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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4.11 조회 4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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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을 번역하기

글_박재용_통·번역가, 전시기획자

주한영국문화원은 2017-18 한영 상호교류의 해 폐막 행사로 《페스티벌 아름다름: 아름다운 다름》을 주최했다. 평창올림픽을 기념하는 문화올림픽의 일환이기도 한 이 행사를 통해, 칸두코 댄스 컴퍼니와 안은미가 함께 만든 신작 <굿모닝 에브리바디>와 안은미, 김보라의 신작 <공·空·Zero>가 각각 아르코 대극장에서 3월 16, 17일 양일간 상연되었다. 두 공연 모두 장애인과 비장애인 무용수, 안무가가 함께 창작한 신작으로, 장애로 인해 평소 공연 관람이 어려운 관객을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제공했다. <굿모닝 에브리바디>는 삼성전자에서 개발한 VR 시각보조 앱 ‘릴루미노’를 활용했으며, 본 에세이에서 다룰 <공·空·Zero>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오디오 디스크립션’을 영어와 한글로 제공했다.

<공·空·Zero>의 오디오 디스크립션은 스코틀랜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엠마 제인 맥헨리(Emma Jane McHenry)가 집필했다. 오디오 디스크립션의 내용이 영어로 쓰여졌기에 먼저 그 내용을 한국어로 내용을 옮겨야 했고, 주한영국문화원은 필자에게 번역과 통역을 의뢰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영어로 쓰여진 내용을 단순히 한국어로 변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필자는 엠마 제인 맥헨리와 함께 오디오 디스크립션을 ‘낭독-공연’하게 되었다.

평소 무용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극도로 제한적인 저시각인 및 시각 장애인들에게, <공·空·Zero>와 같이 음성으로 설명을 제공되는 공연이 이뤄질 기회가 언제 다시 있을지 지금으로선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따라서, 본 에세이를 통해 오디오 디스크립션의 번역/공연 과정을 공유함으로써 추후 오디오 디스크립션을 통한 공연 예술 접근성 향상에 기여하고자 한다.

오디오 디스크립션이란?

오디오 디스크립션(Audio Discription, 이하 AD)은 명칭 그대로 ‘음성을 통한 설명’을 의미한다. 현재 영국에서는 공중파로 송출되는 주요 방송국(BBC, Sky 등)의 콘텐츠 중 최소 20퍼센트 이상에 대하여 AD의 제공이 의무화 되어 있으며, 시청자들은 디지털 셋톱박스를 통해 별도의 AD 채널을 선택하여 음성 설명이 제공되는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다.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방송 뿐 아니라 영화와 공연 분야에서도 저시각인 및 시각장애인을 위해 AD를 제공하고 있다. 이 경우, 관람객에게 수신기와 이어폰(헤드폰)을 제공해 영화, 공연의 내용을 설명하는 음성 콘텐츠를 제공한다. 영화의 경우 텔레비전 방송과 동일한 형태로 AD를 제공하며, 공연은 주로 고정된 내러티브를 따라 진행되는 연극이나 고전 무용을 위주로 AD 제공이 이뤄진다.

AD의 목적은 시각장애가 있는 관객들이 비장애인 관객들과 최대한 동일한 조건에서 콘텐츠를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일반 관객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다양한 요소가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공연 감상에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무대에 오른 퍼포머의 성별은 무엇인지, 어떤 옷을 입었고 머리카락의 색은 무엇인지 등의 정보를 AD로 설명해야만 하는 이유다.

현대무용과 오디오 디스크립션

일반적으로 AD를 제공하는 공연은 내러티브 위주로 이뤄지며, 공연이 반복되는 동안 무용수들이 행하는 움직임에는 큰 편차가 없다. 요컨대 <호두까기 인형>에서, 어떤 무용수가 어떤 시점에 특정한 움직임을 수행하는지는 정해져 있다. 따라서 라이브로 AD를 제공하는 경우에도 내용이 변하는 범위는 그리 크지 않다.

그렇다면, 퍼포머들이 동일한 움직임을 반복하는 것보다 안무의 대목적을 실현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현대무용 공연의 AD는 어떠해야 할까? 김보라와 마크 브루가 함께 안무하고 공연한 <공·空·Zero>에서, 무용수들은 서로가 약속한 범위를 지키면서도 구체적인 무용 동작은 매 공연마다 조금씩 달라졌다. 움직임의 주제는 동일할지언정, 실제로 무대 위에서 동작을 수행하는 시간이나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연이 매번 조금씩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AD의 내용 또한 달라져야만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무용 공연의 AD는 고정된 텍스트의 낭독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는 자체적인 퍼포먼스가 된다.

