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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1.26 조회 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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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춤· 시민·표현: 어서 돌아와 함께 춤추자고요.

[기획연재]춤·시민·표현



<춤:in>에서는 시대 흐름을 주시하여 기존의 춤 담론을 주도해온 개인적 창조의 패러다임을 넓혀서 2017년 한 해 동안 시민을 위한 표현이 돋보이는 춤 표현 활동을 연재한다. <춤:in>은 춤과 정치·권력·인권 사이의 담론을 발굴하여 ‘시민 사회 및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시민과 공생하는 춤 표현의 가치를 적극 사고하는 계기를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본란에서는 시대·문명·사회와 춤의 선순환적 조화를 성취한 특이 사례들이 함께 조명된다.


어서 돌아와 함께 춤추자고요
- 민주 정부를 앞당긴 쿠에카솔라

김채현_춤비평가

“아버진 정당인이셨는데 1976년에 사라지셨어요. 8달의 고문 끝에 돌아가셨다더군요. 딸로서, 아빠와 함께 추듯이 춤춥니다. 지금 안 계시니 슬프지요.”(칠레의 어느 밴드 기타리스트, ABC방송 인터뷰, 2007년)

“직업이 석공(石工)이던 남편이 1976년 39살에 경찰에 연행되고 종적을 감췄다. 칠레의 이 83세 할머니는 남편의 실종에 항의하기 위해 40년 지난 지금도 무대에 오른다.”(AP통신 보도, 2016년)

실종된 사람을 기억하며 추는 이 칠레의 춤을 쿠에카솔라(cueca sola)라 한다. 쌍쌍춤(커플 댄스) 쿠에카를 홀로 춘다는 뜻이다. 쿠에카솔라는 함께 출 사람이 실종되어 혼자 출 수밖에 없는 춤이고, 함께 출 사람이 어서 돌아와 같이 추자는 춤이다.



줌아웃 에세이 춤비평가 김채현 관련 사진

쿠에카솔라


쿠에카는 원래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에서 수탉과 암탉의 구애에 빗대 추는 쌍쌍춤으로 전래되었다. 발랄하며 빠른 기타 선율과 노래를 반주로 손수건을 휘날리며 남성이 여성의 주변을 맴돌면서 내빼는 여성에게 사랑을 구하는 기쁨을 2분가량 펼치는 민속춤이다. 오늘날에도 칠레에서 청춘 남녀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의 축하연과 경축일의 쌍쌍춤으로 인기가 높고 관광 상품으로도 흔하다. 그런데 1978년 이 쿠에카를 칠레의 ‘실종자가족협의회’가 공공극장에서 ‘홀로 추는 쿠에카’로 처음 시도했고, 이후 쿠에카솔라는 노래와 함께 칠레 민주주의 회복 과정에서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쿠에카솔라는 쿠에카와 유사하게 빠른 선율과 노래 반주에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춘다. 반면에 쿠에카솔라는 남성의 증명사진을 목걸이로 품에 달고 쌍쌍춤의 일반적 사교 공간을 넘어 대로의 길거리와 광장, 심지어 대형 스타디움에서 여성이 홀로 펼치면서 쿠에카와는 전혀 다른 정서와 의미를 전달한다.

검정 계통 정장 차림의 여성 품에 매달린 증명사진의 주인은 춤추는 여성의 남편, 아들, 아버지, 연인, 또는 형제자매 들이다. 칠레의 피노체트 군부 독재 시기에 실종된 사람들. 그런 상대방과의 쌍쌍춤을 여성은 상상으로 추면서 그들의 생사를 모르는 처연함, 생사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는 사명감, 어서 집에 돌아오라는 간절한 염원, 그리고 재회하는 꿈을 근 40년 동안 표현해왔다. 이러한 처연함과 사명감, 염원, 꿈처럼 쿠에카솔라의 정동(情動)은 상당히 복합적이다.



줌아웃 에세이 춤비평가 김채현 관련 사진

1950년대의 쿠에카


실종자의 귀환을 기원하는 춤이 수십 년간 끊이지 않고 공감대 속에서 추어진 사실은 실종자 문제가 말할 나위 없이 칠레에서 엄청난 사회 문제였음을 나타낸다. 당시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 6나라의 군사정권 정보기관 책임자들이 1975년부터 반정부 활동을 탄압하는 콘도르 작전을 연합해서 벌일 정도로 남미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인권은 대대적인 억압을 받았다.

