업한 작품의 시작부터, 이미 무용수들이 무엇을 할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작품은 금속성 사운드와 점멸하는 형광등 불빛을 배경으로 창문이나 문 없이 벽면으로만 둘러싸인 방 안에서 여섯 명의 무용수, 그리고 세 명의 검은 정장 차림 보안 요원의 밀고 당김으로 시작된다. 일견 취조실을 연상시키는 블랙박스 속에서 무용수들은 저마다 자신이 위치한 벽면 쪽에 검은 분필로 한자 ‘나(我)’를 끊임없이 적거나,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써서 부착시키거나, 주먹으로 벽을 때리는 행위로 저마다의 저항행위를 표현한다. 이는 글자를 손바닥으로 지우거나 포스트잇을 떼어 없애거나 저항하는 무용수를 들어 올려 다른 곳으로 옮기는 등 방어행위를 수행하는 보안요원들에 의해 실패하거나 수정된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무용수들이 ‘소리’를 내는 순간은, 예를 들어 권력, 개인, 욕망의 복잡한 중층점을 상징하는 남녀 접촉즉흥 듀엣 씬에서의 헐떡거림 정도로 드러날 뿐, 구체적인 언설행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역시 제목에 충실하듯, 상 지지아가 상상한 감시사회는 시민 각자의 개인정보를 손쉽게 침해하고 조종함으로써 종국에는 ‘백지상태’(blank)의 개인들만이 남는 세계이다.
커리어상 중장년층에 접어든 유리 음과 상 지지아는 정치적 억압 속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법을 우선 춤의 모방적 재현(mimetic representation) 속에서 찾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감시, 정체성 소멸, 발언기회 박탈 등 현 사회정치적 조건을 무대 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관객을 환기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면, 현시대의 홍콩 현대무용이 사회에 개입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사회고발에 복무하는 것밖에 없는가 하는 의구심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의구심 속에서 상 지지아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다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방이 뚫을 수 없는 벽으로만 막혀있는 줄 알았던 감시공간에서 한 남성 무용수가 놀랍게도 문을 찾아내 연다. 빛이 환하게 흘러들어오는 그 문 밖으로 몸을 내뻗는 무용수는, 그러나 잠시 후 보안요원 세 명에 의해 이리저리 던져지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여성 무용수를 향해 다시 상체와 고개를 천천히 비스듬히 돌리면서 탈출과 잔존 사이에서 고민한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타인에 대한 책임감과 자기 자신의 생존 사이에서 무용수는 고개와 상체를 거의 슬로 모션에 가까운 속도로 천천히 비튼다. 현 상황에서 슬로 모션을 통해 시간 흐름을 지연시키려는 행위는 어쩌면 불확실한 미래를 향한 두려움에 강박되어있는 홍콩 예술가들, 더 나아가 홍콩인들 일반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윤리적 감각으로 다가온다.
유리 음과 상 지지아의 작품에 비한다면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젊은 안무가 아이작 총 와이의 작품 <미래 리허설: 경찰 훈련 연습(Rehearsal of the Futures: Police Training Exercises)>는 아예 슬로 모션에 대한 천착을 통해 감시권력의 날 것 그대로의 움직임을 보여주려는 시도이다. 이 점에서 아이작 총 와이의 작품은 단순히 모방적 재현을 꾀한다기보다 일상생활에서 지나치기 쉬운 권력의 미세한 움직임을 하나하나 드러내고 기록하기 위한 일종의 증인 의식의 실천으로 보인다. ‘미래 리허설(Rehearsal of the Futures)’은 현재진행형인 퍼포먼스 시리즈로, 이 중 하나인 <경찰 훈련 연습(Police Training Exercises)>는 경찰 훈련 매뉴얼에 나와 있는 동작 하나하나를 무용수들이 ‘실습’하는 작품이다.





