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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3.30 조회 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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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혼돈의 정반대입니다”

[춤인의 서재] <음악의 시학>,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고백

[춤인의 서재]



“예술은 혼돈의 정반대입니다”
<음악의 시학>,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고백

황보유미_칼럼니스트

줌아웃 에세이 황보유미 관련 사진

<음악의 시학>,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이세진 옮김, 민음사 ⓒ민음사



“멜로디는 잊고 리듬을 타라고. 차이코프스키 바그너, 슈트라우스는 다 잊어.
전에 들었던 음악은 머리속에서 지워버려.”1)




‘선율의 시대’에서 ‘리듬의 시대’로


1913년 5월 29일 저녁, 파리 샹젤리제극장. 지휘자 피에르 몽퇴(Pierre Monteux)는 오늘 밤 연주할 곡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던 연주자들을 다독이며 무대로 나섰다. 무대 위에서는 초연을 앞둔 공연으로 흥분해 있던 무용수들과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장 콕토(Jean Cocteau) 등 벨에포크(La Belle Epoque)를 대표하던 예술가들을 포함해 이제 막 입장한 관객들로 어수선했던 객석 분위기가 곧 가라앉고, 서주와 함께 공연이 시작됐다. 이날은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뤼스(Les Ballets Russes)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Le sacr줌아웃 에세이 예술인 김아영 관련 사진 du printemps)>을 초연하는 날이다. 그런데 연주와 공연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객석에서는 웅성거림이 시작됐다. 그리고 곧 그 웅성거림은 산발적인 외침으로 변하다가 결국 극장 안은 온갖 야유와 소란으로 가득차기에 이른다. 거기에 더해 디아길레프는 객석의 이 소동을 가라앉힌다고 무대 스태프에게 극장의 조명을 껐다, 켰다를 반복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오히려 소란을 키울 뿐이었다.

관객들은 이날 밤, 왜 야유를 보냈던 것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고대 슬라브 부족의 제의를 그린 곡으로 니진스키 안무에 디아길레프의 발레뤼스가 1911년, 초연된 작품이다. 3년 전부터 이미 발레뤼스를 위해 <불새(l’Oiseau de feu)>(1910), <페트루슈카(Petrushka)>(1911) 등의 발레곡을 썼던 스트라빈스키는 다시 한 번 <봄의 제전(Le sacr줌아웃 에세이 예술인 김아영 관련 사진 du printemps)>(1913)으로 러시아 발레단과 파리에 불던 새로운 움직임의 주역이 되었다. 긍정적 의미로든, 부정적 의미로든. 이 곡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경력 초기의 원시주의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특히 기존의 박자 관념을 완전히 무너뜨린 변박자와 강렬한 리듬으로 당시 관객들에게 ‘낯섦’을 선사했다. 그래서 이후로도 스트라빈스키의 이 음악 앞에는 ‘혁명적’, ‘혁신적’이라는 수식어가 자동적으로 따라붙는 ‘급진주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고백, <음악의 시학>


줌아웃 에세이 황보유미 관련 사진

피나바우쉬 ⓒRex Features, 민음사 제공


오래도록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오독했었다. 마치 1백여 년 전의 샹젤리제극장 안의 관객들처럼 ‘대체 어떻게 들어야 하는 거야?’가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질문이었다. 아니, 솔직히 음악은 잘 들렸다. 단지 어떤 ‘질서’로 이것을 파악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을 뿐이지. 당시 샹젤리제극장 안의 관객들도 이렇게 당황을 했던 것일까. 필자가 길들여져 있던 미학적 질서, 예를 들면, 베토벤이나 차이코프스키를 듣는 고전적 어법의 입장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새로운 시도’는 뭐라고 미학적 규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전의 음악이 화음을 연속한 음악적 시간의 흐름 즉, ‘화성(和聲)’이 중심이었다면 젊은 스트라빈스키의 것은 중심축이 ‘리듬’으로 이동을 해 마치, 과거와 결별한 새로운 시도처럼 수용자도 기존 질서의 틀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던 그야말로 ‘새로운 무엇’이었다. 그런데 이런 혁신을 시도했던 작곡가가 26년 뒤, 자신의 음악관에 대한 강의를 하며, 창작에서의 전통적 ‘질서’와 ‘규율’이라는 금욕적인 규율에 대해서 강조를 한다. 어떻게 된 일인가? <봄의 제전>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는 수식어를 창작 1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듣고 있다. 이 때, ‘혁명적’이라는 단어는 두 말 할 것 없이 ‘기존의 질서를 탈피 혹은 거부’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정작 작곡가 자신은 “철저히 전통에 따른 음악이었다”고 고백을 하다니!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전통은 창조의 연속성을 보장해주며, 우리는 새것을 만들기 위해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친절히 덧붙인다.

