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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11.30 조회 3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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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춤과 음악: 춤과 음악, 세계에 대면해야

[기획연재] 춤과 음악



춤과 음악의 공통 특성을 찾아 떠나는 기획. 음악과 춤이 발원하는 뇌와 몸에 대한 성찰로부터, 춤과 음악이 어우러지거나 거리를 둔 관계, 새로운 춤으로서의 음악에 대해 생각해본다. ‘춤과 음악’에서는 배타적인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춤과 음악이 향유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안하며, 무용계와 음악계의 성찰과 자기반성을 촉구한다.


춤과 음악, 세계에 대면해야

김진호_작곡가·음악학자

예술가의 세계는 중간세계


우리는 세계 속에서 살며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떤 곳일까. 예술가를 포함한 인간의 감각과 지각은 구체적 지구 위의 어떤 자연 및 사회세계 내에 맞춰 작동한다. 그것은 생물학자 윅스킬(Jakob von Uexkull, 1864~1944)과 철학자 폴머(Gerhart Vollmer, 1943~)가 말한 ‘중간세계’다. 이들 독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지각하고 경험하며 적응하는 곳이 중간세계다. 이 세계는 광대와 극미의, 억겁과 찰나의 중간에 존재한다. 그것은 실제 세계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중간세계에 결박당한 우리 인간에게 태양은 항상 동쪽에서 떠오른다. 우리의 절망은 억겁의 세월 뒤에 소멸할 태양에 대한 것이 아니다. 미취업에 대해, 다락같이 오르는 전세 값에 대해 절망한다. 우리의 기쁨은 요동치는 양자와 쿼크의 세계 속에 있지 않다. 우리의 직관과 지적 개념들, 지각과 경험 대부분이 중간세계와 관련되고, 그것에 알맞다. 우리 마음의 대부분은 이 세계에 결박되어 있다. 중간세계를 넘어 매우 작거나 큰 것으로 그리고 매우 복잡한 것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과학적 인식을 통해서 말이다. 과학적 인식을 취할 때 직관과 느낌, 감정과 같은 우리의 오래된 마음은 종종 무용해진다. 예술가들은 과학적 인식과 오래된 마음 중 어느 쪽에 더 친할까.



중간세계라도 제대로 알고 표현해야


낭만주의자들의 작품명이나 그들 작품이 표현하는 바를 생각해보자. 주로 강이나 산, 자신의 조국과 같은 대상에 대한 감정이나 일상의 삶과 관련한 어떤 감정 혹은 소소한 느낌, 또는 비현실적 상상이 표현된다. 비현실적 상상/공상에 대해서는 잠시 뒤로 미루자. 감정이나 소소한 느낌, 일상성과 같은 것들이 주로 중간세계에서 연원하는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의 왈츠》, 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 등을 생각해보자. 오늘날 광대한 우주와 극미한 원자의 세계로 과학자들이 우리를 초대하고는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중간세계를 가장 친숙하게 여긴다. 중간세계에서 수백 만 년 살아왔던 생명인 “우리는 석기시대의 정서, 중세의 제도, 신과 같은 기술을 지닌 채 스타워즈 문명을 구축해 왔다. 우리는 동물적 본능의 요구에 좌우되는 지능에 의존해 살아가는 진화적 키메라다.” 미국 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1929~)의 이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어쩌면 예술가들이지 싶다.

아주 드물게, 중간세계를 넘어선 우주적 세계를 표현했던 이들이 있었다.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opfung, 1798)는 기독교적 천지창조론을 표현했다. 연주시간이 1시간 50분이나 소요되는 이 대작의 도입부에서 오케스트라는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을 장중하게 표현한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면 첫 번째 성악곡이 담담하게 노래된다.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천사 라파엘이 전하는 노래다. “태초에 신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무정형이었고 비어 있었다. 심연은 깊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합창이 곧바로 등장해 신이 빛을 창조했다고 노래한다. “그때 신의 정신이 파도 위에 작용했다. 신이 말했다. 빛이 있으라. 빛이 존재했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그러다가 점차 고조되는 음향이 여기에 동반된다. 하이든의 이 음악은 많은 기독인들이 사실로 믿는 바를 전한다. 관현악은 축하, 찬양, 기쁨 같은 것으로 인지되는 감정을 표현한다.

