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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9.07 조회 5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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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그리고 춤들
<더스크> 팀의 서로서로 인터뷰

글, 정리 - 손옥주 (공연학자)





인터뷰를 위해 다시 모인 <더스크> 팀원들 ⓒ양동민

함께 모인 사람들:
이양희(움직임), 류한길(사운드), 노명준(조명), 손옥주(보는자), 김재범(사진), 안재영(비디오 편집), 배소영(비디오 오퍼레이터), 전효경(제작매니지먼트), 정지영(제작매니지먼트), 이경수(북 디자이너)
모임 일시 및 장소:
2018년 8월 23일 저녁 7시, 한남동 빠르크(Parc)

조(序)
8시간 동안 이어지는 퍼포먼스라고 했다. 그리고 거대한 갤러리에서 진행될 예정이라고도 했다. <더스크>의 섭외 요청을 위해 걸려온 안무가 이양희의 전화를 받던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8시간이라는 시간의 아득한 축 하나와 갤러리라는 공간의 거대한 축 하나가 끝 모를 줄다리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를 어쩐다.’ 그러나 유난히 볕이 좋았던 8월의 둘째 주 토요일, 나는 8시간 동안 기꺼이 그 공간 안을 채우는 시간과 사건과 사람들을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결심의 시작점에는 다름 아닌, 안무가가 전해주던 단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분명, 재미있을 거예요.”
‘보는 자’라는, 나로서도 생전 처음 맡아보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아트선재센터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공연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가져간 노트북 위에 시시각각 낙서를 했다. 낙서라는 형식을 통해 기록된 시간 안에는 그저 가볍게 스쳐지나갈 법한 순간들이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며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몇 시 몇 분에 어떤 방식으로 조명의 변화가 있었는지, 어디부터 즉흥이고 어디부터 즉흥이 아닌 건지,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들 속에서 과연 언제부터 반복의 구조가 읽히기 시작했는지, 심지어 지금 갤러리 바깥엔 해가 졌는지 등등에 관한 기록들. 가급적 공연에 대한 정보 없이 와주었으면 하던 안무가의 바람대로 공연 전에 내가 알고 있던 사전 정보라고는 움직임과 사운드와 조명의 협업이 작업의 중심을 이룬다는 것, 그리고 공연의 전체 구조가 일본 전통공연예술 ‘노’의 리듬구조인 ‘조(시작)-하(발전)-큐(절정)’에 그 기본을 두고 있어 매 사이마다 휴지기를 두고 몇 개의 파트로 나뉜다는 것 정도였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여전히 궁금증으로 남아있었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질문의 타래는 풀리지 못한 채 여전히 단단히 제 몸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공연이 마지막 절정에 가닿는 동안 점차 소진되어가는 퍼포머의 몸과 그 안에서 여전히 생동하는 움직임의 기운 사이에서 만들어지던 즉흥적인 역설을 보며, 그리고 그로부터 비로소 발현되던 ‘춤’을 함께 체험하며 결국, 매우 기쁘게도 <더스크> 작업에 설득 당하게 되었다.
안무가가 사는 동안 총 5번에 한해서만 공연할 것이라는 <더스크>(그러니까 이번 공연은 그중 첫 번째 공연이었던 셈이다)는 이번의 경우, 총 3파트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2011년에 있었던 선행 작업을 담은 영상이 공연 당일에 아트선재센터 3층에서 상영되었고, 2층에서는 이양희, 류한길, 노명준이 함께 하는 8시간의 퍼포먼스가 진행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공연이 끝난 후에는 안무가의 글이 담긴 책을 출판함으로써 서로 다른 미디엄 안에서 ‘춤’을 구현하기 위한 실험들을 행하는 것이다.
<더스크> 공연의 참여자들이 모여 서로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이번 인터뷰는 비디오 편집을 담당했던 안재영의 말처럼 이번 공연을 확장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 같은 시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춤’을 사유했던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하(破)



이양희 안무가, 노명준 조명 디자이너 ⓒ양동민
양희: 우선 노명준 씨께 궁금한 점이 한 가지 있어요. 전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에 일어나는 공연자 스스로의 선택을 인지하는 것에 흥미가 아주 많고, 그 에너지가 공연의 감각을 살아나게 한다고 믿는데요. 그런데 공연 마지막 직전에 전체 조명을 켜셨을 때, 그러니까 제일 마지막에 조명을 전부 끄기 전에 전체 조명을 탁,하고 켜셨을 때,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하셨던 거예요? 당시에 여쭤봤을 때는 일부러 하셨던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우리가 미리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연출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놓았었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예상치 못했던 조명이 등장하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혹시 순간적으로 실수를 하신 건 아닐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실수가 아닌 거예요. 분명히 의식적으로 선택하신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무한한 신뢰와 안도감이 들었는데, 이런 감정들이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궁금해지기도 했고요. 예상치 못한 조명이 들어오던 순간 정말 너무 놀랐는데, 어떤 생각으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명준: 저희가 공연을 하는 동안 이양희 씨나 류한길 씨나 저나 같은 동작, 같은 음악, 같은 조명 작업을 하면서 저희가 관객들에게 어떠한 이미지를 쌓아주면서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8시간이라는 정말 긴 시간 동안 우리가 쌓아왔던 것에 대해서 확신이 있기도 했고요. 사실 마지막에 저희가 리허설 하면서 조명을 어떻게 켤지에 대해서 약속을 다 하고 들어간 상태였는데, 그때 양희 씨가 저에게 공연 마지막에는 날것으로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좋겠다고 하셨던 말씀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조-하-큐’ 중에서 ‘큐’파트 마지막에 제가 조명을 다 끄기로 되어있어서 조명을 끄러 운전실로 갔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양희 씨가 쌓아온 시간이 날것 그대로 관객들과 마주한다면 과연 어떨까라는. 거기서 좀 더 드라마틱하게 조명을 모두 끄는 대신에, 공간 전체를 밝히는 형광조명을 켜고 바로 그 자리에 양희 씨가 서있는 그 상태로 관객들과 마주하는 시간을 조금 준 다음에 전체 조명을 끄면 오히려 관객들도 에너지를 가져가고 저희도 에너지를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선택을 했던 거예요.
