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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무용센터

줌아웃 - 에세이

국내외 무용 현장에 관한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관점을 소개합니다.

2016.10.27 조회 3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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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 쉬는 알고리즘 -

파리 팔레 드 도쿄의 티노 세갈

미카 하야시 에베슨_음악가·저술가

나는 2012년 8월 초부터 티노 세갈(Tino Sehgal)의 <이런 모임 These associations>에 참여하게 되었다. 작품의 관계자를 몇 알던 차에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 제작한 그 작품을 직접 가서 보기로 했는데, 전시는 이미 이 주 전에 시작한 상태였다. 여름 햇살이 눈부신 오후, 미술관에 도착한 나는 어두운 터바인 홀(Turbine Hall)에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어둑한 환경에 익숙해지자, 거대한 미술관 안에 끝도 없이 이어지며 배회하던 관람객들이 내는 소리로 이루어진 벽 너머, 내가 실제로는 매우 섬세한 노랫소리로 이루어진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상호작용 하는 것으로서, 그 작품이 실제로 어디서 시작하는지,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었다. 전시장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은 마치 정교한 설치물 안에 있는 스피커 스테이션(speaker stations)같았다. 나는 인간의 목소리에 의해 신체와 콘크리트가 하나 된 변이된 풍경 속으로 쉽게 이동하게 됐는데, 목소리는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그 공간을 계속 걸어 다녔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초현실적이었고 마술적이었는데, 결국 그 호기심에 이끌려 내가 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작품 안으로 들어갔다.



줌아웃 에세이 음악가·저술가 미카 하야시 에베슨 관련 사진

Sketch of These associations by Doris Schlpfer, Tate Modern 2012, Courtesy of the artist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작품과 하나가 되어 같이 참여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는 걸 단언할 수 있다. 관람객들은 자주 공식 퍼포머들에 가까이 다가가서 따라 걷거나, 움직이고, 뛰고, 노래하고, 서고, 앉았는데, 이는 나 스스로도 본능적으로 경험했던 어떤 충동에 따른 것이었다. 내가 세갈의 작품과 처음으로 조우했던 잊지 못 할 경험을 하고 나서 두 달 반이 지났는데, 이 시간이 이번에 파리 팔레 드 도쿄에서 다시 전시될 <이런 모임>로부터 새로운 실마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미술관측은 티노 세갈에게 미술관 공간 전체를 사용할 수 있는 전권(carte blanche)을 부여한 바 있는데, 이번 전시는 그러한 전권 하에 열리는 전시의 일환으로, 전시기간은 2016년 10월 12일부터 12월 18일까지이다.

팔레 드 도쿄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세갈이 초대한 다수의 아티스트들이 내놓은 작품들도 선보일 예정인데, 그러한 사람들로는 다니엘 뷔랭(Daniel Buren), 제임스 콜먼(James Coleman),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이사벨 루이스(Isabel Lewis), 그리고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가 있다. 방문객들이 정확히 얼마나 많은 “티노 세갈”을 보게 될 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알려진 바가 없는 듯하지만, 최소한 다섯 개의 작품이 세느 강 변에 위치한 팔레 드 도쿄라는 현대 미술 관련 시설의 각기 다른 공간들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즉, <이런 진보 This progress>와 <이런 모임 These associations>, <이런 변화 This variation>, <안 리와 마르셀 Ann Lee and Marcel>, 그리고 <저 물건의 이런 목적 This objective of that object>.

