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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11.12 조회 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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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위에서 춤 추기”
― 드랙의 경우

박종주_미학연구자

하나의 정신이 저 신앙, 확실성에의 요구와 결별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실행하여, 가벼운 밧줄과 가능성 위에서도 몸을 바로 세우고 드리워진 심연 위에서 춤을 추는 자기규정의 기쁨과 힘, 의지의 자유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한 정신이야말로 한마디로 자유로운 정신일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영화포스터
예술적인 것, 미적인 것으로서 삶을 읽고 실천하려 했던 철학자 니체의 ‘심연 위에서의 춤’이라는 유명한 말로 이 글을 열어 보기로 한다. 삶이 미적인 것이자 예술적인 것, 혹은 아예 그 자체로 예술이라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각자가 예술가일 테다. 그런데 예술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감정이나 감각의 층위에서) 잘 모사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그것보다 ‘아름다운’ 무언가를 생산하는 ― 그러나 ‘아름답다’는 규정이 결국 일상의 영역에 속한다면, 결국은 (상상 속의 것이라고는 해도 이미 정형화된) 무언가를 모사하는 ― 것? 하지만 저 심연 위에서의 춤이라는 것이 삶의 양식을 가리키는 메타포라면, 니체적 의미에서 예술은 (혹은 삶은) 무언가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지침(指針) 없이 산다는 것은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나침반이나 지도 없이 길을 찾는 것이나 설명서 없이 무언가를 조립하는 일에서부터 절대적인 규칙 없이 삶의 전 영역을 영위하는 것까지 모두가 말이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 이 삶의 끝에 나에게 어떤 (비)세계가 주어질지 모르는, 나의 어떤 말을 상대가 어떻게 이해할지 모르는 ― 불확실성의 순간들을 모면하기 위해 사람들은 표준화된 어휘 체계부터 종교적인 세계관까지,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 보다 평온한 삶, 보다 안전한 삶, 이런 것들을 위해서다. 어쩌면, 춤도 마찬가지일 테다, 무언가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 최소한의 방향을 지정해 줄 무언가를 원한다. 오죽하면 혈액형까지 동원해 자신의 성격을 알려 들까. 위의 인용문을 비롯해 수많은 곳에서 니체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지금 여기의 삶 너머에 있는 확실성의 세계를 설파하며 현생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기고 특정한 양식대로 살 것을 강요하는 종교적 신앙이겠지만, 나는 지금 다른 종류의 신앙 하나에 관심을 두고 있다. (흥미롭게도 저 종교적 신앙에서 또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성(섹스sex와 젠더gender, 섹슈얼리티sexuality 모두)에 대한 신앙, 신체 특정 부위의 생김새를 특정한 기준으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특정한 행동과 표현 양식을 부여하는 신념 체계로서의 성.
통용되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 문학, 지배적인 재현 방식을 통하지 않는 조형, 확립된 화음을 무시하는 음악 같은 것들이 있다. 외적인 무언가를 인용하거나 이용하지 않는 이런 예술들 가운데에 (그 중의 하나이자 어쩌면 특권적인 영역으로서) 춤이 있다. 무용수 자신을 표현의 대상이자 재료, 매체, 결과물로 삼을 때, 춤들은 저러한 두려움 바깥에서 아무런 지침에도 기대지 않고 행해지는 듯 보인다. 저런 춤을 추는 이는 스스로의 내면과 몸을 탐구하고, 그로부터 사용 가능한 언어를 발굴하며, 그것을 스스로 내어보인다. 나는 그런 지류의 한 끝에 드랙(drag)을 두고 싶다.
다만 흔히 통용되는 대로 (특히 동성애자) 남성의 여장을 가리키는 말로 이 단어를 쓴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러나 드랙이라는 개념이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유정물과 무정물의 생산적 관계들을 가리킬 수 있다”고, “옷들, 라디오들, 머리카락, 다리 등, 타자나 다른 사물들을 재현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관계들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다”고 말하는 레나테 로렌츠(Renate Lorenz)를 좇아 드랙을 ‘상대방 성의 특징을 (기껏해야 과장을 섞어) 모사하는 일’이 아니라 특정 성의 당연한 특징으로서 전제되는 표지들에, 그것을 판가름하는 경계들에 의문을 제시하는 실천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특히 ‘남성의 여장’으로 보이는) 드랙을 단순한 여성성의 전유로 읽고 비판하는 관점이 있지만, 일상의 영역에서는 접할 수 없는 화장이나 머리 모양 등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것이 과연 어떤 여성성/남성성을 ‘모사’하거나 ‘재현’하는 일인가, 하고 말이다.
