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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11.12 조회 4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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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은 다양하다, 유사한 것은 반목한다, 추락은 가치있다

포지션은 다양하다, 유사한 것은 반목한다, 추락은 가치있다
- 메테 잉바르첸 <69 포지션즈 (69 Positions)>

방혜진_미술비평가

ⓒ서울세계무용축제
공연은 마치 전시처럼 시작된다. 공간을 둘러싼 흰색 철제프레임 가벽에 각종 이미지와 텍스트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고 입장한 관객들이 이를 자유롭게 둘러보고 있으면 메테 잉바르첸(Mette Ingvartsen)이 등장하여 가이드인 양 하나씩 해설을 풀어놓는다. 이 ‘전시 프레임’은 몇 가지 지점을 제시한다. 이 공연이 자료 아카이빙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의 섹슈얼리티 문제를 객석과 무대라는 극장 공간 구성에 대한 환기를 통해 제시하겠다는 것 등. 전시 프레임의 선선한 여유가 느닷없는 긴장으로 전환되는 것은 설명하던 잉바르첸이 처음 옷을 벗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을 가깝게 둘러싼 관객 앞에서 천천히 옷을 벗고 다시 하나씩 천천히 입는데, 그 모든 과정에서 조금의 흔들림 없이 침착하고 끈질기게 관객과 눈을 맞춘다. 발화 행위자에서 몸의 현시자로의 급작스런 전환. 그럼에도 나체의 전시를 일방적 응시와 관음이 아닌 일대일 시선의 교환으로, 심지어 잉바르첸에 의한 시선 통제로 이끄는 도입부는 <69 포지션즈(69 Positions)>가 복잡하게 얽힌 위치/자리/자세/태도/입장(들), 곧 ‘포지션(즈)’의 문제라는 것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목에서 이 ‘포지션즈’와 더불어 그 앞에 붙은 숫자 ‘69’를 음미해야 한다. 우선 숫자 ‘69’는 이 작품이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1960년대의 퍼포먼스들, 특히 리차드 셰크너(Richard Schechner)와 퍼포먼스 그룹의 <디오니소스 69(Dionysus in 69)>(1969)를 명백히 지칭하면서, 그것의 역사적 의의인 정치적 투쟁의 장소로서의 몸, 섹슈얼리티와 나체, 제의적 에로티시즘, ‘환경’으로서의 무대와 관객 참여 등을 소환할 것임을 천명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1960년대의 이념과 실천의 재연과 복기가 아니다. 오히려 <69 포지션즈>는 1960년대 및 70년대와의 갈등을 숨기지 않으며, ‘실패한 유토피아’를 오늘날에 다시 불러내는 것의 의미를 숙고한다. 1960년대의 계승이자 불화라는 양가성은 공연 처음에 다루고 있는, 그리고 실제로 이 공연 제작의 출발점이 된, 캐롤리 슈니먼(Carolee Schneemann)의 <고기의 즐거움(Meat Joy)>(1964)과의 관계에서도 분명하다. 죽은 동물 사체와 살아있는 인간 신체의 접촉에 주목한 잉바르첸은 마침 <고기의 즐거움>의 50주년을 맞아 이를 보리스 샤르마츠(Boris Charmatz)의 <엑스포 제로(Expo Zéro)> 프로젝트에서 재-무대화하기로 결심하고 슈니만에게 협력 메일을 보냈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제안을 수정하여 다시 메일을 보내지만 슈니만의 답은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잉바르첸은 이러한 거부와 무응답을 오히려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아 1960년대 퍼포먼스들을 재해석하고 그것들과의 관계를 재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를테면, 숫자 ‘69’에서 ‘6’과 ‘9’는 서로 유사한 형상이나 뒤집힌 대칭 구조라는 어떤 설정이 가능해진다.
ⓒ서울세계무용축제
본래 잉바르첸은 제목에 맞춰 69개의 레퍼런스로 채우고 싶었다고 하는데, 비록 그 계획은 포기되고 말았지만 ‘포지션’이 ‘레퍼런스’와 연관되는 것은 여전하다. 그것은 서로 다른 포지션을 갖는 레퍼런스이기도 하며, 각각의 레퍼런스들과 맺는 서로 다른 포지션들이기도 하다. 수많은 레퍼런스들을 관통하는 가운데, <69 포지션즈>는 총 3부의 구조를 구축하며 주요 시대와 참조점을 이동시킨다. 1960년대 퍼포먼스의 1부로부터, 동시대의 폴 프레시아도(Paul B. Preciado)에 다다르는 3부 사이에, <매뉴얼 포커스(Manual Focus)>(2003), <50/50>(2004) 등 잉바르첸 자신의 초기 작품을 다루는 2부가 설정된 것은 흥미롭다. 2부의 자기 인용과 관련하여 ‘6’과 ‘9’라는 숫자에 좀 더 집착해보면, 1960년대 공연에서의 나체의 등장과는 또 다른 양상으로서 1990년대 공연에서 재등장한 나체의 의미, 즉 정치적 투쟁이자 유토피아로서의 벗은 몸 대신 여성/남성, 인간/괴물 등의 구분을 파기하는 것으로서의 벗은 몸, 그리고 그 시대를 이끈 자비에 르 로와(Xavier Le Roy), 제롬 벨(Jérôme Bel), 보리스 샤르마츠 등이 잉바르첸에게 미친 영향까지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잉바르첸이 컨템포러리 댄스의 모토로 불릴만한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의 <No Manifesto>(1965)를 수정, 재편하여 <Yes Manifesto>(2004)를 발표했던 것은 주목할 지점이다. 