아이작 총 와이(Isaact Chong Wai)의 <Rehearsal of the Futures: Police Training Exercises(2018)>. 홍콩 괴테 인스티튜트, 2018. ⓒ윤수련
아이작 총 와이(Isaact Chong Wai)의 <Rehearsal of the Futures: Police Training Exercises(2018)>. 홍콩 괴테 인스티튜트, 2018. ⓒ윤수련
검은색 전투경찰복과 보호대를 착용한 다섯 명의 무용수들은 행진, 전열, 진압, 체포 등에 필요한 다리 들어올리기, 팔 굽히기, 상체 비스듬히 낮추기, 손 꺾기 등 경찰의 움직임을 최소 기본단위의 동작들로 해체하고 이를 관객들 앞에서 보이거나 관객들 속에 일부러 들어가 극도로 느린 속도로 재현한다. 장장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단순 동작들은 걷기, 구부리기, 다리 벌리기, 상체 젖히기 등의 끝없는 축적과 반복을 통해 효과적이면서도 일상적인 통제체제를 완성시킨다. 허공에 멈춘 상태 혹은 지연된 상태로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동작들은 얼핏 관객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권력의 형상을 낯설게 하는 한편, 경찰력에 쓰이는 육체의 노동과 소진을 동시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상 지지아나 유리 음의 안무가 보여주는 추상적인 절대권력 내면의 겹을 서서히 벗기는 행위에 근접한 듯하다.
아이작 총 와이의 슬로 모션 사용은 일견 2017년 논란거리가 된 입법회의원 라우 씨우-라이의 의원 선서식을 연상시킨다. 의원 선서식 당시 선서문을 극도로 느리게 읽음으로써 선서식을 10분 넘게 지연시킨 라우 씨우-라이는 의원 선서식과 관련한 기본법 조항을 어겼다는 이유로 의원직을 박탈당해 논란을 일으켰다.





라우 씨우-라이(Lau Siu-lai)의 2016년 10월 입법회 의원직 선서문 낭독 장면 중
라우 씨우-라이(Lau Siu-lai)의 2016년 10월 입법회 의원직 선서문 낭독 장면 중
라우 씨우-라이의 고의적 슬로 모션은, 그 어떠한 발언행위도 제대로 된 균열을 내기 힘든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아예 신뢰하거나 부합하지 않겠다는 전략으로 읽힌다. 라우 씨우-라이의 지리멸렬한 선서문 낭독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정부당국의 입김에 따라 제한되고 있는 홍콩의 현 정치적 상황에서 의원 선언식 자체가 가진 무의미함을 우회적으로 비꼬는 퍼포먼스이자 일종의 미시적인 ‘안무’행위이다. 그 퍼포먼스는 말하기가 권력의 중심에 부합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어떤 방식으로도 유효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출석한 의원들 및 언론과 시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어떤 개입을 상상할 것인가 그 책임감을 고집스럽게 묻고 있다. 이 같이 오히려 현실정치가 안무적 전략을 고안하고, 무대 위 무용이 모방적 재현을 통한 현실고발에 때때로 그치고 마는 시대에, 홍콩 무용가들은 어떤 새로운 몸 언어로 사회의 정치적 감각을 일깨울 것인지 기대와 망설임을 동시에 가져본다.


윤수련_퍼포먼스 연구자 민족주의, 인종정치학(racial politics), 퍼포먼스의 교차점에 대해 연구해왔으며 현재 단행본 Choreographing Affinities: Koreanness, Blackness, and Performing Race in Korea를 작업 중이다. 페미니즘과 퀴어정치학에도 폭넓은 관심을 가져 작가 정은영의 <변칙판타지> 서울, 타이페이공연과 <전환극장> (포럼에이) 및 스팀슨 허트 편저 <젠더 연구의 주요 개념>(가제, 후마니타스 출간 예정) 공역에 참여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퍼포먼스학(Performance Studies)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예일대 동아시아학연구소(CEAS) 포스트닥터 과정을 거쳐 홍콩 링난대 문화학과 조교수로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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