현대과학은 천지창조의 순간과 창조의 방식을 빅뱅이론으로 설명한다. 빅뱅론은 지금으로부터 137억 년 전에 알 수 없는 초고밀도, 초고온의 에너지가 폭발해 이 우주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비록 몇 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이것은 과학자들이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제안한 이론으로서, 가설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하이든은 빅뱅론이 말하는 바와 많이 다른 작품을 썼다. 냉정히 따지면 하이든의 곡에는 천지창조의 순간에 대한 어떤 표현도 없다. 천지창조 전의 상태가 도입부에서 관현악에 의해 연주되었는데, 이 상태를 하이든의 작품을 설명하는 음악학자들은 혼돈스럽다고 형용한다. 내게는 그리 혼돈스럽지 않게 들린다. 다단조의 웅장하면서 느린 음향은 고전주의적 질서를 표현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혼돈을 표현한다고 인정해보자. 빅뱅론은 우주 탄생 이전에 혼돈이 있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도입부 이후 연주되는 첫 번째 곡에서 베이스가 “하느님에 의해 천지가 창조되었다.”라고 짤막하게 선언하고 마는데, 이렇게 천지창조의 순간이 그 이후의 우주적 전개과정에 미친 영향도 표현되지 않았다. 게다가 연주되는 모든 곡들은 병렬적이다. 빅뱅론은 빅뱅이 이후 벌어지는 모든 우주적 사건들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물론 우연성이 개입한다. 하지만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 모두를 사건의 병렬로 볼 수 없다.

우주가 탄생한지 70억 년이 지나야 태양이 형성되고 지구도 그 이후에야 세상에 선을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39억 년 전에야 단세포 생명이 지구에서 탄생하고 20억 년이 또 지나야 다세포 생명이 등장한다. 축하, 찬양, 기쁨과 같은 감정을 가진 고등한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 전에야 지구 위에 등장하고 하이든과 베토벤은 고작 300여 년 전에야 무대에 오른다. 기독교도 하이든 작품의 기저에는 천지창조가 고작 6,000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구약성경이 알려주는 잘못된 지식이 깔려 있다. 하이든은 잘못 알고 있었다. 이 오스트리아의 고전주의자는 현대과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극대와 억겁, 극미와 찰나의 세계에 대해 알지 못했고, 천지창조라는 초거대 사건을 중간세계의 크기로 줄였다. 스케일이 작은 작곡가다.

하이든 말고도 많은 예술가들이 우주에 대해서는 물론, 우리가 알고 경험하며 지각하는 중간적 자연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공부하지 않는 무지한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무지가 문제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매우 영악하게. 언제부턴가 예술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심오한 감정이나 고상한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예술의 노선을 바꿈으로써, 예술가들은 공부하지 않고 표현하는 전문가들이 되었다. 너그러운 사람들은 예술로부터 얻는 것이 과학이나 학문, 철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과 아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덕분에 예술가들의 무지함이 문제되지 않는다.

