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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06.11 조회 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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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마법에 동참하는 몸들

이은재_지하출판소 대표

사라지는 마법
아르코 대극장의 무대장치 반입구가 열리자 종이를 한가득 안은 나체의 무용수들이 천천히 무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사라졌다. (Anna Halprin, Parades & Changes, replay in expansion, 2011)

딸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어머니는 공허한 질문 하나를 객석을 향해 물었다. “내 이름이 뭔지 알아요?” 그리고 암전, 그 어머니는 사라졌다. (안정민, <고등어 공주>, 2013)

예술의전당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잔디밭에 도착해 한참을 바라보았던 것은 청계산 능선에서 움직이는 두 불빛이었다. 그것도 사라졌다. (김보용, <텔레워크>, 2013)

정말로 마법사 같은 모습을 한 무용수가 크게 진동하는 천막을 배경으로 신들린 듯한 춤을 추었는데, 그도 사라졌다. (Akram Khan Company,Vertical Road, 2011)

헛기침을 내뱉으며 무대를 가로지르던 한 무용수는 단순히 나의 망막에 맺히는 이미지가 아닌 분명한 존재로 내게 전해졌다. 그리고는 곧 사라졌다. (윤상은, <죽은 대상을 위한 디베르티스망>, 2015)

반투명하게 얼룩진 창문 밖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그 옆에 똑같은 이미지의 영상, 플라스틱 박스와 확대된 영상의 픽셀들, 마룻바닥과 잔잔한 음악 사이로 걷는 걸음, 그리고 무기력한 말. 이 모든 것들도 지금은 다 사라져버렸다. (Lee Kit, Resonance of a sad smile, 2019)

사라지는 마법이다.

ⓒ이은재
고대 희랍의 도공이었던 부타데스의 딸은 날이 밝으면 먼 길을 떠나 영영 못 볼 애인의 그림자를 따라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 선은 애인의 일면을 닮은 그림이 되어 벽에 남았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플리니우스의《박물지》에 기록된 그림의 기원에 대한 신화가 주목하는 건 여기까지이다1) 사라지는 것의 부본을 남기기 위해 애쓰는 행위와 행위의 결과로 벽에 남은 이미지. 그런데 남자가 사라지고 난 뒤, 벽이 아닌 이 여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해 이 여자의 몸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그리고 작품이 사라지고 난 뒤에 관객의 몸에는 무엇이 남는가?
관객의 몸

다양한 학문 분야의 연구 대상이 되는 관객의 몸과 경험을, 이 글에서는 나 자신을 표본으로 삼아 주관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한 사람의 몸을 가용자본, 가용시간, 축적된 정보, 신체적 조건, 인지능력, 성격, 기질, 의식·무의식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각 항목으로 구성된 몸을 통해 관객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추정해본다.

샘플1. 이은재(만30세, 여)
- 가용자본
프리랜서 예술가로서 금융자본은 부족한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예술 분야의 사회적 자본은 갖춘 편이다. 따라서 금전적인 상황에 따라 오페라나 뮤지컬 관람에는 다소 부담을 느끼며 주로 국내에서의 전시, 무용, 연극 공연이나 해외 창작자의 내한 공연을 관람한다. 동시에 직업 특성상 자연스럽게 축적한 네트워크로 인해 지인들의 활동을 향유 하는 것만으로도 문화생활의 넉넉함을 잃지 않는 편이다.
- 가용시간
무자녀 프리랜서로서 직장인이나 육아 주체자보다 높은 가용시간을 갖는다. 따라서 다른 직업이나 다른 생애주기에 속한 사람들에 비해 작품 관람 의지가 쉽게 실현될 수 있다. 또한, 수도권에 거주하며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므로 이동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중 관람을 위한 이동 시간은 이따금 관련 글을 읽거나 감상을 곱씹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 축적된 정보
한국 사회에서의 일반적인 상식을 습득하였다. 창작 의도와 결과 사이의 정합성을 끈질기게 질문하는 시각예술교육의 영향을 받고 관련 지식을 파편적으로 습득한 사람으로, 한때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편향된 관점을 가졌었다. 그 이후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가 향상됨에 따라 작품을 특정한 틀로 속단하지 않고, 감상하는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감상 경험과 지식 그리고 사회적 통념을 기준으로 새롭게 보고 있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판단하게 된다.
- 신체적 조건
키 161cm, 체중 50kg 내외. 상체에 비해 하체가 발달하여 걷는 것에 쉽게 지치지 않아 비엔날레와 같은 대규모 전시 관람에 좋은 조건을 갖춘 듯하다. 그러나 혈당이 떨어지면 시력 저하와 어지럼증을 호소하고, 신체가 쉽게 차가워지므로 관람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은 관객이 된다. 실제로 배가 고파서 워크숍 참여를 중도에 포기하고 허기를 달랜 뒤에야 스스로 한심함을 의식했던 경험이 있다. 또한, 후각이 예민하여 설치 작품의 원자재에서 풍기는 냄새가 감상을 압도하기도 하며, 카페인에 취약하여 커피를 섭취한 뒤 작품을 관람하면 과도하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그때 느끼는 흥분의 요인이 작품인지 커피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 인지능력
사회적 활동과 다양한 경험을 축적함에 따라 인지능력이 조금씩 향상되는 것 같다. 예전에 비해 작품 감상에 대한 욕구가 증가한 것과 작품을 통한 공감의 폭이 넓어진 것 역시 인지능력의 향상에 따른 결과라는 추측을 해본다. 하지만 여전히 작품에서 제시되는 자극과 정보를 모두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며, 그 누락이 또 다른 감상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 성격
고양된 감각을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서 고양된 감각은 다음과 같이 상정된다. ‘신체와 정신의 감각이 무한히 넓은 공간 가운데 명확한 좌표로 위치 지어지는 듯한 고양된 존재감.’ 그리고 이러한 감각을 쫓아 작품을 감상한다. 이것이 획득될 때, 그 짧은 순간이 의미 있는 점이 되어 감상 이후의 일상의 시간에 계속 남겨짐을 느낀다. 한편, 혼자 허황된 공상에 잠기는 일이 잦고 사고의 흐름이 매우 주관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따라서 작품 관람에서 수용된 정보를 취합할 때 이해하기 편리하거나 선호하는 결론을 향한 방향으로 작품을 곡해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작품의 서사적 구조가 모호한 경우, 그러한 왜곡된 감상이 더 쉽게 이루어진다.
- 기질
자신의 감각과 느낌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며 그 표현 혹은 자신이 인정받을 때 만족감을 느낀다. 따라서 깊이 감동받은 작품을 관람한 뒤에는 그 감동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하여 버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관객들과의 대화를 즐기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큰 감동이 일변 만들어내는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관람 이후의 이야기 덕에 한층 더 풍성한 감상을 얻은 관객이 된다.
- 의식·무의식
죽음과 남은 삶의 시간에 대한 의식이 강해서 무의식적으로 항상 긴장을 하고 있는 듯하다. 제한된 일생 동안 원하는 바를 이루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방향과 추진력이 분명하지 않아 방황하기도 하고 자존감이 낮아지는 경우가 잦다. 이로 인해 좋은 작품을 관람하면 충만한 감동의 기저에 조바심 섞인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렇게 한 관객의 몸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무엇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 글이 한 사람의 모든 면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지금 설명된 조건이나 특성들이 시간에 따라 변화될 가능성도 고려해야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을 유동적인 시공간에서 변화하는 무수한 면을 가진 입체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입체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과 특정한 상황에서 또 다른 입체, 즉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것이 바로 창작과 감상의 모습이 아닐까? 다양한 면과 면, 점과 점의 접촉으로.

