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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9.11 조회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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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댄스 아카이브에 대한 짧은 보고서

김상규_서울과학기술대 디자인학과 부교수

지난 8월 10일부터 9월 2일까지 3주 동안 30여 편의 댄스 퍼포먼스가 베를린 HAU(Hebbel am Ufer Berlin)를 중심으로 Deutsche Theater, Volksbuhne, Sophiensæle 등 베를린의 유서 깊은 공연장에서 펼쳐졌다. <8월의 댄스(Tanz in August)>라는 이름의 이 행사는 여름에 음악, 공연 행사가 일제히 쉬는 시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8월의 댄스> 부대행사로 토론과 워크샵이 있었는데 그 중 댄스 아카이브를 주제로 하는 토론이 마련되었다.
공연예술에 문외한이지만 아카이브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고 여러 분야의 아카이브 중에서도 댄스 아카이브는 다른 분야에 몹시 까다로운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짧은 토론이 답을 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베를린에서는 어떻게 논의되는지 궁금한 생각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영화 <타인의 삶>에서 극장으로 등장하기도 했던 HAU(Hebbel am Ufer)의 본관 건물. ⓒ김상규
<What remains? On Archives and Dance>라는 직설적인 제목을 내세운 이 토론에는 클라우디아 헤네(Claudia Henne), 리사 쉘턴(Leisa Shelton), 패트릭 프리마페지(Patrick Primavesi)가 참여했다. 진행을 맡은 안드레이 미르체프(Andrej Mir?ev)도 시각 예술가이자 드라마투르기이므로 실제로는 전문가 네 명이 토론한 셈이다.
지난 30년, 그러니까 1988년에 베를린에서 시작된 댄스 페스티벌의 아카이빙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댄스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클라우디아 헤네는 페스티벌이 생기기 이전부터 라디오 방송과 인연을 맺고 리포터이자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던 터라 30년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리서치는 아카이브에서 시작하는데 아카이브가 어디 있어요? 예산도 사람도 아무 것도 없었죠.”라는 말로 답변을 시작했다. 2000년까지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마치 페스티벌의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클라우디아는 이곳저곳을 그야말로 ‘뒤져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동료들과 함께 정부 기록보관소, Akademie der Kunst 같은 기관들, 개인 아카이브는 물론이고 관계자들에게 전화와 이메일로 수소문해서 어느 정도 구축했다는 것이다.



<8월의 댄스>가 주요 행사가 열린 HAU2의 입구. 이 건물에 공연장과 도서관이 있다. ⓒ김상규
또 다른 토론자 리사 쉘턴은 호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공연 예술가이자 큐레이터라는 독특한 위치에서 아카이빙의 다른 관점을 보여주었다. 호주도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인데 관객의 경험에 주목하는 것이 다른 발표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이날 발표 이전에 비공개 토론에서 이미 다뤘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리사는 공연 주체의 기록 뿐 아니라 관객이 기억하는 공연, 그들의 경험을 아카이빙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또 익히 잘 알려진 퍼포먼스 아티스트 스텔락(Stelarc)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한 바 있는데 ‘리빙 아카이브’ 개념으로 이를 설명했다.(미술에서 ‘리빙 아카이브’는 수장고를 개방하여 컬렉션 자체를 기획전으로 공개하는 개념이지만 공연에서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리사는 스텔락의 도큐먼트, 웹사이트 정보, 작업 자체까지 전체를 다루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클라우디아가 연구자로서 아카이브의 필요성과 구축 경험을 언급하고 리사가 예술가로서 예술과 관객의 관계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었다면 패트릭 프리마페지는 전형적인 아카이브 측면에서 이야기했다. 라이프치히 대학 연극학 교수이자 그 대학의 댄스 아카이브 책임자인 만큼 사료(史料)로서 도큐먼트를 보존하는 문제를 설명했다. 그의 관심은 영상 등 다른 형식 이전에 인쇄 매체를 확보하는 것인데 80년대까지도 손으로 쓴 기록들이 많았고 그것이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디지털 아카이브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유용성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면서도 인쇄 매체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언급이 이어졌다. 그동안 댄스 관련 책도 별로 출간되지 않았을 뿐더러 요즘에는 다들 잘 읽지도 않지만 돌아보면 과거에 책으로 기록된 것은 한 권이라도 어딘가 남아있기 때문에 사료가 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아카이브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젊은 세대를 의식한 언급도 반복되었는데 그들이 연구자든 예술가든 그들에게 남겨줄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이 큰 의미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것은 접근성 문제로 연결되었다. 베를린에 있는 개별 아카이브들을 이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구체적인 지적도 있었다. 안드레이 미르체프는 발터 벤야민 아카이브가 놀라운 기록물을 갖춘 반면 정보가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열람하기가 쉽지 않다는 예를 들면서 어떻게 하면 아카이브를 민주적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진본 자료를 유지 관리 측면에서는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이고 또 그만한 공간과 예산을 확보하는 문제 등 원론적인 수준에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



도서관에서 진행한 토론회 장면 ⓒ김상규
큰 행사에 비해 도서관 한켠에 다소 소박하게 마련한 자리였지만 만석이었고 젊은 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공연 때문에 예정 시간보다 짧은 한 시간 이내로 진행되느라 새로운 쟁점을 논의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토론에서 언급한 아카이브 자체의 개념도 기록의 수집 및 관리 측면에서 아카이브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베를린 댄스 페스티벌의 아카이브가 최근에 온오프라인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과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토론 방향이 그렇게 잡힌 것 같다. 학술적인 논쟁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아무래도 더 유실되기 전에 모양새를 갖추어야 하는 긴박함이 먼저였을 것이다.
뒤늦게 아카이빙이 진행되었고 또 여러 아카이브를 묶는 것이 숙제라는 점은 한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베를린 뿐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 기관이든 개인이든 각양각색의 아카이브가 있고 그야말로 ‘이곳저곳’에 흩어졌을 뿐 기록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남아있기 때문에 뒤늦게라도 수습이 가능했던 것을 생각하면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아카이브에 대한 고민은 언제일지 모르는 든든한 기관의 연구와 아카이빙을 고대하는 것에 그칠 수 없고 의식을 가진 개별 연구자, 창작자가 서로 다른 접근이라도 각각의 방법론으로 아카이빙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김상규_서울과학기술대 디자인학과 부교수 서울과학기술대 디자인학과 부교수. 서울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건국대에서 ‘디자인아카이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한국의 디자인>을 비롯한 전시를 기획했으며 저서로는 <의자의 재발견>, <사물의 이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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