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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6.14 조회 2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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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문학] 몰래 추는 춤

민구_시인

나는 춤과 대단히 거리가 멀다. 나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춤이란, 고작 기분이 좋거나 슬플 때 어깨를 들썩거리는 몸짓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 춤과 관련해 할 말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아쉽지만 먼저 고백하고 싶다. 지난 며칠간 나는 단념에 가까운 이 생각을 짊어지고 지냈다. 춤이라니, 춤과 문학이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혼자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며 막막한 기분이었고, 그리하여 한바탕 체념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 고개 너머에서 글감을 가득 싣고 오는 노새를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아침이 왔다. 방 안으로 볕이 들고, 나는 잠에서 깨어 몇 자 끼적이다가 가만히 멈추고 창가에 놓아둔 야자 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초여름 더위에다가 바람이 불지 않아서 그것은 마치 내가 다른 곳을 보는 동안 화초가 몰래 추는 춤처럼 보였고, 나아가 자기 근력을 주체하지 못해서 흔들리고 계속 흔들리는 이의 몸짓과, 절제하지 못해 절망하는 몸짓을 동시에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이전보다는 소리 높여 말할 수 있을 만한 한 가지 힌트를 얻었는데, 그것은 내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이 자기만의 몸짓을 방금 막 거두고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납득할 수 있는 모습으로 완벽하게 돌아와 있다는 확신, 이른바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인파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시의 뒤태였다.

폴 발레리의 말에 의하면 춤은 “사람이 움직여야 되는 예술”이다. 그런데 시는 시인이 움직이는 즉시 발밑에서 깨져버리는 달걀 같다. 시는 겉보기에 함부로 대하기 힘든 견고한 성품과 앞을 내다보는 혜안,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래에 먼저 지어진 종탑,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넓은 어깨를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보잘것없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우 예민하다. 너무나 예민해서 잘 놀라고 변덕이 심하며 반드시 붙잡고 싶은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아침이 되면 홀연히 사라지는 연기 같다.

누군가 내게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시가 무엇입니까? 글쎄요. 시는… 계속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이 아닐까요? 나는 그 이후에 한 말들에 대해서 한 번도 비슷하게 말한 적이 없고, 어떤 말이든 바꿔서 할 수 있었는데 시는 마치 네스 호의 괴물 같아서 누구라도 과장하여 말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또한 과장한다고 해서 꾸지람을 듣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과 거짓의 진위를 따지지 않고 둘 사이에 놓인 수많은 포츈 쿠키를 빠갤 수 있을 때 시가 남기고 간 우연의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오늘 아침, 우연의 문장들 가운데서 내가 고른 단 하나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시는 춤춘다.” 그리고 나는 춤추는 시를 바라본다. 시가 추는 춤은 정체를 들키지 않게 몰래 추는 춤이다. 그것은 고장 난 시계를 꺼내놓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떠올릴 때와 같다. 고장 난 시계는 약속이 없고 통금이 없는 세계다. 그것은 기계적인 동작을 할 수 없이 정지된 상태에서 지나간 시간을 소환한다. 완전히 망가진 시계는 겉으로는 미동이 없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시간의 진동이 느껴지고, 세계를 일 분과 일 초의 간격으로 끌고 가려는 욕망에 가득 차 있다. 이때 시인은 시계가 활짝 열어준 시간의 몸을 탐색할 수 있고, 시간이 밀고 간 평평한 마룻바닥에서 때로는 화려하게 춤추는, 때로는 볼품없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푸른 연기의 무희를 볼 수 있다.

춤추는 시 앞에서 시인의 할 일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시인은 춤추는 자라기보다 춤을 보는 관객에 가깝다. 시인이라는 관객은 무대에서 춤추는 이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그들이 언제든지 자기 질서를 파괴할 수 있고, 공연을 망칠 수 있고, 춤을 그만둘 수 있으며, 보란 듯이 대중을 멸시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다. 굴렌 굴드가 마지막 연주회를 성황리에 마치고 호텔 방으로 돌아와서 자기가 입었던 옷을 바라보며 “어떻게 이 요란하게 번쩍이는 이상한 옷을 온종일 필요로 했을까” 하고 되묻는 모습에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관객으로서의 시인은 시적 대상이 화려하게 춤추는 걸 볼 때보다 그것이 시가 되지 않고 좌절해 있는 상태와 아무런 동작 없이 웅크린 채 언제든 튀어오를 자세를 취하고 정지해 있는 상태의 흰 발목을 볼 때 희열을 느낀다.

가만히 있는 대상은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시에서 ‘가만히 있음’과 ‘정지해 있음’은 매우 정적인 상태지만 그들 나름의 격렬한 몸짓이며 요란한 동작으로도 볼 수 있다. 나는 화려한 동작이 주는 자극에 둔감한 편이어서 가만히 놓여 있는 상태의 사물에게나 겨우 보이는 정신에 쉽게 매혹 당하곤 하는데 그들이 나를 유혹해서 데리고 가는 장소란 대개는 이미 알고 있고 이해해버렸다고 믿는 사실들에 대해 전혀 다른 비전을 제시해주는 곳, 바로 ‘무대’다.

누군가 시적이라고 말하는 대상은 치명적인 결함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 시적이라고 말해버림으로써 선택된 ‘익숙함’이다. 시의 대상들은 발설 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달아난다. 그들은 시인이 운 좋게 목격하기 이전부터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미 춤을 추고 있으며 새, 바다, 조각구름, 아이스크림처럼 간단하게 호명할 수 있는 이름 안에 본능을 숨기고 있다.

민구_시인 198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이 되었으며 시집으로 『배가 산으로 간다』가 있다. 지금은 파스텔뮤직 콘텐츠기획부에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으며 산책하는 것과 인형 뽑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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