세갈은 이런 전시물들을 “구축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s)”이라고 부르길 좋아하는데, 그는 이를 통해 관람객들로부터 각기 다른 수많은 반응들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언제 어느 때나 이에 대한 반응들은 다양한데, 그것들은 무심함과 지루함, 신경질적인 킥킥거림(nervous giggles), 재미, 어리둥절함, 호기심, 흥분, 자발적 참여, 황홀감(enchantment), 사색(contemplation), 기쁨, 그리고 변화 등이다… 나는 세갈의 작품에서 한 사람의 능동적인 “통역사(interpreter)”로서-나는 어디선가 세갈이 퍼포머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 대신 통역사라는 단어를 더 좋아한다고 언급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그의 사상을 구체화하는데 있어 언제든 교체 가능한 하나의 활성제(active agent) 역할을 했다. 그리고 통역사의 명단이 적혀 있는 커다란 순번표(rota)로 인해 나의 정체성은 몰개성화되고, 나는 해당 미술관의 벽 안에 존재하는 어떤 예술 작품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팔레 드 도쿄에 전시될 각기 다른 작품들은 다양한 수준의 주도권(initiative)을 제공할 계획인데, 관람객들은 그들 앞에 제시되는 상황들을 실제로 경험하는데 있어 상호작용하거나 참여한다는 점에서 그들 스스로 그러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어떤 작품에서는 그런 상호작용이 일부 있어나 전혀 없을 수도 있고, 다른 작품에서는 전적으로 구조화된 대화(structured conversation)에 의존할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작품에서는 그러한 상호작용이 직접적인 질문이나 진솔한 대화(intimate story)라는 형식으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리고 일부 다른 작품에서는 관람객들 스스로가 주도권을 발휘해서 그 작품에 변화를 촉발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다수의 구축된 상황이 제시되는데, 이를 통해 구경꾼(spectator)들은 구경꾼 이상의 존재가 되게끔 부드럽게 안내되는데, 그 과정에서 미술관에 남아 있는 미술과 그곳을 오고 가는 방문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적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통역사 중 하나로서, 내 신체와 공간 사이에는 끊임없는 토론이 발생한다. 즉, 내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과 나 자신과 다른 통역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 건축술을 이용해 조성된 공간, 그리고 대중들이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공간들 사이에서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공간들은 <이런 모임>이라는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 유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 안에서 벌어지는 각종 운동들이 어떤 안무를 구성하지는 않지만, 관람객과 미술관 건물, 그리고 통역사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들의 관계는 그렇다. 내가 관람객에게 말을 걸기 위해 그들 가운데 한 명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말을 걸려고 선택한 한 개인 만큼이나 나 자신과도 충돌하게 되는데, 이는 내가 그 사람들 곁을 떠나 다시금 나 자신의 일부를 나의 신체로 되돌릴 때 발생한다.



줌아웃 에세이 음악가·저술가 미카 하야시 에베슨 관련 사진

Sketch of These associations by Doris Schlpfer, Tate Modern 2012, Courtesy of the artist


그런데 미술관 경비원들이 불어로 우리를 “앙떼흐브넝(intervenants)”으로 식별한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인데, 이 단어의 뜻을 대강 풀이하자면, 참여자나 조력[협력]자, 혹은 발언자, 기여자, 그리고 간섭자란 뜻이 되어서다. 그래서 매번 “당신은 앙떼흐브넝입니까?(vous tes intervenant?)”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늘 “네, 그래요!(yes!)”라고 답한다. 나는 매일 팔레 드 도쿄로 출근해서 그곳의 공간과 관람객, 그리고 나와 같이 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앙상블 내에서 개입한다. 이처럼 때를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다차원적인 개입에 대응하기 위해 관람객들은 어쩔 수 없이 이에 대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관람객들 가운데 대다수는 세갈의 작품에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애매함으로 인해 관람객들은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기도 하고, 불쾌감을 느끼기도 하며, 무언가 깨달을 수도 있고, 만족하거나 불만족스러움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둘러보는 여행객들이 우리를 향해 플래시몹을 하는 거냐고 의아해 하는 목소리로 크게 묻는 장면을 보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전시 장소에는 터바인 홀에서 어떤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는 표지판이나 암시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는 예술 작품으로 간주되는 가는 선을 밟아야 했다. 사람들은 현대 미술을 볼 기대에 차서 팔레 드 도쿄를 찾는다. 하지만, 세갈과 그의 동료들이 바라던 대로, 그들은 어떻든 아무 것도 기록하지 못한 채, 무언가를 목격하고 자리를 뜨게 된다. 그것은 어떤 경험처럼 수명이 짧은 한시적인(ephemeral) 것으로만 존재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임>를 통해 관람객들은 어떤 특정한 흥분을 맞보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전통적인 미술관이라는 맥락에서였다면 보통 금지된 특정한 활동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활동들로는 낮선 이에게 말 걸기나 크게 노래 부르기, 주변을 뛰어 다니기 그리고 서로 게임을 하면서 노는 것 등이 포함된다. 사실 이러한 활동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대부분 재미없는 평범한 활동들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지만, 관람객들은 우리의 집단적인 운동을 지배하려는 조짐을 보여주는 구조를 끊임없이 해독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집단이 고수하려고 하는 변이중인 구조적 징후(structural indications)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설명하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관람객들이 자신들의 물리적 존재로 인해 그 작품이 얼마만한 영향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깨닫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 공간을 걷기만 해도, 이 같이 펼쳐지고 있는 구축된 상황은 그들의 존재를 흡수하고 그에 따라 적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통역사가 관람객들 가운데 한 명에게 말을 걸 때, 이를 듣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주저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전해지는 이런 내러티브들을 믿어야 할까? 이 내러티브들은 사실일까? 우리 모두 진정성이 있는 걸까? 우리같이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러한 상호작용에서 이들이 천사처럼 고백하게끔 하는 어떤 기대치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진실일 필요까지 있는 걸까? 구경꾼들이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초점을 두면서, 나 역시도 그들에게 초점을 두게 된다. 그러다보니 그저 얼굴 표정 하나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도 내가 가진 갖가지 생각들을 전달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줌아웃 에세이 음악가·저술가 미카 하야시 에베슨 관련 사진

