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20.11.16 조회 2977
  • 페이스북
  • 트위터
  • url복사
  • 프린트

[춤과 건축] 막춤의 배경으로서의 건축

[춤과 건축]



<춤:in>에서는 2020년 한 해 동안 ‘춤과 건축’이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한다. 춤과 건축이 공유하고 있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춤과 건축 그 사이를 탐험한다. 건축 전문가와 건축을 그 소재로 다루는 예술가들의 글을 통해 새로운 정보와 영감을 전달하고자 한다.


[춤과 건축]막춤의 배경으로서의 건축

서재원_건축가

ⓒ권민호, PaTI 일러스트레이션 스튜디오. 모갈2호

ⓒ권민호, PaTI 일러스트레이션 스튜디오. 모갈2호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강남에 건물을 완공했다 하여 호기심에 기사를 찾아보니 무슨 아이스크림, 혹은 구름덩어리 같은 것을 머리에 얹혀 놓은 듯한 건물이 나왔다. 기사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중 헛웃음이 빵 터진 기억이 났는데, 얘기인즉슨 건물 위에 얹힌 그 정체불명의 곡면 덩어리가 우리나라의 동래학춤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일반인이나 무용계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의 접근은 최소한 건축가인 나에게는 더는 새롭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기껏해야 춤사위의 한 정지상태를 나름대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양으로 형상화한 것에 불과한데, 나는 이런 과장된 수사와 직설적인 형상화가 오히려 건축인의 한 사람으로서 손발이 오그라든다.

물론 건축에서 이러한 직설화법이 역사적으로 없었던 것도 아니고 키치(kitsche)가 난무하는 지금의 ‘포스트-포스트 모던’한 사회에서 안 될 것도 없지만, 유독 그 대상이 춤일 경우에 더욱 반감이 드는 것은 아마도 춤이 가진 결정적 속성인 시간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얄팍함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 즉 건축이 가진 태생적 소여, 괴테의 말을 빌리자면 '얼어붙은 음악'의 그 '얼어붙은'에 대한 탈주적 욕망이 들통나는 듯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춤이나 안무를 건축으로 전환하고자 했던 노력은 바우하우스를 필두로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10여 년 전 노들섬 공연 예술센터의 현상설계 당선작 또한 한국무용의 춤사위를 새의 날개 같은 모양으로 지붕에 구현했던 기억이 난다.

슬프게도 건축은 정지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 때문인지 춤에 대한 동경이 있는 듯한데, 그래서인지 건축대학의 조형 수업이나 야심 찬 졸업 작품들을 보면 간혹 춤의 근본적 속성을 건축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처절한 노력이 보이는 작업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동작을 포획하고자 했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그림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2>(1912)나 말이 달리는 장면을 다중 노출하여 찍은 사진처럼 춤 동작의 궤적을 트레이싱하거나 무용수(solid)와 허공(void)간의 관계를 형상화한 것들로서 이러한 근본을 포착하려고 했던 시도들은 오히려 너무 추상적이어서, 결과만 놓고 보면 대체 춤과 무슨 연관이 있냐는 의문을 낳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쯤 되면 나에게는 건물에 춤과 무용의 시간성을 담아내는 것은 어찌 보면 애당초 사랑해서는 안 될 상대를 짝사랑한 것은 아니었던 건지 의구심마저 들기도 한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 나도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이나 피나 바우쉬(Pina Bausch) 같은 전설적인 위인에 대해서 아는 체라도 좀 하고 싶지만, 무식하게도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춤은 어린 아가들이 흥에 겨워 추는 몸짓이나 관광버스에서 아주머니들이 추는 막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몸치 중 몸치인 나는 춤을 춰본 것이 과연 언제인지 기억조차 없지만 나도 분명 어릴 적엔 스스럼없이 남들 앞에서 춤을 추었을 텐데, 지금은 뭐가 그리 두려운지 혼자 있을 때도 춤을 춰보다가 이내 금방 쑥스러워 그만두고 만다. 어찌 보면 춤이란 것은 말보다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라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감정을 억누르고 주변을 먼저 의식하며 살도록 길들여진 듯하여, 착잡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스스럼없이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면 춤 솜씨는 둘째 치고, 그 용기와 자유로운 정신에 경외감을 가지고 보게 된다. 상대가 있을 때도 있겠지만 혼자서 허공에 추는 춤을 떠올려보면 그 정신은 끝없이 자신의 심연을 파고드는 한없이 외로운 과정이리라.