양희: 그러니까 그 선택을 하는 순간에 무엇이 그려질지, 어떠한 상황이 펼쳐질지, 말하자면 어떤 특정한 상(像)을 상상하신 셈이네요. 예상치 못했던 그 순간을 마주했을 때, 저에겐 그 점이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었거든요. 왜냐하면 촘촘하게 짜인 구조 안에서 모든 게 즉흥적으로 이루어질 때, 모든 선택은 바로 이 상을 상상하면서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매 순간마다 공연자들의 선택과 함께 말이죠. 예를 들자면, 공연 중간에 제가 스피커 앞으로 가자 명준 씨와 한길 씨가 대뜸 조명과 사운드를 꺼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라고 저한테 물어보셨던 거죠, 즉흥적으로. 그렇게 선택의 순간을 저한테 토스해주고, 제가 어떤 선택을 하고 나면 뒤이어 명준 씨가 또 다른 선택을 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서로 간의 대화가 진행되는데요. 저는 동시에 상을 그리며 공연을 해나가는 사람이다 보니 제게 익숙한 방식으로 공연을 풀어가고 있던 찰나에 명준 씨가 그렇게 조명을 다 켜버리니까 정말 너무 당황스럽더라고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로 그 순간에 어떤 구체적인 상이 동시적으로 제 머릿속에 그려졌어요. 그런 상을 줬다는 점에서 우리가 어느 순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랭귀지를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요.
명준: 축적된 에너지가 그 순간에 약간 정지된 상태로 끝을 맺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희 씨와 제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양희: 저는 바로 그 순간에 큰 신뢰를 느꼈어요. 신뢰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거든요. 만약 공연에서 미리 이렇게 하기로 약속됐는데 그렇게 진행이 안 됐다면, 뭐가 틀렸는지 들킨 것처럼 당황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약속되지 않았음에도 조명을 켰다는 게 저는 오히려 너무 감사했어요. 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에 대해 명준 씨께 꼭 좀 여쭤보고 싶었어요.
옥주: 이쯤에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다음은 제가 이양희 씨께 드리고 싶은 질문인데요. 이번 <더스크> 작업이 왜 8시간이어야만 했던 건지 궁금해요. 어떻게 보면 이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출발점일 것 같은데, 그 질문을 꼭 좀 드리고 싶었어요.
양희: 다층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첫 번째로, 이 공연은 사실 제 평생에 단 5회에 걸쳐 한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라는 거예요. 이번에 공연을 했으니 앞으로 4번밖에 남지 않은 건데, 그 공연들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몰라요. 한정적으로 진행되는 작업이다 보니 한 번 한 번의 기회가 너무 아깝고 소중했어요. 그래서 가급적 오래 춤을 추고 싶었고요.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공연이 미술관에서 진행된다는 점이었어요. 대개 극장에서는 어두운 공간 안에서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동안 공연이 이어지고, 그 다음에 관객들이 밖으로 나가는데요. 미술관 세팅이라는 공간 조건 자체가 일단 달라졌고, 그렇기 때문에 미술관의 속성상 사람들이 미술관 오프닝 시간부터 그 미술관의 관람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공간 안팎을 오갈 수 있는, 굉장히 자유로운 상황이었다는 거예요.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공간과 시간의 생리적 조건들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오가는 관객이 정작 볼 수 있는 공연은 아주 잠깐 동안이라 할지라도 전체 공연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세 번째로는 ‘더스크’라는 작품 제목처럼 해질 무렵의 시간을 계산했어요. 공연 장소였던 아트선재센터가 낮 12시에 오픈하는데 과연 언제 클로징을 해야 관객이 센터 바깥으로 나갔을 때 해질녘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을지, 그 시간을 계산해봤는데요. 공연이 이루어지는 여름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 8시간 정도 걸리겠더라고요. 사실 시간을 약간 더 줄여야 맞았던 건데. 아무튼 공연 진행과 관련해서 여러 제약과 한계가 좀 있었지만, 그 부분까지도 사실은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그리고 8시간에 대한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제가 믿는 공연 예술의 가치는 바로 시간이라는 점이었어요.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 다시는 올 수 없는 그 시간을 매 순간 관객과 함께 맞이하는 건데, 바로 그 시간이 가급적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8시간이라는 공연 컨셉에는 너무 많은 층위가 들어 있어 도대체 어디서 얘기를 끝내야 할 지 모르겠네요. 저는 그 동안 춤을 추면서 춤을 잘 춘다, 춤을 아름답게 춘다, 아름답다, 잘한다, 이런 말들을 많이 들어왔는데요. 정작 저는 ‘너의 선택이 굉장히 crazy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거예요. 작가의 선택이 드러나는 작업을 만들고 싶었는데 선택 중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시간이었어요. 그래서 8시간짜리 공연이 된 거죠. 감사하게도 함께 작업하신 분들이 이렇게 동참을 해주신 거고요. 여덟 시간 동안 계속해서 쌓이는 공연 예술의 가치와 에너지를 실험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고.