세계 인식의 필요성을 단호히 피력하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같은 예외적 예술가도 있긴 했다. “나는 ‘너 자신을 알라’는, 워낙 중요하게 들리는 과제가 사제들의 음모일 것으로 의심해 왔다. 그들은 외부세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꾀어내어 사람들을 거짓된 내면 성찰로 끌어들이려 애쓴다. 인간은 세계를 아는 정도만큼만 자신을 안다.”(재인용 : 크르즈나릭) 이런 말을 하는 괴테가 좀 과격해 보인다. 내면의 성찰을 부정할 필요가 있을까. 세계를 지운 체 내면만을 성찰하고 표현한다면 문제다. 괴테의 관점에 따르면 그런 성찰은 거짓이다. 세계 속 예술가가 세계를 고려치 않고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진술은 틀렸거나, 최소한 편향적이다. 예술가들은 표현의 대상을 표현하기 전에 인지·인식해야 한다. 표현 대상은 세계 혹은 세계의 일부인데, 꼭 중간세계만은 아니다. 과학자들이 파고들어간 거대 및 극미의 세계를 과학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그에 따라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이 힘들다면 중간세계라도 제대로 인지하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우주적 스케일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주로 영화나 소설에서 창작된다. 러시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아시모프(Isaak Y. Ozimov, 1920~1992)는 상업영화 《아이 로봇》의 원작 소설을 쓴 사람인데, 이 과학자이자 소설가는 미래 사회의 로봇뿐 아니라 엔트로피와 같은 과학법칙을 내용으로 다양한 소설을 썼다. 엔트로피는 우주 모든 곳에서 작동하는 보편적인 법칙이다. 아시모프와 같은 이들만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한 지평을 연 사람으로 평가한다. 새로이 열린 이 지평을 따라 많은 작품들이 창작되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음악과 춤은 예술의 여러 분야들 중 가장 느린 스텝을 밟는다. 거대 및 극미 세계에 대해 음악가와 무용가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하긴 중간세계에 대해서도 그랬다. 느리더라도 제대로 된 모습을 언젠가 보여준다면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의 지적 수준이 꽤 높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그들이 기다려줄지 의문이다. 음악과 춤의 구태의연한 모습에 실망한 대중들이 이 힘든 시대에 예술의 입지를 줄이려는 구조조정을 지지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한다. 오래전부터 정부는 교육영역에서 예술계열 학과를 없애려 난리고, 예술영역에 들어가는 예산도 줄이려고 안달이다. 사람들은 그들대로 왜 토목공사와 병원 및 무상급식, 경제적 성장 동력 등에 들어가야 할 돈을 순수하여 효용성이 없는 예술에 써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는, 예술가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어떤 답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술이 필요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예술이 세계를 제대로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알려준다면, 그런 교육적/계몽적 예술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비현실적 상상에도 세계의 흔적이 있다


예술은 상상과 공상을 통해 창의성을 표현하고 그런 예술을 감상하는 이들의 창의성을 키워줄 수 있다.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 1955~2011)는 창의성을 그저 사물들을 연결하는 일이라고 말했는데, 고대 이집트의 스핑크스로부터 프랑스 화가인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의 스핑크스에 이르기까지 이질적인 것들이 연결된 사례는 많다. 오늘날 예술가들만이 아니라 과학자와 사업가들도 다양한 것들을 연결시킨다.

연결시키려면 연결되는 복수의 대상들을 알아야 한다. 연결시켜 만들어진 창의적 예술현상의 의미를 자기 작품의 가치로 포장할 수 있다. 포장이 어설픈 주장이 아니라 놀라운 논리에 기초하면 더욱 좋다. 예술가들의 비현실적 상상은 현실에 없던, 그러나 현실의 어떤 가능한 측면을 구성하고 폭로하는 일일 수 있다. 많은 경우 비현실적 상상에 세계의 흔적이 있다. 비현실적 상상이 오히려 너무나 현실적인 것이 될 때, 예술의 가치가 분명하게 평가될 것이다. 결론은 창의성이 상당부분 인지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 김진호,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 (서울: 갈무리, 2017).
· 에드워드 윌슨, 이한음 역,『지구의 정복자』 (서울: 사이언스북스, 2013).
· 로먼 크르즈나릭, 김병화 역,『공감하는 능력』 (서울: 더퀘스트, 2014).
· 게르하르트 폴머, 문성화·홍건영 역,『진화론적 인식론』, (대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1).




김진호_작곡가·음악학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4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여 음악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안동대학교 예술체육대학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저서로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이 있다. 작곡가로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KBS교향악단이 연주했던 피아노 협주곡 <유리 절벽 위에서의 축제> 등이 있다. 현재 현대음악 및 진화심리학의 관점으로 보는 작곡가의 마음에 대해 연구 중이며 연구 결과가 최근『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김진호_작곡가·음악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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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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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30

    선생님 글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강연 자주 하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