뼈대로서의 AD

3월 16, 17일 양일간 상연된 <공·空·Zero>의 AD작성이 완료된 시점은 3월 15일을 전후로 한 시점이었다. 엠마 제인 맥헨리는 AD작성을 위해 공연 약 1주일 전에 한국에 입국했고, 이후 공연 직전까지 리허설을 참관하며 AD를 작성했다. 번역/통역을 의뢰한 영국문화원도, 의뢰를 받은 필자도 (특히 현대무용의) AD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나 한국어로 된 사례를 알지 못했기에, 공연일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이 커져갔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는 가운데, 엠마 제인 맥헨리에게 필자가 번역/통역을 하게 될 AD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물어보기도 했다.

“(현대무용) AD는 일종의 ‘뼈대’이며, 공연과 별개로 존재하는 텍스트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말하자면, 앞이 보이지 않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내용이 변하는 퍼포먼스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텍스트로써, 현대무용의 AD는 변화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구조를 스케치하는 텍스트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니, 실제로 사용한 AD 텍스트의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공·空·Zero> 공연의 첫 부분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보라가 무대에 등장합니다.


손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걸어갑니다. 손이 날개처럼 뒤로 올라가기도 하고, 원을 만들며 뒤를 돌아보기도 합니다.


무대 오른쪽에서 마크가 등장합니다. 손으로 벽을 느끼고, 원을 그리며 이동합니다. / 보라는 무대 왼쪽에서 바닥에 툭, 앉았다 일어나기도 합니다. 보라는 완전히 자신의 내부에 집중합니다.


마크가 휠체어를 몰아 직육면체로 다가갑니다. (시계침 소리)


오디오 디스크라이버는 무대 상황을 중계하는 모니터를 살피며, AD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무대를 설명하게 된다. 이때, 무대 오른쪽에서 등장한 ‘마크’가 ‘손으로 벽을 느끼고, 원을 그리며’ 이동하는 대신 직선으로 이동하고, ‘보라’가 ‘툭, 앉았다 일어나’는 대신 상대 무용수의 움직임에 대응에 곧바로 다음 움직임을 수행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디오 디스크라이버는 그때그때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AD의 내용을 달리해야 한다.

물론, 관객은 어느 쪽이 ‘마크’인지, 누가 ‘보라’인지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공연을 전체적으로 소개하면서 무용수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한 알려주게 된다. 요컨대, 아래와 같이 짧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김보라는 비장애인이며, 여성입니다. 공연 중에는 머리를 짧게 뒤로 묶고 있으며, 머리는 검은색입니다.


마크 브루는 장애가 있는 남성입니다. 휠체어를 사용하며, 공연 중에도 휠체어를 타고 이동합니다. 김보라와 함께 아주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춤을 춥니다. 서로의 몸을 지탱하는 것이지요. 마크 브루는 몸이 마른 편이고, 백인 남성입니다. 머리는 짧게 밀었고, 수염이 살짝 난 얼굴입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은 공연 의상을 다루는 부분에서 이뤄지는데, <공·空·Zero> 공연에서는 AD를 듣는 시각장애인 관객이 공연장에 도착한 뒤 오디오 리시버를 착용하고 공연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에 맞춰 공연을 사전 설명하는 부분의 길이와 깊이를 조정하며 진행했다.

또한, 한글로 작성된 AD는 엄밀히 말해 일반적인 ‘번역’과는 다른 종류의 텍스트임을 또한 밝혀야 하겠다. 말하자면 영문으로 쓰인 AD의 취지와 방향성을 번역자인 필자가 이해하고 체화한 뒤 이를 한글로 다시 풀어내 쓴 것이 한글 AD인 셈이다. 영어로 쓰인 텍스트를 한글로 단순 번역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진행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공연 최종 리허설이 진행될 무렵 완성된 영어 AD의 내용은 실제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황과는 너무나 다른 내용으로 쓰여 있었다. 당시 필자는 영어로 된 AD의 최종본을 단순히 번역하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막연히 품고 있었다. 하지만 영어로 쓰인 AD의 내용과 최종 리허설을 위해 무대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대응하지 않음을 알았을 때, 엠마 제인 맥헨리가 여러 차례 강조했던 ‘뼈대로서의 AD’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번역이 아니라 글쓰기

공연을 불과 이틀 가량 앞둔 상황에서, 한글 AD의 텍스트를 작성하고 낭독-공연해야 하는 필자에게 주어진 텍스트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공연과는 상이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엠마 제인 맥헨리에 따르면, AD의 ‘뼈대’는 마치 무용가의 안무와 같이 반복되는 주제와 표현, 어휘로 구성되어 있다. (동작을 설명하는 특정한 어휘는 안무가와 상의를 거쳐 정하기도 한다.) 오디오 디스크라이버는 이러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일종의 라이브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셈이다.