칠레는 1960년대까지 민선 대통령을 뽑는 민주 체제를 유지해왔고 1970년에는 남미 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이 6년 임기로 집권해서 빈부 격차 해소 등 사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하지만, 동서 냉전 시대에 남미에서도 아옌데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을 경계하던 미국이 배후에서 칠레의 주요 수출 품목인 구리의 국제 시세를 폭락시키는 등으로 아옌데 정권을 교란시킨 것은 세상이 아는 일이며 덩달아 물가가 앙등하고 칠레는 공황에 빠져버린다.



줌아웃 에세이 춤비평가 김채현 관련 사진



미국과 국내 수구 자본을 등에 업고 육군참모총장 피노체트 주동으로 1973년 쿠데타를 획책해서 대통령궁에 공습을 감행하여 군사 정권을 세웠다. 1990년까지 17년 동안 칠레를 철권통치한 피노체트 정권에서 무려 4만명이 학살(3천 명)·투옥·고문당했고 1200명이 실종되었다.

피노체트 정권은 쿠데타를 일으킨 1주일 만에 축구장에 예술인, 활동가 등 1만 명의 사람들을 가둬 고문과 총살을 감행하였다. 군사 정권이 세워진 그 다음 해에 실종자가족협의회가 결성될 정도로 집권 초기부터 탄압은 극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야간 통금이 강제되면서 댄스홀이 전면 폐쇄되고 도시에서 쿠에카는 절친들 사이에서나 은밀히 갖는 행사가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이 시민들 속에서 쿠에카솔라로 저항을 표현한 것은 당연하면서도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1978년 처음 추어졌을 때 그것은 피노체트 군사 정권에서 있은 최초의 대중 집회이기도 하였다. 계층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애호하던 민속 사교춤에 연원을 두었던 만큼 쿠에카솔라에 대한 호응은 엄청났다. 시민들은 쿠에카솔라에 감응함으로써 군사 독재에 저항하였다.

그 와중에 어떤 기현상도 일어나는데, 피노체트 정권은 1979년에 쿠에카를 칠레 국민춤으로 선포하였다. 시민들의 쿠에카솔라에 도리어 군사 정권이 쿠에카로 저항(?)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군사 정권이 내세운 쿠에카는 정통 쿠에카도 아니었던 데에다 멕시코 목장 풍의 의상에다 주인이 하녀를 유혹하는 식의 내용도 있었다 한다.

군사 정권은 정권 차원의 애국심을 노리며 자신들의 쿠에카를 공교육에서 가르치게 하고 대대적인 경연대회를 여는 등 전국적으로 보급을 독촉했다. 그런 결과 쿠에카는 칠레의 정체성을 왜곡하고 억압을 상징하는 춤으로 변질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10여 년간 사람들은 쿠에카를 멍청하고 내용도 빈곤한 쿠에카라 혐오하였다.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1990년대 중반부터 정통 쿠에카를 되찾으려는 춤과 노래 운동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줌아웃 에세이 춤비평가 김채현 관련 사진

칠레 국회의사당 앞에서 몸에 체인을 두르고 시위하는 여성들, 1978년


쿠에카솔라는 철권통치에 숨죽여 지내던 사회에서 여성들이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선도한 저항의 몸짓이었다. 그 이전까지 칠레 여성들은 전통적인 가정적 역할에 국한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사람을 앗아가는 잔혹한 그 시기에 남은 여성들은 아내로서, 엄마로서, 딸로서, 언니 동생으로서의 전통적 역할을 실종자 찾기를 계기로 사회적 역할로 승화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여성들의 본능적이고도 정당한 움직임을 독재 정권이 무작정 억누르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쿠에카솔라에서 여성들은 압제 정치의 가면을 벗겨낸 동시에 자기들에게 주어지지 않던 공공의 공간을 시민들 앞에 여성들의 언어로 표현해내었다. 결과적으로, 권위주의적인 군사 정권이 여성들로 하여금 공공장소에서 도리어 여성적 이미지들을 안출해내도록 유도하였다. 덧붙여, 30년 전부터 쿠에카솔라에 호응하여 Joan Baez, Sting, Peter Gabriel, Sinead O'Connor, Holly Near 등 가수들은 노래로 동참하는 한편 칠레 군사정권의 잔혹상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렸다.



[참고 자료]
· 피노체트 정권이 무너진 다음 집권한 파트리시오 아일윈 민주 정부 대통령이 취임식 다음날 참석한 국립스타디움에서의 쿠에카솔라 바로가기
· Sting과 Peter Gabriel의 쿠에카솔라 협연 바로가기
· 칠레의 철권통치와 실종자의 역사 소개 자료 바로가기




김채현_춤비평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민음사)를 비롯 다수의 논문, 그리고 『우리 무용 100년』(현암사) 등의 공저와 『춤』(청년사), 『미적 체험의 현상학』(민음사)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춤 영상 문고를 개설할 예정이다.


김채현_춤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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