Sketch of These associations by Doris Schlpfer, Tate Modern 2012, Courtesy of the artist


하나의 예술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토론이 정점에 이를 때 혼란과 미가 만날 경우, 놀라운 순간들이 발생한다. 이따금 이러한 토론은 그 작품 그 자체로부터 유기적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예컨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여행객 한 쌍이 내가 다가와, “실례합니다만, 질문 좀 해도 될까요? 이 모든 건 다 뭐죠? 지금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저희가 마지막으로 여길 들렀을 때는 벽에 그림들이 걸려있었는데요…댁은…?”라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난 이들의 말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때 내가 미소를 지었던 것은, 그러한 질문들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궁리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었다. 사람들로 꽉 찬 팔레 드 도쿄의 중앙 홀 안에서 이들 두 명의 젊은이들은 그 장소에 예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줄 만한 무언가를 식별하고자 그것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나는 그냥 이것은 티노 세갈이 만든 <이런 모임>이라는 작품이에요, 라고 웅얼거리기 보다는, 나와 여러분들은 이미 그 안에 있어요, 라고 말을 했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싶었다...

터바인 홀에서 전시된 이 작품 공연이 끝나갈 때쯤, <이런 모임>에 참여하는 경험을 하면서 내게 계속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측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그 작품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대단히 민주적이었다는 점이다. 즉, 통역사와 관람객, 그리고 해당 건축물을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갓난아이부터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인들, 그리고 마룻바닥에 나 있는 갈라진 틈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으며 그 작품의 필수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또, 나는 이름도 모를 뿐 만 아니라, 이들 가운데 말조차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다수인 일단의 사람들에게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세갈이 만들어 낸 구축된 상황의 매 순간마다 내가 지닌 에너지와 의도를 가지고 필요한 동작을 동시에 따라하고 협력할 수 있었다. 통역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가 가진 개념들의 강력한 매개체들이지만, 불가피하게 하나의 예술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같이 협력하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떤 매개물을 이용한 예술 작품이 이런 식으로 구축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것만으로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모임>에 매료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그 작품을 다시금 경험하기 위해 날마다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더 행복하다고 느꼈던 적이 없다. 내가 여기저기서 이해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세갈이 제공한 경험에는 정말이지 시작도, 끝도 없다. 그 작품에서는 명상적인 것이 반복되면서 어떤 소우주가 상황들을 탄생시키는데, 그 과정에서 운동과 예술을 삶 그 자체가 지닌 한정할 수 없는 확장성(expansiveness)으로 다시 돌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무한하며 일시적으로 자족적인 어떤 기관이 되는데, 이것은 그것을 물리적인 면과 청각적인 면, 양 방면에서 각기 다른 소통패턴으로 인코딩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작위적 요소가 사용되는데, 이를 통해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 각 자는 각기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출연자(enactor)와 구경꾼 양자에게 일정한 수의 예측 가능한 상황들을 통계적으로 만들어내고 통제하리라 상정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살아서 숨 쉬는 알고리즘을 지닌 가상 세계 시뮬레이터(virtual reality simulator)일 수 있을까?