옥주: 궁금한 게 또 있는데, 바로 이어서 질문 드려도 될까요? 이양희 씨의 움직임과 더불어서 이번 작업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였던 게 아무래도 사운드와 조명이었던 것 같은데요. 양희 씨께서 8시간짜리 퍼포먼스 작업을 하겠다고 제안하셨을 때, 류한길 씨와 노명준 씨는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그리고 함께 작업을 진행하면서 서로 어떤 생각 가지고 참여를 했는지가 궁금해요. 굉장히 생소한 형식이잖아요, 이렇게 장시간 공연하는 것이.





손옥주 공연학자 ⓒ양동민
한길: 저는 처음에는 공연 시간이 8시간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8시간짜리 공연이라는 얘기를 안 하고서 같이 작업 하자는 연락이 와가지고, 그래서 한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나서, 8시간동안 공연한다는 소리를 언제 처음 이야기했죠?
양희: 8시간을 합니다, 하고 제가 먼저 이야기했죠. 나는 8시간 동안 공연을 하는데, 한길 씨도 함께 하실래요? 이렇게. (웃음)
한길: 아니에요. 이제 와서 손을 털기 힘든 시점, 그 때쯤에 공연 시간이 8시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많이 당황했었어요.
양희: 아니에요. 제 기억에는 분명히 얘기했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공연 포맷이 저 혼자 8시간동안 움직이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맨 처음에 썼던 계획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고요. 제가 8시간동안 움직이면, 한길 씨와 명준 씨가 그날 미술관에 셋업을 하시는 포맷이었어요, 원래. 그래서 셋업 과정을 다 보여주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속적으로 8시간동안 가다가 공연 끝나기 전 거의 3~40분 정도를 남겨두고 사운드와 조명까지 완벽하게 세팅되고 난 다음에 바로 셋이 함께 하는 공연을 시작하는 방식이었어요, 원래는. 바로 그 방식에 오케이 했던 거죠.
한길: 그건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시점이었고. (일동 웃음)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즉흥 연주를 오랫동안 해오다 보니, 8시간 동안 연주를 지속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일종의 도전 같은 상황이었죠. 즉흥 연주자로 8시간 연주를 해보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었고. 사실 저는 한때 무용음악 작업을 많이 하다가 어느 시점에 딱 멈추게 됐는데요. 제가 한참 무용작업에 참여할 당시에는 무용음악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어요. 무용음악이 있긴 했었지만, 안무의 백그라운드가 되는 장치로서의 음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안무 자체가 음악화 될 수 있는 과정들, 그런 가능성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단지 무용수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기계적으로 공연의 분위기를 깔아주는 것에 불과했던 거죠. 그런 부분에 대해 개인적으로 염증을 느끼게 돼서 무용음악을 안 하겠다고 하고 그만 뒀던 건데요. 그런데 양희 씨의 경우에는 다른 안무가들과는 달리 공연 전에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음악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라던지 소리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도 없고, 본인이 어떻게 할 거라는 이야기도 없고. 어떻게 보면 과거에 머스 커닝햄하고 존 케이지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뭔가를 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됐던 거예요. 그 과정 때문에 저는 오히려 과거에 갖고 있던 무용음악에 대한 편견과 스트레스가 다 없어졌던 거 같아요. 그냥 마음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또 놀란 점은 양희 씨는 제가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도 좋아하더라고요. (일동 웃음)
양희: 저는 밖에 나가서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류한길 씨는 제가 “이런 겁니다.”라고 말하면 그 다음날 거기에 맞는 사운드를 만들어 오는데, 그걸 들어보면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다고. 그저 “바로 이거예요!”하고 말하게 된다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해도, 한길 씨가 그 다음날 만들어온걸 보면 제가 찾던 바로 그거거든요.
한길: 처음에 이야기한 세팅 과정도 어쩔 수 없이 즉흥적인 과정들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보니 이런 방식으로든 저런 방식으로든 어차피 8시간동안 즉흥을 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실제로 제 개인 공연하는데도 사운드 세팅하고 체크하는데 20분 이상 안 걸리거든요. 제가 제 공연을 해도 20분밖에 안 걸리는 작업을 8시간동안 해야 한다는 건 저에겐 일종의 사고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런 작업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또 그때 양희 씨가 일본 전통예술 ‘노’의 형식을 차용한 악보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런 부분들이 이전에 참여했던 무용작업들과는 상당히 달랐어요. 이전에는 뭔가 저도 이해할 수 없는 안무가의 감정상태를 표현해줘야 했다면, 그리고 거기에는 소리에 대한 감각적인 반응보다는 멜로디와 화성악에 기초한 감정선 따라가기에 대한 욕망들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그런 게 전혀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8시간을 제가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하는가, 라는 고민이 들었거든요. 제가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유가 보장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공연 구조만이 간단하게 정립되어있을 때 느끼게 되는 8시간에 대한 부담이 있었어요. 그런 부담 자체는 양희 씨와 이야기하던 중에 다 날아가 버렸던 것 같아요. 그 다음부터는 계속 신체적인 어려움만 있었던 거지. (일동 웃음) 등이 아프더라고요. 그리고 명준 씨는 공간 이곳저곳을 오가느라 허벅지가 터질 것 같다고 하고. 저는 가만히 앉아있으니까 등이 아픈 것이지만, 명준 씨는 아무래도 계속 반복 행동을 해야 하잖아요. 한번 다녀올 때마다 계속 그 숨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 숨소리가 본인의 노동을 증명해주고 있더라고요. 저는 등이 아프고, 그쪽은 허벅지가 터지려고 하고 호흡이 차고, 그리고 저 앞에서 양희 씨는 혼자 계속 뱅글뱅글 돌고 있고, 그랬죠.