이본 라이너가 부정한 ‘연극성’이 잉바르첸에서 어떻게 긍정적으로 복귀될 수 있는가, 혹은 어떤 타협만이 이 복귀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게다가 그 과정에서 잉바르첸이 비인간 주체에 대한 탐닉의 시기(‘The Artificial Nature Series’)를 거친 후 더욱 급진적으로 인간 신체의 문제(‘The Red Pieces’)로 회귀했음을 생각하면, (특히나 ‘The Red Pieces’ 시리즈의 첫 포문을 여는) <69 포지션즈>란 숱한 부정과 재긍정, 모방과 독창성, 계승과 거부, 자기 부인과 모순을 통해 도달한, 혹은 일시적으로 형성된, 빽빽하고 성긴 ‘포지션들’의 군집임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공연이 말하려는 핵심이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은 도리어 핵심에서 벗어난다. 이 공연은 퍼포먼스가 특정 담론을 잘 전달할 수 있는가에 골몰하기보다 담론 생산 과정의 수행성(Performativity), 혹은 담론 모델로서의 퍼포먼스 형식은 어떠할 수 있을지에 집중한다. 이 작품의 탁월함을 만들어내는 요소는 바로 이 미묘하나 선명한 차이에 있다. (그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렉처 퍼포먼스’라는 용어보다 ‘담론적 프랙티스 퍼포먼스’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여러 포지션을 가로지르는 행위에 있어 그가 육체와 언어, 텍스트와 이미지, 아카이브와 공연, 담론과 재현과 재연 등을 뒤섞고 교미시키는 것은 점점 더 다층적이고 다중적으로 변해가는 우리의 신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질문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혼종성을 가로지르는 수행성이라는 측면에서, <69 포지션즈>의 3부가 폴 프레시아도의 (‘폴’이 아직 ‘베아트리즈(Beatriz)’이던 시절에 쓴) 《테스토스테론 중독자(Testo Junkie)》(2008)를 핵심 레퍼런스로 삼은 것은 더없이 적확하다. 트랜스젠더 성정치학자인 그는 테스토스테론 약물 복용의 자가 실험을 거쳐, 이 사회가 상품경제를 통해 어떻게 섹스와 젠더와 육체의 정치를 통제하는지 논증한다. 바로 그 《테스토스테론 중독자》를 책상에 앉아 낭독하던 잉바르첸은 이윽고 ‘모든 것’과의 섹스를 시도한다. 잉바르첸이 조명 스탠드를 정성스럽게 핥고 애무하며 책상과 격렬하게 섹스하는 장면은 섹슈얼리티 이미지와 언어로 가득 찬 이 공연에서도 특별히 관능적이고 아름다우며, 동시에 쾌락과 욕망의 기이한 장소를 관객들이 지각하게 한다.
ⓒ서울세계무용축제
물론 제목 ‘69 포지션즈’는 그 자체로 즉각적인 성적 함의를 지니며, 잉바르첸이 관객들과 함께 취한 일련의 비조각적 자세들과 연결된다. 혹은 잉바르첸에 대한 반응으로서 관객들의 서로 다른 태도, 즉 69명으로 제한된 관객들의 69가지 포지션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적극적인 관객 참여를 이끌지 못해 아쉽다는 식의 단선적 평가는 적합하지 않다. 잉바르첸은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간을 가로질러 이동하게 하고, 수시로 그들에게 말을 걸며, 지원자를 차출하여 포르노그라피 자세를 시키거나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오르가즘 소리를 따라하게 만들지만, 이는 관객 참여를 통해 집단적 해방을 꿈꾸던 1960년대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 것이다. 도리어 잉바르첸은, 그가 말하는 ‘부드러운 안무(soft choreography)’를 통해, 즉 퍼포머와 관객, 무대와 객석, 우연한 조우와 구성된 이벤트가 뒤섞이는 새로운 퍼포먼스 조직법에 따라, 특정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개개인 간의 거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일련의 불편하고 곤란한 상황들을 안무함으로써 관객들이 서로를 응시하고 서로의 반응을 관찰하며 자신의 참여 수준을 갈등하도록 만든다. 참여란 무엇인가에 대해, 참여의 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집단적 신체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로 판명되었지만, 잉바르첸은 집단의 실패를 통해 그들의 함께 있는 공간을 변화시킨다. 추락을 가치 있게 만든다.

방혜진_미술비평가 방혜진은 영상과 퍼포먼스를 연구하고 전시와 무대에서 탐구한다. 기획한 전시/프로젝트로 《EX-EXHIBITION: 장면 정면 전면 직면》, 《인식장애극장 Hypermetamorphosis Theatres 1, 2, 3》, 《¡No Dance!: Between Body and Media》 등이 있다. 남산예술센터 극장 드라마터그로 활동했으며, 국립현대무용단에서 드라마터그, 연출 등으로 작업했다. SPAF젊은비평가상과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다.

방혜진_미술비평가 방혜진은 영상과 퍼포먼스를 연구하고 전시와 무대에서 탐구한다. 기획한 전시/프로젝트로 《EX-EXHIBITION: 장면 정면 전면 직면》,《인식장애극장 Hypermetamorphosis Theatres 1, 2, 3》,《¡No Dance!: Between Body and Media》등이 있다. 남산예술센터 극장 드라마터그로 활동했으며, 국립현대무용단에서 드라마터그, 연출 등으로 작업했다. SPAF젊은비평가상과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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