건축이 춤을 배워야 한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떻게 춤을 건물에 표상할 것인가가 아니라 스스럼없는 용기와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정신을 곧추세우면서도 자신의 깊은 내면을 파고드는 춤꾼의 정신이 아닐까? 시간이 흘러 이 시대의 건축이 비록 자본의 시녀로 전락한다고 할지라도 그 욕정까지 거세당한 것은 아닐진데, 우리 건축가들이여! 관광버스에서 추는 막춤이면 어떠랴. 이제는 어깨에 짐을 약간은 내려놓고 스스럼없이 일어나 두 팔을 휘저으며 손가락을 허공에 드리워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건축이 모두 똑같은 춤을 추지 말고 좀 어설프다 한들 누구는 탱고를, 누구는 디스코를, 힙합을, 탈춤을 눈치 보지 않고 한바탕 추는 것이 너와 나에게 모두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얼마 전 뒤늦게 본 봉준호의 영화 <마더>(2009)의 엔딩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이미 세상을 훌훌 털어버린 듯 신나게 몸을 흔들던 ‘엄마들’ 사이로 서서히 일어나 무리에 엉겨 붙어 ‘엄마들’과 하나가 되는 ‘나의 엄마’ 김혜자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어떠한 꾸밈도 없이 나 스스로를 내 몸뚱어리에, 세상에 던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춤이라고 스스로 되뇌며 한참을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어디선가 인터뷰를 보니 봉준호 감독은 이 장면을 위해 치밀하게 장소를 섭외하고 일 년에 한 번 있는 특별한 날에 맞추어 촬영했다고 한다. 나는 이 장면이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엔딩 중 하나라 확신한다. 어디론가 빠르게 허허벌판을 가로지르던 버스와 불안하게 패닝하며 따라가던 카메라, 흔들리는 망원의 프레이밍, 그리고 사람들의 무리를 관통하던 낮은 고도의 거대한 태양 빛과 불그스름한 허공이 만들어 낸 역광의 볼륨감, 미친 듯이 춤추는 사람들의 실루엣, 관광버스의 천박한 트로트 송과 배경에 깔리던 처연한 뜯는 듯한 기타 소리, 그리고 결정적인 배우 김혜자의 몸부림, 완벽한 미장센이다. 건축가인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장면이다. 건축 또한 주인공이 아닌 삶(춤)의 배경이 될 때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이리라.

영화 <마더> 스틸컷 ⓒ2009, 봉준호

영화 <마더> 스틸컷 ⓒ2009, 봉준호
서재원_건축가, 에이오에이 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대표 서재원은 대한민국 건축사로, 에이오에이 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의 대표이다. 한국 사회가 가진 다면적 상황을 ‘비판적 수용(critical acceptance)’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초-참조적 건축(hyper-referential architecture)'을 통해 '동시대성'을 건축으로 담고자 노력하고 있다. 주요작업으로 단단집, 남녀하우스, 고양이집 등이 있으며 한양대 겸임교수와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권민호_일러스트레이터 권민호는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와 왕립예술대학원에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드로잉과 영상을 기반으로 일러스트레이션과 순수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하고 있다. 관찰에 기반을 둔 재현 그림으로 생각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엮는다. 우리 근·현대의 풍경을 소재로 지금 우리 삶을 보이려 노력한다. 색을 다루는 것이 서툴러 잘 쓰지 않지만, 때론 '움직이는 빛'으로 그림 위에 색을 입힌다.


목록

댓글 1

0 / 300자

  • -_-2020-11-19

    왜 이렇게 다닥다닥 붙여놔서 읽기 힘들게 편집하나요? 춤추는 애들은 어차피 안 읽을 거 같아서? 아님 딱히 대단한 내용도 아닌 글을 읽는 걸 옆 사람에게 보여 부끄러워지지 않게 해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