드랙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혹은 이상적인 것으로 상상되는 여성/남성을 탐구하고 재현하지 않는다. 종종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로만 구성된 틀 속에서 이해되고 분류되기에 그 결과물 또한 잠정적으로는 여전히 같은 틀 속에서 명명되지만, 드랙은 개인의 층위에서 말하자면 자신의 욕망을 탐구하고 구체화하는 일이며, 개념의 층위에서 말하자면 그러한 과정을 통해 여성성/남성성이라는 관념의 극한을 실험하고 결국에는 파괴하는 일이다. ‘자신의 욕망을 탐구하고 구체화한다’는 말은 가령 억압되어 온 자신의 여성성을 되살리려는 시도 같은 것들에도 물론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탐구가, 여성이나 남성과 같은 기존의 어휘를 스스로에게 갖다 붙이는 것이 부대끼는 사람들에게서 ― 탐구의 주체로서 자신의 위치를 ‘여성으로서’와 같은 말로 당연한 듯 제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 수행될 때 그 과정이나 효과는 아마 다른 차원의 무언가가 될 것이다.
지침 없이 산다는 것은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그러한 두려움은 ― 어쩌면 피로와 게으름은 ― 종종 인간으로 하여금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지침에 기대어 살도록 만든다. 젠더 표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사회적 기제들을 비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이라면 여기서 개개인이 갖는 공포감이나 회피 심리를 말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비판의 초점을 사회에서 개인에게로 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 어떤 방식의 비판을 할지부터를 새로이 따져야 함을 말하려 하는 것임을 밝혀 두기로 한다. 저 부당한 지침 앞에서 우리는 옳은 지침을 요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지침이 필요한 영역인지부터를 따져 물어야 할 것인가?
지침 없이 산다는 것은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지침이 없는 것이 옳은 영역의 문제일 때조차도 그렇다. 지침 없는 삶은 반복할 수 없는 삶, 매 순간을 새로이 만들어야 가야 하는 삶이니 말이다. ‘드랙의 문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가장 쉽게 포착되곤 하는 과장이라는 요소를 들어도 좋을 것이다. 연이은 과장은 언제나 거짓말을 낳는다. 그것은 결국 고정된 진실이라 여겨지는 무언가를 파괴하는 일이다. 과장을 드랙의 문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드랙의 문법이란 결국 문법 그 자체의 파괴가 될 것이다.
연행자에게도 관람자에게도, 이러한 파괴의 퍼포먼스는 하나의 심연이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서로를 전면적으로 재독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무엇이 내어 보일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무엇이 찾아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러한 보임과 봄은 어떤 형태로 행해져야 하는지, 하나하나 익혀 나가는 수밖에, 그리고 또 그것마저 부정하고 새로이 익혀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적인 무언가를 인용하거나 이용하지 않고서 수행되는 데에 특권적인 영역으로서의 춤, 이라는 앞서의 말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란다. 완공된 도로들만이 표시된 지도 없이도, 그 중에서 선택된 뻔한 약속장소 없이도 우리가 서로 반가이 만날 수 있을 몸짓으로서의 춤. 심연 위에서의 춤. 아무런 표시 없는 백지 지도의 독법으로서, 드랙을 권해 본다.


참고한 문헌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프리드리히 니체, 안성찬·홍사현 옮김, 《즐거운 학문/메시나에서의 전원시/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니체전집 12 권), 책세상, 2005.

Renate Lorenz, Queer Art: A Freak Theory, transcript Verlag, 2012.

박종주_미학연구자 대학에서 문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등에서 페미니스트 연구자·활동가들과 교류하는 한편 연극 집단 “콜렉티브 뒹굴”, “시각 이미지를 만드는 페미니스트 프로젝트 ‘노뉴워크(No New Work)’” 등에서 기획·비평 업무를 맡고 있다. ‘박종주’ 혹은 ‘안팎’이라는 이름으로 예술과 정치에 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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