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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7.27 조회 5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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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춤·시민·표현: 마오의 라스트 댄서 : 중국 문화대혁명기의 춤

[기획연재] 춤·시민·표현



〈춤:in〉에서는 시대 흐름을 주시하여 기존의 춤 담론을 주도해온 개인적 창조의 패러다임을 넓혀서 2017년 한 해 동안 시민을 위한 표현이 돋보이는 춤 표현 활동을 연재한다. 〈춤:in〉은 춤과 정치·권력·인권 사이의 담론을 발굴하여 ‘시민 사회 및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시민과 공생하는 춤 표현의 가치를 적극 사고하는 계기를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본란에서는 시대·문명·사회와 춤의 선순환적 조화를 성취한 특이 사례들이 함께 조명된다.


마오의 라스트 댄서
: 중국 문화대혁명기의 춤

김채현_춤비평가

1981년 중국 발레 무용수 리춘신이 미국 연수 중에 망명하였다. 국내에선 몇 해 전 영화 〈마오의 라스트 댄서〉로 그 전말이 널리 알려졌었다. 영화의 시선이 망명 일화에 쏠린 중에서도 리춘신이 받은 1970년대 중국 발레 교육도 더러 엿보인다. 이에 앞서 그는 자서전1)에서 칭다오의 오지에서 소년 발레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끝내 망명을 결행하기까지의 일들을 생생하게 이야기한 바 있다. 영화는 자서전을 토대로 하였고, 자서전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의 당시 상황은 영화에서 대체로 생략되었다.



줌아웃 에세이 김채현 관련 사진



그의 자서전은 억지스런 일들을 담담하게 소개한다. 예로서, 베이징무용학교에서는 발레와 기타 모든 과목을 합친 것보다 마오쩌둥의 이론 학습에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어느 날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학교의 특별 공연을 보고나서 간부들에게 말했다. “공연은 괜찮은데, 총과 수류탄은 어디 있는가? 정치적 의미도 없지 않은가?” 또한 장칭이 고전 발레와 중국 경극의 결합을 원했던 때문에 학교 시간표가 대대적으로 수정되었다. 새 기법으로서 플리에(무릎 굽힘 자세)를 하다가 손에 힘을 주어 쿵푸 동작을 취했고 포르 드 브라(팔가짐새)를 하다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마무리하였다.

리춘신은 1961년 생으로, 베이징무용학교에 입학한 때는 1972년이다. 그는 1979년 미국 휴스톤발레단에 1차 연수를 갔다가 다시 1980년에 2차 연수를 가서 결국 망명하였다. 이 모든 일들은 그가 20살이 되기까지 이뤄졌다. 그의 두툼한 자서전에서 절반 이상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이 시기까지 일이다. 평탄한 사회에서 10대 시기의 개인사를 자서전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무척 드물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리춘신의 자서전은 그의 10대 시기가 공감할 만한 사연이 많았던 때였음을 말해준다. 자서전에서 그 같은 공감을 뒷받침하는 요소로서 중국 오지의 빈궁한 생활상과 그 자신의 진정성 및 의지가 들어지겠지만, 이보다는 그가 성장기에 겪어야 했던 중국의 정치 정세가 훨씬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은 자서전 제목 ‘마오의 라스트 댄서’에서부터 시사되고 있다. 더욱이 중국의 궁핍상이나 그의 망명뿐만 아니라 발레 입문과 수련 과정조차 당시의 정치 정세와 직결되어 있었고, 그런 특수 상황 속에서 그의 청소년기는 유례가 없이 특이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줌아웃 에세이 김채현 관련 사진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를 숭배한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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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다양한 뱃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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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광장에서의 문화대혁명 거대 집회


이 시기를 문화대혁명기2)라 한다. 1966년 시작되어 10년간 전개된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3)이 자연사한 1976년에 종결되었다. 그 5년 후에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당과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안겨준 극좌적 오류로 공식화한 바 있다. 중국 대륙의 8억 인구 가운데 수백만 아니면 무려 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문화대혁명의 참상에서도 당시 문화예술이 어떤 상황에 처하였을지 짐작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리춘신이 자서전에서 소개하는 억지스런 일들이 당시에는 일상사였음은 능히 수긍이 되고도 남는다.