러시아혁명으로 조국을 떠나 유럽을 떠돌던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 뉴욕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 시학 강좌의 연단에 선다. 영국의 시인 T.S.엘리엇도 연사로 선 바 있는 ‘찰스 엘리엇 노튼 시학 강좌’에 작곡가로서는 스트라빈스키가 처음이었다. ‘여섯 개의 강의 형태의 음악의 시학’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이후 <음악의 시학(Poetics of Music)>이라는 책으로 묶어, 1942년 하버드대출판부에서 출간한다. 이 여섯 번의 강의에서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미학적 통찰에 근거한 음악적 원칙, 창작 행위, 음악의 요소들, 음악적 현상, 구성, 유형, 연주 그리고 작곡가의 조국인 러시아음악에 대한 지론을 펼친다. 이 때 강의 첫머리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먼저, <봄의 제전> 발표 당시 그가 들었던 ‘전복적’, ‘혁명적’이라는 지적이 잘못됐음을 지적한다. 혁명은 ‘균형의 파괴’, ‘일시적 혼돈’을 뜻하므로 본질상 구성적인 예술의 속성과는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만약 자신의 음악이 기존과 다른 새로운 어법, 독창적이었다고 한다면 다른 더 적절한 단어를 사용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쇄신’과 ‘전통’의 동시적 과정을 통한 살아 있는 변증법


줌아웃 에세이 황보유미 관련 사진

ⓒ민음사


어떤 장르의 예술가에게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고통과 동시에 그 반대만큼의 희열의 통로인 ‘창작 과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새로움을 연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창조적 직관의 통찰’이 필요한 행위이지만 “이 창작과정의 내적 전개를 관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음악 애호가들은 작곡가들의 상상력이 어떤 정서적 동요, 일반적으로 ‘영감’이라고 부르는 바에서 촉발된다고 생각하지만 스트라빈스키는 ‘영감’은 이차적으로 나타날 뿐 창작의 선결조건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또한 “‘예술가’라는 단어가 그것의 행위자에게 어떤, 지적 위엄, 순수한 정신의 소유자로 통하는 위엄”을 동시에 주는데 이것은 결코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의 조건과 양립할 수 없다고 밝힌다. 즉, 스트라빈스키에게 있어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행위는 장인이 철을 주무르고 빚어내는 행위 사이에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 행위의 구분 혹은 위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차원의 노력과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식인(예술인)’으로서 가져야 할 소임은 머릿속으로 고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있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이 실행의 단계에서 창작인의 역할은 “받아들인 요소들을 체로 거르는 것”이며. “예술은 통제되고, 제한되고, 수고가 가해질수록 더욱더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이 시학 강의는 음악의 원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 음악적 통찰은 예술 일반,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행위에도 아주 중요한 규칙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작품의 명확한 구성적 배치와 결정 작용에서 중요한 것이 물론, 예술가의 상상력을 가동시키고, 양분이 되는 모든 디오니소스적 요소들에 취하는 것이지만 그 전에 일단 그것들을 “제대로 길들이는 것”, 최종적으로는 “그 요소들은 법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언급한 부분이 그의 음악이 청자들에게는 ‘혁명적’이지만 작곡가 스스로는 ‘혁명적이기를 거부’하며, ‘전통’의 연장선상이라고 했던 부분과 맥을 같이 한다고 정리해 본다. “‘쇄신’은 ‘전통’과 함께 갈 때에만 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변증법은 ‘쇄신’과 ‘전통’이 동시적 과정을 통하여 서로를 계발하고, 견고히 다져 주는 데 있습니다”.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예술분야가 많은 분야와의 조우, 더군다나 ‘기술’이라는 가장 큰 산, 혹은 바다를 맞닥뜨리고 있는 때에 스트라빈스키의 미학적 통찰은 우리가 다시금 곱씹어야 할 우리의 ‘전통’이자 예술 창작 일반에 대한 ‘시학(詩學)’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축을 옮긴 사람은 ‘혁명적’이다.



1) 얀 쿠넹 감독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Coco Chanel & Igor Stravinsky)>(2009) 중
2) 하버드대학교 미술대학 찰스 엘리엇 노튼(Charles Eliot Norton) 교수의 이름을 따서 1925년부터 개설된 ‘넓은 의미의 시학 강좌’. T.S.엘리엇,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에르빈 파노프스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레오나드 번스타인, 윌리엄 켄트리지 등의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강의를 했고, 강의록은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출간되었다.




황보유미_칼럼니스트 월간 《객석》 파리 통신원을 거쳐 국립발레단에서 근무 후 현재 (재)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공연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뮤직뮤지엄 스트라디움(STRADEUM)의 <황보유미의 벨에포크> 강좌에서 뮤직큐레이션을 하고 있다.


황보유미_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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