명준: <십 년만 부탁합니다> 라는 작품에 함께 참여할 당시에 양희 씨가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잠깐 했었어요.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아마 굉장히 재미있는 작업이 될 거다, 라고 자신 있게 말씀을 하셨고. (일동 웃음)
한길: 본인 입으로요?
양희: 늘 그렇듯이. (웃음)
명준: 이건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나서 한참 후에, 메일을 한 통 보냈으니 확인해 달라고 하셔서 확인을 했는데, 공연장이 아닌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방식을 택할 것이고 현 공연계의 추세에 대해서 한번 고민해 볼 수 있는 작품인 것 같은데 명준 씨가 흥미 있으면 같이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메일에 마지막으로 ‘좀 힘든 작업이 될 건데 괜찮겠냐’라는 말을 덧붙였었어요. 제 경우는 공연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작업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내가 조금만 고생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참여를 하게 된 건데요. 저도 8시간이라는 얘기를 좀 늦게 들어서. (일동 웃음) 진짜예요. 나중에 다 함께 모였을 때 이야기를 들었어요. 작업 자체는 좀 힘들겠지만 재미있겠다 싶어서 참여하게 된 건데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저만의 틀을 깨는 데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공연장에서 공연을 많이 하다 보니까 주로 많이 쓰는 이미지라던가, 조명기의 설치 위치라던가, 그런 관습적인 부분들이 있게 마련이거든요. 그런 방법들로 관객에게 어떤 분위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장면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도 하고, 아니면 공연을 분리시켜서 보여주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연출 방법들이 있는데요. 이번 공연에서는 제가 좀 고생했던 게 있어요. 양희 씨와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양희 씨가 보여야 하나, 보이지 말아야 하나’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질문을 했을 때 양희 씨가 조명을 꺼도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물론 연극이나 무용작업에서 암전도 조명의 하나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조명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불을 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암전은 보통 무대 전환을 위해서 많이 쓰는 방식이지, 암전된 상태에서 춤을 추거나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런데 불을 꺼도 된다는 양희 씨의 말에 확신을 갖게 된 계기가 있어요. 어느 날엔가, 제가 미술관에 가서 이렇게 저렇게 조명을 설치하고 불을 켜보기도 하고 불이 다 꺼진 상태에서 위치를 옮겨 다녀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양희 씨가 쉬지 않고 즉흥 움직임을 계속 진행하고 있는 거예요. 한길 씨의 음악도 계속 나오고요. 바로 그 순간에 어둠도 일종의 조명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던 것 같아요. 맨 처음에 한길 씨의 음악을 틀었을 때, 이것을 과연 내가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면서 그 시간에 음악을 맞춰 이해하며 이 타이밍에 움직이고 저 타이밍에 움직이고 그랬었는데요. 너무 많이 듣다 보니 시작포인트와 중간포인트와 끝포인트가 확실히 외워지더라고요. 심지어 나중에는 동선에 맞춰 불을 정확히 끄는 장면도 나왔고요. 저한테는 굉장히 새로운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한길: 사실 고백을 하자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니까 양희 씨와 명준 씨는 각 음악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시작되는 부분과 끝나는 부분을 알고 있더라고요. 근데 정작 음악을 만든 저는 몰랐던 거예요. 제가 구분을 못하다 보니 솔직히 말해, 화면에 음악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표시를 해놨었거든요. 제가 만들어놓고도 어디까지 진행됐는지를 몰라가지고. 나중에 두 분은 알고 저는 계속 모르는 상태가 됐었죠.
명준: 저 역시 뭔가를 찾아가는 작업 방식이 재미있었어요. 처음에는 제가 공간 안을 돌아다니면서 전기플러그를 꼽는 것에 대해 저희 안에서 이야기를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 행위가 작품의 흐름에 방해가 되나 안 되나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김재범 사진작가 ⓒ양동민
양희: 그때 그 자리에서 재범 씨가 그랬잖아요, 이렇게 하실 거냐고. 그러자 명준 씨가 아직 생각 중이라고 했었잖아요. 재범 씨가 괜찮을 것 같으니 하라고 했었고요.
재범: 괜찮을 것 같다고 모두 이야기를 했었죠.
양희: 지영 씨도 괜찮은 것 같다고 이야기 했었어요. 그래서 “그래? 그럼 갑시다!”하고 결정된 거예요. 모두의 힘이 모아졌던 거죠.
한길: 사실 저는 예전부터 무용이나 연극 같은 무대 작업을 볼 때 로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무대에 올려지는 대부분의 작품은 정확한 틀 안에서 계획된 바대로 작동되다 보니 보여줘야 할 것만 보여주잖아요. 나머지의 노동들은 그 안에서 걸러지는 것이고, 그렇게 보여줄 걸 보여주기 위해서 모두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거죠. 항상 그걸 반전시켜서 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어요.