미카 하야시 에베슨(Mika Hayashi Ebbesen)_음악가·저술가 미카 하야시 에베슨은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르웨이 계 일본인 예술가이며, 음악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운드 관련 작업에서는 미카쯔(Mikatsiu)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다.


A Living Breathing Algorithm - Tino Sehgal at Palais de Tokyo

Mika Hayashi Ebbesen_artist

My experience as a participant in Tino Sehgal’s These associations started in early August 2012. I knew some people involved in the piece so I decided to go check out the commissioned work at the Tate Modern in London which had started two weeks prior. When I arrived, I stumbled into a darkened Turbine Hall on a sunny summer afternoon. Once I had adjusted myself to the dim surroundings, I found that beyond the sound wall generated by the never ending stream of tourists milling around the immense building, I was in fact walking into a soundscape of very delicate singing. There was no real beginning to my interaction with the piece, and a precise end did not emerge either. Figures were scattered all over the space like speaker stations in an elaborate installation. I was simply transported into a mutated landscape built of bodies and concrete unified by the human voice that bounced around and filled the gaps between everything I could see. I kept walking through the space. I did not want it to stop. It was surreal, it was magical, and ultimately my curiosity urged me to get involved even though I had no idea what I was getting myself into.

In retrospect, I can attest to the fact that I am certainly not the only person to feel this urge to integrate and participate. So often members of the public come close to the official performers and walk along, move along, run along, sing along, stand along, and sit along with an urgency I viscerally remember experiencing myself. The two and a half months that followed my memorable first encounter with Sehgal’s work will hopefully help me to shed some light on the re-staging of These associations at Palais de Tokyo in Paris, as part of a museum wide carte blanche offered to Tino Sehgal from October 12th until December 18th, 2016.

This exhibition at Palais de Tokyo also presents contributions from a number of artists invited by Sehgal: Daniel Buren, James Coleman, Felix Gonzalez-Torres, Pierre Huyghe, Isabel Lewis, and Philippe Parreno. Although visitors seem to be left relatively clueless about exactly how much “Tino Sehgal” they are going to get to see, there are at least five pieces occupying different spaces of this contemporary art institution located along the Seine river: This progress, These associations, This variation, Ann Lee and Marcel, and This objective of that object.

The “constructed situations” - as Sehgal likes to call them - elicit a host of different reactions from the public. At any moment it varies from indifference, boredom, nervous giggles, amusement, bewilderment, curiosity, excitement, voluntary participation, enchantment, contemplation, joy, and transformation… As an active “interpreter” of Sehgal’s work - I read somewhere that Sehgal does not like the word performer and prefers interpreter - I become an interchangeable active agent of his ideas. The large rota of interpreters depersonalises my identity and I materialise as a small part of an art work that exists within the museum walls.

At Palais de Tokyo, different pieces offer various levels of initiative to be taken by the public themselves in terms of interacting or participating in the actual experience of the situation(s) presented before them. In one piece there may be some or no interaction, another piece may be based entirely on a structured conversation, in another piece the interaction may present itself in the form of a direct question or an intimate story, and some require an initiative from the public to trigger a change in the piece. This exhibition offers an array of constructed situations that gently usher the spectator to become more than a spectator, breaking the spatial boundaries between the art that remains in the museum and the visitors who come and go.

As an interpreter there is a continual discussion between my body and space. The space that I occupy, the space between myself and other interpreters, the space created by architecture, the space temporarily inhabited by the public: all of these spaces constantly play with each other in These associations. The movements within the piece do not constitute a choreography but a relationship of spaces between the public, the building, and the interpreters. Every time I decide to approach a member of the public to speak to them, I am forced to confront myself as much as the individual I choose to speak to, as I leave the group and bring a part of myself back into my body.