따라서, 당초 단순한 ‘번역’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한글 AD 텍스트의 작성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재료’를 활용해 이뤄졌다.

(1) 엠마 제인 맥헨리가 작성한 영문 AD 텍스트
(2) 공연 최종 리허설을 녹화한 영상 파일
(3) 엠마 제인 맥헨리가 최종 리허설과 동시에 낭독-공연한 AD를 녹음한 음성 파일

필자는 (1)을 읽은 뒤 (2)와 (3)을 동시에 시청, 청취하며 한글 AD의 내용을 작성했다. 이러한 과정으로 완성한 한글 AD 텍스트는 본 에세이에 첨부한 MS워드 파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AD 텍스트의 내용과 실제 공연 시 무대 상황에 대응해 ‘공연’한 내용 또한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며 파일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2018-04 공공제로 오디오디스크립션 - 박재용.docx

오디오 디스크립션을 위한 장비

한국에서는 AD를 제공하기 위한 전용 장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관계로, <공·空·Zero>에서는 동시통역에 쓰이는 부스를 백스테이지에 설치하고 AD가 필요한 관객에게 이어피스와 리시버를 제공했다.

백스테이지에 설치된 부스 ⓒ박재용

백스테이지에 설치한 부스의 모습. 왼쪽이 한글 AD를 위한 부스이며, 오른쪽은 영어 AD용 부스이다. 사진 오른 쪽의 인물은 엠마 제인 맥헨리이다.

AD 부스 내부 모습 ⓒ박재용

공연 진행 시 AD 부스 내부의 모습. 사진 왼쪽의 컴퓨터 모니터에는 한글과 영어 AD를 모두 띄워두었고,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인쇄물은 한글 AD를 출력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영어 AD를 낭독-공연하는 가운데 발생할지 모르는 돌발 상황에 대응하고자 한글 AD를 낭독-공연하는 동안 영어 AD를 중계하는 리시버를 동시에 착용하였다. 왼쪽 귀로는 무대의 현장음을, 오른쪽 귀로는 옆 부스에서 진행되는 영어 AD를 들었던 것이다.

한편, 사진 오른쪽 위로 보이는 두 개의 모니터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겠다. AD를 공연-낭독하기 위해서는 무대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살펴보아야 했는데,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 백스테이지에 설치된 기존의 모니터는 약 1~2초 가량의 송출 지연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아트프로젝트 보라 측에서 무대 상황을 실시간으로 살필 수 있는 모니터를 추가로 설치해주었다.

AD를 위한 전용 장비를 가장 다양하게 개발, 보유한 회사는 독일의 젠하이저(Sennheiser) 사이다. 미국의 경우, 법무부의 명령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회의나 공식 행사에서 장애인을 위한 보조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젠하이저는 이에 대응하는 다양한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과 연동되는 솔루션은 ‘CinemaConnect’를 개발하기도 했다.

오디오 디스크립션이 제공됨을 알려주는 로고

<공·空·Zero>과 같이 AD를 제공하는 공연은 포스터, 리플렛 등에 위와 같은 로고를 삽입해 장애가 있는 관객들이 공연을 선택하는데 도움을 제공한다. 또한, 한국에서 진행된 이번 공연에서도 포스터에 위 로고를 삽입해 AD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공·空·Zero>를 통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오디오 디스크립션은 장애예술이라는 명확한 의제를 가지고 열린 《페스티벌 아름다름: 아름다운 다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비록 이틀에 걸친 짧은 시간 동안 공연이 진행된 탓에 더 많은 장애인 관객이 AD를 접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공연장을 방문한 여러 시각장애인 관객들은 비장애인 관객과 함께 현대무용을 관람한 경험은 AD가 없이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공연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할 수 있고, AD라는 방법은 아직 한국에서 충분히 시도되지 않은 영역이다. 이번 <공·空·Zero> 공연은 AD, 특히 현대무용에 있어서의 AD를 소개하고 시도하는 좋은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앞으로도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를 지닌 공연에서는 AD, 수화 자막 등 예술에 대한 접근성이 제한된 관객들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기를 기대한다.

미술, 예술, 인문학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통·번역가로, 전시 기획자, 연구자로도 활동한다. 주한영국문화원 아트팀에서 일했고(2012~2013), 일민미술관(2013~2014), 제5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2016)에서는 큐레이터로 일했다. 번역한 책으로 <마지막 혁명은 없다>(이솔 저, 현실문화연구, 2012) 등이 있고, <frieze>, <아트인컬쳐> 등 국내외 미술 잡지에 부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한다. 현재 서울리딩룸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융합예술센터, 한국 정보화진흥원과 진행하는 연구 프로젝트 <포스트-리얼리티>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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