몸과 몸의 접점

창작자와 관객이 작품을 매개로 만들어내는 접점에는 무수한 경우의 수가 있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입체적인 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접점의 수만큼, 다양한 경우로 작품이 수용된다. 창작자는 자신의 생애에 따라 표현하고 싶은 것이 변하기도 하고, 창작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건과 상황도 유동적이다. 그리하여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창작을 결심한 사람은 다양한 선택을 한다. 공연자와의 조율을 고민하고, 창작에 사용되는 물질 혹은 오브제를 선택하며, 관객이 경험할 시간을 설계한다. 이렇게 창작자는 관객과의 접점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 과정은 결코 창작자가 통제 가능한 선택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관객 역시 자신의 개인적 특성에 따라 작품을 감상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도 물론 관객의 의지와 무관한 외적 상황들이 작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감상의 경우들을 만들어내는 창작자와 관객 사이에는 감각의 전이와 그것의 실패, 이해와 오해, 그리고 전혀 새로운 것의 생산 가능성이 놓여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확률 1과 0 사이의 장에서 각각의 몸들은 접점들을 만들고 무언가를 남기고 있다.

ⓒ이은재
다시, 사라지는 마법

11세기 일본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바오지 화상 입상(?誌和?立像, Priest Baozhi)에 관한 설화는 천황의 명령에서 시작되었다. 천황은 축지법을 쓰는 것으로 잘 알려진 바오지 화상을 기리기 위해 화공을 시켜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그러나 바오지 화상은 그림을 그리려는 화공 앞에서 얼굴을 여러 면으로 바꿔 11면 관음보살을 출현시킴으로써 그림 그리기를 방해했다고 한다2)

ⓒ이은재

그 결과, 초월적이지만 지속하지 못하는 존재를 뚜렷한 이미지로 남기고자 했던 천황의 명령은 어리석은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설화는 작품이 사라진 뒤에 남는 것을 명료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내게도 교훈이 된다. 작품을 감상하고 길을 나서는 관객들 안에 무엇이 남는지, 그리고 감상의 순간에 그 접점의 모양은 각각 어떠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바오지 화상의 설화는 한 점이 아닌 계속해서 변하는 무수한 점들에 답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창작자와 관객의 접점들에 대해 '그것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법 같은 것'이라 말하고 말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내게 매년 집행되는 예술 공공 기금의 실질적인 가치를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 사라지는 마법에 동참하는 몸들에 있다고 의심 없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1) Pliny. Natural History, XXXV, 12, AD 77.
  2. 2) 교토국립박물관, ?誌和?立像 의 한국어 음성 작품 설명
이은재_지하출판소 대표 창작자이자 감상자로서 예술작품 수용의 실체가 궁금하여 '관객'에 관한 1인출판사를 시작했다. 출판 이외에 전시 기획과 공연 홍보도 진행한다. 관객에 관련된 연구와 연대의 갈증을 느끼며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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