문화대혁명은 한마디로 1950년대 말부터 정치적 권위를 잃기 시작한 마오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일으킨 사회운동이었다. 1949년 공산당 정권을 중국 대륙에 수립하여 당 주석으로 추앙받던 그였지만 대약진운동의 실패, 몇 년 사이 수천만이 굶어죽은 대기근의 재앙으로 궁지에 몰렸었다. 중국 전역에서 청소년·청년층을 선동하여 옛 사상·문화·풍속·습관의 타파와 마오에 대한 무한한 충성을 앞장서서 실천하도록 한 것이 문화대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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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를 지지하는 문화대혁명 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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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시기의 인민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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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시기 봉건 타파를 이유로 파괴되는 불상들


문화대혁명에서 예술도 역할을 수행하도록 강요받았다. 1949년 훨씬 이전 중국 대륙의 내전 시기부터 마오의 공산주의 동지이자 부인이었던 장칭(江靑·강청)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들어와선 문화예술 분야 관리를 사실상 마오에게서 위임받아 특히 공연예술 분야에서 전권을 휘둘렀다.4) 장칭은 중국의 경극(京劇)·발레·교향악을 현대화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적 혁신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본심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봉건적 전통 타파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와 혁명 전사(戰士)가 주체인 예술을 수립하려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경극을 비롯하여 중국 전래의 예술을 일체 부정한 상태에서 경극·발레·교향악 분야에서 8편의 혁명적 모범작(경극 5편, 발레 2편, 교향악 1편)을 개발하였다. 이 8편을 양반시(樣板戱·양판희)라 불렀으며 추가로 10편이 더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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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시 발레 〈홍색낭자군〉


양반시 가운데 발레는 2편이었고 냉전시대에 같은 사회주의 진영이던 러시아의 도움으로 발레는 계급투쟁을 위한 예술로 수용되었다. 2편의 발레는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 붉은 여성 군대, 1964년 초연)과 〈백모녀〉(白毛女·백발의 처녀, 1965년 초연)로서 모두 1949년 이전 내전 시기에 소작료나 집안 빚을 갚기 위해 악덕 지주에게 넘겨진 가난한 농민 가정의 처녀들이 인민해방군(홍군)의 도움으로 악덕 지주를 물리치는 실화를 각색하였다. 〈홍색낭자군〉에서 처녀는 홍군에게 구출된 후 홍군의 지도자로 성장하여 혁명의 대의에 나서게 된다. 〈백모녀〉에서 처녀는 지주 집 하녀의 도움으로 산 속의 동굴로 피신한다. 절에서 동냥해서 생명을 부지하는 처녀는 불안 속에서 온갖 들짐승에 시달리는 사이 머리가 새어버린다. 홍군에 가담해서 일본군과 지주를 물리친 약혼녀가 하녀의 안내를 받아 처녀와 재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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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시 발레 〈백모녀〉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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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레의 저변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각에서 대중의 각성과 의식 변화에 초점을 맞춘 제작 의도가 강하게 깔렸고, 서구 고전발레의 움직임을 취하되 중국 경극의 움직임을 섞고 줄거리는 물론 소도구, 복색 등의 측면에서 고전발레의 금기사항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과단성을 보였다.5) 두 발레를 비롯하여 모든 양반시는 무대 공연은 물론 무대 실황을 편집한 영화를 중국 전역에 대대적으로 보급하였다. 말하자면 당시 중국 예술무대에는 8편의 양반시뿐이었을 정도였고6)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가해졌다. 뿐만 아니라 양반시의 배경 음악들은 라디오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들렸다. 그래서 소설 〈붉은 진달래〉의 작가는 밥 먹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들었고 심지어는 양반시의 노래들을 잠꼬대로 중얼거렸다고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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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색낭자군〉 50주년 기념 무대에 출연한 과거의 주역들(오른쪽 두번째 붉은옷이 대스타 슈칭화로 추정된다), 2014, 베이징 인민대회당


