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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12.11 조회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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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SICW x 시리즈_글로 완성하는 안무] 감각을 언어화하는 방법

[2019SICW x 시리즈_글로 완성하는 안무]



2019 SICW x 시리즈 ‘글로 완성하는 안무’는 무대가 끝나면 사라지는 순간의 예술을 넘어 영원히 기록되는 안무를 위해, 움직임과 리듬을 글로 만드는 워크숍이다. 총 5일간, 다섯 가지 커리큘럼으로 진행된 본 워크숍의 기록을 웹진 <춤:in>을 통해 공유한다. 다섯 번째는 5일 차에 진행되었던 정용준 소설가의 ‘감각을 언어화하는 방법’이다.

[2019SICW x 시리즈_글로 완성하는 안무]
감각을 언어화하는 방법

허영균_공연예술출판사 1도씨 디렉터

ⓒ서지혜
언어는 뉘앙스이다. 내가 쓰는 문자와 그때의 내 표정 사이의 괴리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언어 그 자체로서는 내 것이 아니며, 언어란 감각을 언어화하는 동안 (언어화)되는 것이다. ‘2019SICW x 시리즈_글로 완성하는 안무’ 마지막 시간, 정용준 소설가와 함께 감각과 언어를 키워드로 글쓰기라는 표현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무용을 배경을 두고 실천할 수 있는 글쓰기의 방향을 탐색하는 대신, 예술가 자신이 느끼는 고유 감각을 설득할 수 있는 언어,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바꿔야 하는 이유와 그 과정에 관해 다루었다.
정용준: 안녕하세요. 소설가 정용준입니다. 전에도 의뢰를 받아 ‘차세대 안무가를 위한 글쓰기’ 강의를 한 적이 있고, 2~3년 전쯤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진행했던 ‘춤이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 드라마투르그를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왜 나에게 이런 역할, 강의를 맡기실까?” 생각합니다. 대부분 자기 세계에만 살기 때문에 다른 세계를 잘 모르잖아요. 저 또한 몸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왜 언어가 필요한지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설명하는 방법으로서 춤이나 몸이 매우 직관적이란 생각을 해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그간 경험을 통해 발견한 춤에서의 언어가 필요한 이유, 그리고 필요한 방향에 관해서 이야기 나눠볼까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감각과 언어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감각에 대하여

감각 = 감성 + 각성 (깨달음)

감각을 분리하면 감성과 각성으로 나뉩니다. 각성은 다시 말해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 깨달음은 구체적인 앎의 형태는 아닙니다. 앎의 대부분은 내 안에 확신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앎은 설명되지 않은 것, 정체가 불명확한 것입니다. 창작자는 어떤 단계를 넘어가면서 ‘앎’을 공유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대부분 부정당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 우리는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 쉽게 포기해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앎’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상대방을 바보 멍청이로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글쓰기의 세계에서 ‘감각’은 모티프(Motif)라고도 합니다. 예술의 영역에서는 ‘영감’이라 표현하는 것 같은데요. 영감은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어떤 사람은 그걸 이용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영감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대충 넘겨버리는 것은 나 스스로가 이 감각을 일반화시키는 것입니다. 단순화하는 것이죠. 반대로 영감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쉽게 말하거나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하면 내가 느끼는 것이 ‘유니크(Unique)’해집니다. 유니크에는 고유함이라는 뜻이 있으니까요.

잘 아시겠지만, 카오스(Chaos)는 혼란하고 섞여 있는 것, 위아래가 없으며, 보이지 않고, 나도 모르겠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그것에 대해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감각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은 채로 언어화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과제인 셈이지요. 감각이라는 것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감각은 단순하지 않고, 공유하려는 순간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혼자만 느끼지 않으려고 할 때, 그때 예술을 하는 듯합니다. 자신이 매료된 것을 설명하려 할 때 어려워지는 것이죠. 우리가 겪은 사건들은 우리에게는 특별하지만, 감각을 제거하고 나면 그저 상투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감각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언어에 대하여

평론가 신형철이 ‘가장 잘 쓰는 방법은 정확하게 쓰는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그건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의 작가, 적확한 표현으로 사실주의 소설을 예술적인 수준을 높였다. 정확하게 사상을 표현하는 말은 하나라는 표현 일어설(一語說)이 유명하다.) 플로베르는 아주 괴팍한 성격인 것으로 유명했는데, 덩치도 무척 컸다고 해요. 그런 사람이 책상 밑에 웅크려 절망하고 있어 친구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단어를 찾고 있다.”라고 답한 뒤에 “그런데 그 단어가 세상에 없다.”라고 이어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뒤에 이어진 말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애쓰는 것조차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옷을 입지 않은 무언가입니다. 이것에 옷을 입히는 것이 언어고요. 언어는 그냥 시그널(Signal), 신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은 아니지만 고함치기 등도 메시지를 넣을 수 있으니 언어에 포함할 수 있겠지요. 이 모든 것들을 일단 언어라고 하겠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언어는 지시의 역할, 소통의 역할 등 기본적으로 도구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다음은 기록의 용도로 이용되었고요.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은 진술서를 쓰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진술서는 그 현장에 부재한 사람에게 그 사건을 설명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우리는 대부분 파토스(Pathos)에 호소합니다.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가 당선된 일화가 그러한 경향을 잘 보여줍니다. 당시 경쟁자에게 3:7 정도로 뒤지고 있던 케네디는 당시 처음 있었던 TV 공개토론회에서 멀끔하고 매력적인 이미지로 대역전극을 펼칩니다.