양희: 맨 처음 이 작업을 계획했을 때, 나는 리허설을 8시간동안 계속하고 한길 씨랑 명준 씨는 한 2시정도부터 와서 테크니컬 리허설 하고 사운드 체크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사실은 그런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공연이 되겠다고 애초에 제안을 했던 거였죠. 그게 결국에는 어떤 공연의 형태로 되어버렸던 거지.
한길: 그런데 명준 씨가 돌아다니면 뭔가 기술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게 보여지는 셈인데, 그건 또 안무하고는 다른 거잖아요. 투박하다면 투박할 수도 있는 건데요. 그런데 명준 씨가 움직이는 모습이 좋았던 게, 계속 심드렁하게 걸어가서 전원을 뽑고 전원을 뽑으면 뭔가가 꺼지더라고요. 뭔가 보고 싶었던 걸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언제나 보여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필터링되어서 어둠 속으로 밀려나야 했던 주체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주체들이 반전되어 역으로 전면에 등장하는. 그런 부분들이 좋았던 것 같아요.
옥주: 저 역시도 공연을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게, 한편으로는 공연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요소들이 보이는 반면, 다른 한 편으로는 굉장히 일상적인 요소들이 보인다는 점이었어요. 명준 씨가 걸어가던 모습도 여기가 아트선재센터라는 특수한 공간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의식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걷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곳이 어떤 공간인가와는 상관없이 그저 일상적으로 걷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거든요. 일상적인 모습과 비일상적인 모습이 혼재되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이 공연인 걸까 아닌 걸까, 라는 질문 자체가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졌어요. 처음에는 이곳에 뭔가를 보러 들어왔다는 목적이 있었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것들을 보면서 점점 그런 생각이 희석되는 거예요. 관객들도 점점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공간 안팎을 움직이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바로 그 지점에서 관객들에게도 그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되돌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처음엔 공연 보러 온 관객의 모습이었지만, 차차 공간 안팎을 들어오고 나가는 게 자연스러워지면서 공연 특유의 관객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공연 중에 관객끼리 이야기 나누는 것도 너무 자연스러웠고요. 같은 공간 안에 그런 모습들이 섞여있는 게 재미있었어요.
양희: 사실 저는 애초부터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공연하길 원했던 게 아니라. 시간 안에서, 8시간이라는 그 긴 시간 안에서 모두가 각자의 할 일을 하길 원했어요. 그런데 각자의 할 일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고, 쓸 수 있는 랭귀지가 조명인 것이고, 쓸 수 있는 랭귀지가 무브먼트인 것이고, 쓸 수 있는 랭귀지가 음악인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런 서로 다른 랭귀지들이 우리를 춤추게 한 거죠. 그런 요소들이 그곳에서 공연을 하게 한 것이지, 사실은 저희는 그저 할 일을 한 것일 뿐이에요. 관객들도 각자 자신들이 할 일을 한 거고요. 그런 방식으로 우리 모두가 그 시간을 함께 했던 거죠. 옥주 씨에게는 보는 자로서 바로 그 모든 것이 함께 하는 시간을 봐달라고 부탁했던 건데, 나중에 공연을 보며 옥주 씨가 써놓은 글을 보니 공간 한 켠에서 저희와 함께 글로 춤을 추며 시간을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게 좋았어요. 공연에서 뭔가를 보여줘야겠다는 의도 자체가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악보대로 각자 할 일을 했던 거고, 거기에 수많은 선택만이 있었던 거죠.
한길: 제 친구도 8시간을 다 봤거든요. 계속 끝까지 앉아서 본 게 아니라 왔다 갔다 하면서요. 그런데 그런 이야길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공연을 보러 왔다는 느낌으로 앉아있었는데, 점점 자기한테 선택권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래요. 일반적으로 공연장에 관객이 들어가면 정해진 공연 시간 동안 많은 제약들을 겪게 되잖아요. 자기가 행동하는데 있어 제약을 겪게 되는 셈인데, <더스크>는 그런 제약을 주지 않더라는 것이죠. 갈증 나서 밖으로 나가 커피 한 잔 마시고 들어와도 여전히 사건은 벌어지고 있는데, 그것 하나를 놓친다고 해서 전체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계속 뭔가가 반복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러다 보니 끝날 때쯤 되니까 그런 기분이 들더랍니다. 공간 안에 들어와 있는 게 삶의 일상적인 패턴인 것이고, 밖으로 나가는 게, 밖에 나가서 커피 마시고 수다 떨었던 것이 이상한 일탈 행위처럼 느껴지더라는 거죠. 오히려 공연이 벌어지고 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왔을 때의 느낌이 오히려 더욱 일상의 패턴처럼 느껴지는, 그런 뒤바뀐 듯한 느낌이 들더라는 거예요. 근데 문제는 그런 느낌은 8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계속 경험을 했을 때 비로소 받을 수 있는 것 같거든요. 그게 아니라면 굳이 공연 보던 중에 나갔다가 들어올 이유도 없어지는 거고.



안재영 비디오 편집자, 전효경 제작메니저, 배소영 비디오 오퍼레이터 ⓒ양동민
재영: 제가 오해를 했던 게 하나 있는데요. ‘8시간’이라는 단어에 묶여, 8시간 안에서 양희 씨가 수행해야 했던 역할에 대해 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얘기를 듣다 보니 ‘우리가 왜 이 자리에 있어야 할까’라는 원론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단순히 인터뷰라는 목적을 위해 다 만난 것이긴 하지만, 이 자리조차도 어떻게 보면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건 아닐까, 이것조차 양희 씨가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수행하고자 했던 목적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이 작업이 우리 예술계에서 가지는 위치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궁금해지네요. 큐레이터 분께 이런 부분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고 싶어요.