It is interesting that in French, the security guards identify us as “intervenants” which loosely translates as participant, facilitator, speaker, contributor, or intervenor. Each time I am asked vous tes intervenant? I say yes! I commute each day to Palais de Tokyo to intervene in the space, to intervene on the public, to intervene within the hired ensemble. In response to this multidimensional intervention occurring at all times, the public is forced to make decisions on how to react. A large proportion of the public audience appears to be unprepared for Sehgal’s work. The ambiguities lead them to ask many questions, feel offended or enlightened, unsatisfied or satisfied. At the Tate Modern, it was not uncommon for tourists to wonder out loud whether we were a flash mob. As there were no signs nor indications that a piece was happening in the Turbine Hall, we had to tread the fine line of even being understood as a work of art. At Palais de Tokyo, the crowd comes expecting to see contemporary art. They leave having witnessed something which Sehgal and his team hope that they have not documented in anyway. It is supposed to remain ephemeral like an experience.

These associations provides a certain excitement for the public, as we are doing certain activities normally forbidden in a traditional museum context like talking to strangers, singing loudly, running around, and playing games with each other. Despite the fact that none of these activities exceed the realms of most pedestrian actions, the public try relentlessly to decode the structures that show signs of governing our collective movements. However, it is impossible to try to explain the range of mutating structural indications the collective adheres to. I wonder if the public realise how much their physical presence affects the piece? By simply walking through the space, the constructed situation that is being played out absorbs their presence and adjusts accordingly.

When any interpreter speaks to a member of the public, there is this hesitation for the listener: should they believe the narrative passed on to them? Is it true? Are we being sincere? Does the fact that we dress as ourselves render an expectation for a confessional angle to the interaction? Ultimately, does it even need to be true? As the spectators focus in on the words coming out of my mouth, I focus on them, and just one facial expression may change the way I deliver my bundle of thoughts.

There is a wonderful moment that occurs when confusion and beauty meet at the acme of a discussion about what constitutes a piece of art work. Often this discussion is born organically from the work itself. Just a few days ago, a troubled pair of tourists approached me and said “Excuse me, can we ask you a question? What is this? What are you doing? Last time we were here, there were paintings on the wall… Are you…?” to which I smiled. I smiled mostly to buy myself some time to decide how I was going to deal with the questions. Within the crowded main hall of Palais de Tokyo, these two young humans were looking to identify something that would indicate the existence of art. I wish I had just said to them I am and you are in it, instead of mumbling this is These associations by Tino Sehgal…

At the end of the Turbine Hall commission, the aspect of my experience participating in These associations that kept resonating with me the most was how democratic the piece is for all its participants; the interpreters, the public, and the architecture included. Everyone from a baby to an elderly in a wheelchair to a crack in the floor can interact and be an integral component of the piece. I also felt deeply connected to a group of people whose names I did not know, most of whom I had never even spoken to, although I was able synchronise and collaborate through energy and intention at every moment of the constructed situation Sehgal had made. Every interpreter is a powerful carrier of his concepts, yet inevitably just one of many operating together to create a work of art. I had never fathomed that an art work of any medium could be structured in this way, and for that alone, I will be eternally fascinated with These associations.

Nothing makes me happier than to see people return day after day to experience the piece again. From what I have gathered, there is truly no real beginning nor end to a Sehgal experience. Within the meditative repetition, a microcosm gives birth to situations, placing movement and art back into the undefinable expansiveness of life itself. It becomes a potentially infinite temporally dynamic selfcontained machine that has encoded into it different communication patterns, both physical and auditive, with a random factor which allows for every visitor to have a different experience while simultaneously assumed to statistically generate and control a certain predictable number of situations for both enactor and spectator. Could it be the ultimate virtual reality simulator with a living breathing algorithm?




Mika Hayashi Ebbesen_artist Mika Hayashi Ebbesen is a London based Norwegian-Japanese artist, musician & writer. She uses the pseudonym Mikatsiu for all sound related work.


미카 하야시 에베슨_음악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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