예술성이 강하고 자기의 자의적인 세계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이 파토스를 표현하는 상황에 피곤하고, 화가 나는 상황에 이를 수 있습니다. 언제나 파토스는 사회를 넘어섭니다.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파토스를 건드리는 모든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것이 곧 예술이었고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으면 단어가 없습니다. 세상에 색깔이 일곱 가지뿐이라면 디자이너들은 아마 미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궁금해하지 않고, 색깔이 일곱 가지뿐인 것에 반기를 들지도 않을 겁니다. 진술과 묘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재현의 영역이고 파토스, 감각을 표현해내는 것은 예술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표현에 대하여

표현력이란 무엇인가요? 얼마나 잘 표현되었나? 얼마나 잘 설명되었나? 를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확함이란 무엇일까요? 정확함이란 공감과 동감의 차원에서 타인도 참여할 수 있는 감각을 말합니다. ‘사고’라는 단어를 말로 표현해본다고 합시다. 사고를 표현하려면 내가 그 단어를 쓸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안다고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려면 정말 많은 단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극단적인 일반화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한때 ‘밤’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는 데에 집착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시인이 밤을 ‘광물’이라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광물은 저도 아는 단어지만,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는 단어였어요. 광물이라 표현한 밤을 생각하니, 내가 느꼈던 밤들이 광물처럼 펼쳐졌습니다. 결국, 작가의 표현은 그것을 읽는 독자가 알아서 연결하며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필사(筆寫)가 되어야 합니다.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언어로 베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의 문제지, 감각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상황이 중요합니다. 모든 의미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글쓰기의 기본은 우리가 함께 쓰고 있는 언어의 약속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것을 써서는 안 됩니다. 글이 어려울 때 주로 이렇게 표현하게 됩니다.

추상적이다/ 어렵다/ 복잡하다/ 시적이다/ 모호하다.

이것은 대체로 어렵다는 표현이기도 하고, 읽는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호한 것을 모호하게 쓰는 것은 좋으나, 그냥 모호하게 쓰는 것은 그냥 못 쓴 것입니다. 쓸데없이 안 읽히고, 어려운 단어를 쓴 것도 아닌데 이해가 되지 않죠. 모호하게 써버리고는 자신이 뜨거운 마음으로 예술적인 마음으로 썼다는 것에만 의의를 두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정말로 기계적인 영역입니다. 뜨거운 마음, 진지했단 마음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이 시대는 창작자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민원의 시대라고 생각하는데요. 전문성 없는 사람들이 전문성이 없다고, 전문가에게 화를 냅니다.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죠. 한쪽 마음으로는 그걸 알고 있어야 쓸데없이 자기 자신이 초라해지고 누추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힘을 내야 하니까요. ‘현대’라는 말이 붙으면 다 어려운 것 같습니다. 현대미술, 현대무용, 현대음악 등. 그 자체로 직관적으로 알 수 없고, 개념을 설명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매개해주는 사람 없이는 설명이 안 되는 영역, 현대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고립되는 것도 같습니다. 각각 다른 영역에 있는 여러분들이겠지만, 자기 자신을 잘 언어화하여 자기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의.정용준 소설가

정용준_소설가 정용준은 200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단편소설 〈굿나잇, 오블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단편소설 〈떠떠떠, 떠〉로 2011년 제2회 젊은작가상 본상에, 단편소설 〈가나〉로 2011년 제1회 웹진 문지문학상 이달의 소설에 선정되었다. 2011년(제2회), 2013년(제4회), 2016년( 제7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제5회 소나기마을문학상, 제16회 황순원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허영균_1도씨 디렉터 허영균은 문학과 공연예술학을 전공했다. 공연예술작가로 활동하면서 1도씨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운영 중이다.

서지혜_일러스트레이터 서지혜는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였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거나 작은 인형들을 만들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다.

정용준_소설가 정용준은 200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단편소설 〈굿나잇, 오블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단편소설 〈떠떠떠, 떠〉로 2011년 제2회 젊은작가상 본상에, 단편소설 〈가나〉로 2011년 제1회 웹진 문지문학상 이달의 소설에 선정되었다. 2011년(제2회), 2013년(제4회), 2016년( 제7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제5회 소나기마을문학상, 제16회 황순원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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