효경: 미술관에 있다 보면 미술 안에서의 시간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되는데, 저는 이 공연이 주는 새로운 시간성의 개념이 재미있었어요. 예를 들면, 그 공연 시간 8시간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아트선재센터의 오프닝 시간에 한 시간을 더한 것이었는데요. 미술관의 개장시간에 맞춘다는 점에서, 이 공연의 시간적인 조건이 전시와 같은 구성으로 진행된다는 전제가 있었어요. 관객들이 언제든지 입퇴장을 할 수 있다는 조건도 있었고요. 전시와 공연의 전통적인 시간적 조건 같은 것이 있는데, 그런 개념을 달리함으로써 전시장에서 관객이 안무가와 만나는 경험을 극장에서와는 아예 다른 방식으로 하는 거니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달리 생각해보면 전시의 시간이라는 건 사실 공연처럼 현재를 불러오는 시간이 아니라 작품이 변화하기를 멈춘 과거의 것을 소개하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이미 완료된 것을 불러와 보여주는 쪽에 가깝죠. 전시에서도 물론 현재로 시간을 불러들이는 방식의 수행적인 작업이나 장치들이 많은데요. 하지만 전통적인 전시 조건은 시간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양희 씨랑 그런 얘길 한 적 있어요. 공연은 우리가 완전히 현재에 집중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 미래를 걱정하거나 과거에 묶여있는 게 아니라 지금, 완전히 현재에 머물게 할 수 있는 그런 힘. 저는 공연이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번 <더스크> 작업의 경우에는 분명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전시라는 프레임 안에서 그 힘을 가져왔다고 생각해요. 미술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전시 기간 동안 전시의 틀 안에서 그 힘을 가능하게 만든 거라고 생각해요.
재영: 저는 흥미로웠던 게, 계속 공간이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이번 공연 이전에 있었던 2011년 버전의 <더스크>를 담은 영상이 보여지던 장소(주: 아트선재센터 3층 갤러리)에서부터 시작해서 공연이라는 큰 잔치를 2층 갤러리에서 열고 그 이후에 갤러리 바깥에서 이런 식의 인터뷰 겸 뒷풀이를 위한 만남까지 이루어지면서 공간이 확장되고 있는 셈인데요. 양희 씨가 생각하는 공간의 의미가 궁금해요. 일반적으로 미술관에서 이뤄지는 전시의 경우에는 아티스트가 뒤로 나와 객관적으로 자기 작업을 바라보게 되고, 전시가 끝나면 바로 철수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이번 작업의 경우에는 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프로세스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양희 씨 혼자서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게 뭘까 싶어서 상당히 흥미로워요.
효경: 사실 미술관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이번 관객들의 분위기나 수준이 매우 높았어요.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마다 각기 보러 오는 사람들이 다르게 마련인데요. 특히 저는 생각했던 것보다 8시간짜리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 새로웠어요. 공연 전에는 상대적으로 관람 시간이 짧은 전시처럼 한 10분 정도 보고 전시장을 나가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관람객들이 꽤나 긴 시간을 버텨주는 걸 보면서, 그 시간을 온전히 함께 있어준다는 느낌을 가졌던 것 같아요. 공연의 특정한 전개를 꼭 봐야지, 하는 마음보다는 공연자들과 그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상황이랄까요. 그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고, 거기에서 오는 에너지와 함께 이 시간을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게 신기했어요.
한길: 만약에 조명이나 안무 없이 음악으로만 8시간이 진행되었다면, 아마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음악 공연을 8시간동안 본다고 하면 제 입장에서 생각을 해도 그냥 8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도 더 힘들 것 같거든요.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 작업에는 뭔가 다른 힘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양희: 근데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인간이 조작하는 장치로 인해 발생된 어떤 현상이 8시간 지속되는 것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무브먼트로 8시간을 지속하는 것과는 관객의 보는 자세부터가 좀 다를 것 같아요.
명준: 많은 안무가들은 짧은 시간 안에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 동안 스탭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모으는 방식의 작업을 많이 해왔는데요. 이번 작업의 경우에는 기존 작업들과는 달리 이미지를 계속 축적시키고 abc라는 악보에 근거해서 aaa bbb ccc 이런 식의 패턴을 만들어내고 이 패턴이 계속 바뀌는 형태에 따라 이미지가 축적됐거든요. 관객들이 그 긴 시간 동안 이렇게 축적되는 이미지들에 대해서 무엇을 느끼고 갔을지, 그게 가장 궁금했어요.
옥주: 이 작업할 때 어떤 기준이 되는 악보가 있었던 건가요? 방금 패턴이 변형된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악보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세요.
양희: 원래 제가 제시한 악보가 있었어요. 악보는 제가 만들었고요. 공연예술의 요소들 중에서 가장 감각적이라 할 수 있는 몸동작, 조명, 사운드를 선별해낸 것이고, 거기에 공연예술이 갖고 있는 전통적인 리듬의 전개까지도 하나의 요소로 덧붙여서 총 4개의 요소로 만든 거예요. 그 각각의 4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한길 씨, 명준 씨, 그리고 저 이렇게 3명이 일본 ‘노’의 리듬구조를 기반으로 한 abcd를 각각 만들었어요. a가 조, b가 하1, c가 하2, d가 큐, 이렇게 해서 abcd를 만들었고 이 4개의 요소들을 수학적으로 조합하고 배열하며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의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뽑아본 거예요. 그리고는 전체 포맷을 다시 조-하-하-큐로 나눠서 이걸 다시 점차적으로 발전되는 공연예술의 양상 안으로 다시 집어넣은 거죠.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이 어떠한 상태를 반복하는 순간을 분류해냈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합쳐지는 지점, 세 사람이 합쳐지는 지점, 이런 식으로 각각의 순간을 악보로 만들어냈어요. 이 악보가 기반이 됐었고, 이 악보 안에서 저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움직인 거죠.