장칭은 중국 공연예술계 전체의 총괄 감독이자 수석 연출이었고, 심지어 오디션 계획까지 수립하였다. 마오의 라스트 댄서 리춘신이 발레 무용수로 뜻하지 않게 선발될 수 있었던 것도 장칭이 양반시 발레의 유망주를 찾아내기 위해 중국 오지에도 심사원을 파견해서 발레 오디션을 열었던 때문이다.7) 이처럼 양반시는 최고 지도자 1인 체제에서 실현된 개념이다. 특히 문화대혁명은 신정(神政) 체제를 기도하였다. 문화대혁명 때 붉은 책자로 제작된 마오 어록8)을 품에 안고 다니며 암송하고 그 내용대로 실천하기를 다짐하는 것은 당대 중국의 풍습 교양이었다. 양반시 또한 마오의 예술론을 반영한 결과이다. 엘리트 위주 예술관의 탈피, 젠더 평등, 외래 예술의 토착화와 전통 예술의 현대화 측면에서 양반시를 살펴볼 점이 없지는 않다. 설령 그럴지라도, 양반시는 1인 신정 체제의 ‘말씀’을 복제할 뿐 표현의 자유는 없었다. 1인 신정 체제에 복무하는 양반시 예술과 ‘시민’은 서로 모순된다. 지난 50여 년 〈홍색낭자군〉이 4000회 넘게 공연되는 대기록9)을 세운 것과 같은 양반시의 실적들은 반면교사로 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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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문 제목은 영화와 동일하나, 국내에선 《마오쩌둥의 마지막 댄서》(민음사, 2009)로 발간되었다.
2) 문화대혁명의 전반적 추이에 관해서는 졸고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 마오 시대의 야만’(http://www.koreadance.kr/index/webzine/index.html 춤웹진, 기획취재, 2016. 12.) 참조.
3) 모택동(毛澤東·毛??), 약칭 마오.
4) 장칭은 마오 사후의 정치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이미 문화대혁명 시기에 작당하였고, 마오 사후 일당과 함께 축출되어 사형 선고를 받아 복역하던 1991년에 자결하였다. 국정 농단의 대표적 사례이다.
5) 졸고 참조.
6) 리춘신의 학교에서도 레퍼토리로 〈홍색낭자군〉을 채택하였으나 〈백조의 호수〉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일체 금지되었다가 1978년 이후에나 가능하였다.
7) 리춘신이 선발되던 당시 중국과 특히 중국 오지에서 발레는 낯선 것이었다. 발레를 전혀 몰랐던 그는 당의 심사원들에게서 강제로 오디션(신체조건과 지구력을 따지는 오디션)을 당하고 장칭의 최종 결정에 따라 발레 연수생으로 입문하게 된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시기에 장칭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은 가난을 벗어나는 첩경으로 여겨졌으며, 리춘신이 오디션에서 합격하자 오지 마을은 이를 엄청난 경사로 받아들였다.
8) 〈마오주석어록(毛主席??)〉. 20세기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50억~65억 권 팔린 책이라 하며, 당시 중국에선 결혼식 예물로도 애용되었다. 유사한 사례로서, 마오 주석의 초상을 새긴 뱃지가 2만 가지 디자인으로 25억~50억 개 제작되었고, 1966~70년 사이에만 41억 점의 마오 초상화가 제작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 사례는 문화대혁명기 중국에서 마오의 신격화가 급격히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마오는 신처럼 어디서나 편재(遍在)하였다. 이런 점에서, 양반시를 관람하는 것이 마오 숭배 의식을 치르는 것과 동일하였다는 해석도 없지 않다.
9) 〈홍색낭자군〉의 주역 슈칭화는 엄청난 공연과 무대 실황을 생생하게 담은 영화에 힘입어 당대 중국의 대스타가 되었다.



[참고 자료]
· 영화 〈마오의 라스트 댄서〉 영상 자료 바로가기
· 양반시 경극 〈홍등(紅燈)의 전설〉 영상 자료 바로가기
· 양반시 발레 〈홍색낭자군〉 영상 자료 바로가기
· 양반시 발레 〈백모녀〉 영상 자료 바로가기




김채현 춤 비평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민음사),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사회평론)를 비롯 다수의 논문, 그리고 ≪우리 무용 100년≫(현암사) 등의 공저와 ≪춤≫(청년사), ≪미적 체험의 현상학≫(민음사)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춤 영상 문고를 개설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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