명준: 그래서 아까 인터뷰 첫 질문으로 양희 씨가 저한테 공연 말미에 왜 조명을 켰냐고 물었던 이유가, 그 장면은 사실 약속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 전날 저희가 리허설을 했을 때, 양희 씨가 지쳐 서있었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지금의 이양희가 아니라, 더스크 안에 있는 이양희, 그 이양희를 제가 조명을 켰을 때 스스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양희: 제가 만든 악보가 있었고, 그 악보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조명은 꺼졌어도 음악은 계속 나오는 등의 장면이 바로 그 악보에 기반했던 건데, 앞에서 이야기했던 각 요소 간의 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시간차가 났기 때문에 다 다르게 느껴졌던 거죠. 그게 만약에 4분 4분 4분 4분이었다면 아마 다 똑같이 끝났겠지만, 시간차를 2-4-4-3으로 뒀기 때문에 어긋남이 보였던 거예요.
옥주: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관객들이 이번 공연에 대해 전부 즉흥으로만 진행이 되는 건지 궁금해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까 반복구조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공연 시작된 지 한 1시간쯤 지나서부터 어딘지 모르게 반복 프레이즈를 느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진행 구조가 약속되어있는 걸까, 그렇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미리 약속이 되어있었던 것이며 또 어디부터 아티스트 개개인의 자율에 맡겨진 걸까. 그 부분이 다들 궁금했을 것 같아요.
명준: 약속이 안 되어있던 지점은 저희가 하2 때, 그러니까 2번의 인터미션을 가지고 3번째 섹션을 시작했을 때예요. 그 섹션에서는 요소들 간의 변화를 좀 다양하게 주기로 했는데, 뭔가가 명확히 약속되어있던 건 아니고 저희 세 사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믿고 가보기로 했던 거거든요.
양희: 구조는 항상 있죠. 왜냐하면 우리에겐 악보가 있었으니까요. 저는 dddd를 했어야 했던 상황이었고, 이분들에게는 또 다른 자신만의 수행 악보가 있었어요. 그렇지만 정작 그 안에서 무엇이 드러나게 될지는 서로 아무도 모르는 거죠.
명준: 일종의 잼을 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리허설이나 공연 중에 서로의 느낌이나 상황을 모르면 아예 진행할 수가 없었던 지점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 서로 고민 공유를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해소가 된 부분들이 있었어요.
양희: 첫 번째 섹션과 두 번째 섹션에서 오리지널 스코어를 모두 활용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우리가 어떤 변형을 시도한다 해도 그걸 보는 관객들에게는 이전의 기억 때문에 그게 반복구조처럼 보이는 거죠. 우리한테는 공연의 재료가 이미 정해져 있었잖아요. 조명이 어디에 몇 개가 있는지 제가 이미 알잖아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지점에서 기다렸다가 명준 씨가 어디를 향해서 가면 뭐가 켜질 거고 뭐가 발생할 거고 그렇다면 내가 어디에 가있어야 하는지가 예상이 되더라고요. 이 사람이 어딘가로 향하는 순간, 그게 어둠 속에서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 순간 내가 즉각적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건 이 상황이 바로 다음 순간에 어떻게 이어질 건지, 상을 동시에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가는 스킬이 있어야 하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 한길 씨도 음악을 틀다가 제가 스피커를 향해 가면 즉흥적으로 음악을 탁 끊어버리는 거예요. 제가 그곳을 향해 가는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사운드를 끊어버렸다는 건 이 상황이 어떤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읽힐 것인지 계산을 하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미리 알고, 그게 어떻게 보일지 미리 아는 상태에서 이 모든 상황에 대해 동시다발적인 계산을 계속 하면서, 상을 계속 그리면서 가는 작업을 거의 3시간 동안 내리 한 거예요. 그러니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모일 수밖에 없죠.
명준: 변형을 주는 섹션에서 저는 아무래도 한길 씨 음악에 의지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음악에 맞춰 조명을 깜박거린다거나, 쿵쿵쿵쿵 리듬에 맞춰 어딘가를 향해 걸어간다거나, 전기콘센트를 꼽거나 뽑는다거나, 그런 행위를 했죠.
소영: 이양희 씨께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이번 공연의 경우, 별다른 설명 없이 공연만 봤을 때는 굉장히 건조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마지막에 계속해서 호흡을 가져가는 부분들은 건조하다고 볼 수 없겠지만, 구조의 짜임새 같은 것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방식자체는 상당히 감정이 배제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 작업 과정을 좀 알고 싶어요.
양희: 2011년에 있었던 <더스크>의 선행 작업에서는 한 작품 안에 하고 싶은 얘기를 다 넣고 싶었어요. 그렇다보니 그 안에 스토리텔링도 들어가고 무브먼트도 들어가고 정서도 들어가고 음악도 들어가게 되었었죠. 그런데 그 작업을 하고 나니까 결국 내가 관객들과 무엇을 나누고 싶은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말하자면, 내가 작가로서 수행 가능한 소통방식과 범위에 대한 질문이 들었던 거예요. 결국 ‘아티스트가 어떤 것을 관객들과 나누고 싶은가’의 문제와 관련해서 내가 만든 선택의 포인트를 관객들에게 정확하게 제시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렇기 때문에 공연 안에서 모든 요소들을 다 분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요. <더스크>라는 제목 그대로 해질녘의 시간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몸을 통해 어떤 각성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제가 생각했던 어떤 가장 중요한 요소들만 따로 가져와서 두 분 작가님들과 작업하고 싶었어요.
소영: 한편으로 공연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어요. 로버트 윌슨 연출의 <해변의 아인슈타인>도 굉장히 다양한 구조들의 조합들로 이루어져있는데, <더스크>를 보면서 그 작품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조명, 사운드 등 공연을 구성하는 요소들, 어떻게 보면 기존의 공연 체계 안에서는 배경이 될 수 있는 그런 요소들을 주인공으로 가져와서 그 안에서 서로의 조합을 맞춰가는 방식들, 이게 굉장히 개인적인 방식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또 하나의 공연 문법을 시험하는 건 아닐까 싶었어요.
양희: 그러니까 그 개인적인 것을 만들기 위해서 내가 지금 가장 관심있어 하고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거예요. 저는 아마 이런 방식을 또 다른 작업을 할 때도 다시 실험하게 될 거예요. 왜냐하면 저한테는 그런 방식으로 안무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안무, 사운드와 조명과 관객, 건축적인 요소들과 글자,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안무가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하는 게 제 질문이기 때문에, 아마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겠죠?
옥주: 마지막으로 출판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이번 더스크 작업은 출판 작업으로 비로소 마무리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말씀 좀 듣고 싶어요.
양희: 이번 작업은 안재영 씨, 배소영 씨와 함께 2011년에 작업했던 영상의 전시, 노명준, 류한길, 이양희 3인의 공연, 그리고 제가 10년 동안 써온 한 줄짜리 일기를 이경수 디자이너와 함께 책으로 내는 작업, 이렇게 3파트로 이루어져있어요. 경수 씨랑 같이 하는 작업은 안무를 함께 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애초에 경수 씨를 섭외할 때부터 경수 씨의 작업에서 제가 안무를 할 때 쓰는 운동성, 공간성을 봤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책 출판에 대한 제안을 드렸던 거예요.



이경수 북디자이너, 정지영 제작매니저 ⓒ양동민
경수: 사실 제가 안무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저를 찾으셨던 이유도 공연의 일부분을 책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셨을 텐데요. 아무래도 저한테도 공부할 시간이 좀 필요했고, 생각하고 있는 형태가 어떤 것인지를 저 역시 파악해야 했기 때문에 양희 씨와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눴어요. 만날 때마다 저는 양희 씨에게 어떤 걸 제안하거든요. 그런데 제안을 할 때마다 굉장히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다른 분들의 말씀을 들으며 같은 수법이구나 느꼈어요. (일동 웃음)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뭔가 작업자의 일부를 어딘가로 끌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어쨌든 지금까지의 영상이나 공연 파트들에 대해 공연의 일부라고 명명한다면, 책 출판은 그런 공연과는 다른 형식을 가진 또 하나의 공연인 것 같아요. 양희 씨가 10년 동안 썼다는 한 줄짜리 일기라는 전제가 있고, 그걸 가지고 공연을 하는 건데요. 그렇다고 해서 그 일기가 기준이 돼가지고 어떠한 시나리오를 만든다, 그건 또 아니거든요.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조-하-큐와 같은 경우의 수의 조합으로 책을 만들어야 하나,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매일 매일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는데, 지금은 얼추 정리가 됐어요. 제가 양희 씨에게 공연을 책으로 옮기고 싶은 건지 아니면 책을 공연화 하고 싶은 건지에 대해 물어봤었어요. 그 두 가지는 비슷한 질문이긴 한데 어떻게 보면 다른 맥락을 만들어내거든요. 그랬을 때 결국 제게 답으로 돌아온 것은 공연이 책이 되어도 되고, 책이 공연으로 되어도 된다는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 계속 그 말을 생각하며 일을 진행하다 보니까 뭔가 같이 이뤄지는 지점들이 생기고 저도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고 그렇더라고요. 제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공연의 경우에는 끝나면 잔상이 남잖아요. 그런데 책은 기록물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대개 잘못된 지점들이나 후회되는 지점들이 분명히 끝까지 남아요. 그런 지점들을 제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 요즘 고민하고 있어요. 앞으로 책이 어떻게 나올 것이다라는 말은 선뜻 못 드리겠지만, 8시간까지는 아니어도 저 역시 열심히 작업을 위해서 리허설을 하고 있어요. 양희 씨가 11월 말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책이 나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손옥주_공연학자 베를린 자유대학(FU)에서 연극학, 무용학 전공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한국연구재단의 박사후연구 지원을 받아 <무용 오리엔탈리즘: 근대 독일어권 무용계에 나타난 한국 재현>이라는 제목의 포스트닥터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세기 전환기의 한국과 독일의 공연예술사를 주로 연구해왔다. 학술 연구와 동시에 리서치 파트너와 드라마터그 등의 역할로 무용 현장에서의 활동도 이어나가고 있다. 이번 <더스크> 작업에서는 ‘보는 자’의 역할을 맡아 공연 전체에 대해 기록했다. ‘춤의 감수성과 문학적 상상력은 서로 맞닿아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춤을 닮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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