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은_안무가·무용수·예술가교사
춤인에서 청년무용가들의 삶과 예술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을 풀어 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드디어 무용계 내부에서도 무용과 학생들의 졸업 후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기쁨과 함께 부담감이 앞섰습니다. 편집부에서도 거듭 이야기 했듯이, 제 이야기가 많은 무용과 출신 중 한 명의 사례가 될 뿐, 일반화 되거나, 대표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어요. 제가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무용과 출신 여러분께 연대감을 호소하는 것이지, 그것이 마치 ‘무용과가 다 저렇다더라.’ ‘무용과 나오면 다 저렇게 살아야한다더라’식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을 본론에 앞서 말하고 싶습니다.
대학에서 무용을 한다는 것
대부분의 무용과 전공생들이 그렇듯 나도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시작했다. 9살 때부터 한국무용과 발레를 취미처럼 하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너는 발등에 고가 나왔으니’ 발레를 하라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왠지 나만이 가진 특권인 것 같아 흔쾌히 발레를 전공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는 발레에 완전히 미쳐서 무용학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맨날 학교를 빠지고 콩쿨이란 콩쿨은 다 나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가 내 전성기였던 것 같다. (전성기는 이미 중학교 때, 다신 돌아오지 않겠지)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예고에 진학하고, 대학 무용과에 들어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모든 내적 갈등과 무용계의 온갖 정치적 문제들은 아마 여기, ‘대학 무용과’에서 시작될 것이다. 여러 문제 중에 가장 부대끼는 부분을 꼽자면, 무용을 한다는 것과 대학 무용과에 다닌다는 것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는 것.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대학에서는 무용을 하는 게 아니라 ‘대학무용’을 해야 된다는 얘기다. 그 대학 교수님이 쌓아온 무용이 곧 그 대학 무용의 기조가 되고, 무용이 나를 표현하는 예술이니 하는 것은 무용과 학생이라면 잠시 넣어둬야 한다.
물론 나같이 복 받은 경우도 있는데, 우리 대학 교수님 중에 이른바 ‘선교발레’를 하시는 분이 있었다. 학생이 기독교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1학년 때는 무조건 그 교수님의 ‘예수 나오는 작품’을 해야 했다. 기독교가 아닌 나는 연습 전 기도 때마다 뜬눈으로 멀뚱거렸고, 도대체 내가 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데, 이파리를 들고 환영해야하는 지 모르는 채로 힘든 연습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운도 좋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공연 일주일 전 뇌수막염에 걸리고, 교수님의 빨리 나으라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못(안)하게 된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그 예수 나오는 작품과 함께 교수님과도 멀어져 졸업할 때까지 거의 만날 일이 없이 지냈다. 그리고 또 발레과 교수님 중에 굉장히 특이한 분이 있었는데, 방학 때마다 온갖 특강을 열어주셨다. 발레 말고, 미국에서 컨템포러리 댄스나 소메틱스하는 안무가를 데려오고, 모던발레 특강도 엄청나게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발레 이외의 무용에도 눈을 뜨게 됐고, 단순한 ‘따라하기’가 아니라 무언가를 표현하는 하나의 예술로 무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부작용이었는지, 매 학기 열리는 창작발표회 때 나도 모르게 클래식 발레와는 거리가 먼 작품만 만들게 되는 거다. 발레과인데, 토슈즈 안 신고, 머리는 숏컷 치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나는 창작발표회 하는 재미로 학교 다닌다고 할 만큼 그런 순간들을 즐겼으나 막상 내가 그렇게 나오니 다른 교수님들은 ‘발레과면 발레를 해라’, ‘누구의 사주를 받았네’ 하며 크게 반발했다. 그리고 개방적이었던 그 교수님도 점점 다른 교수님들의 눈치를 본건지, 원래 ‘그 정도’까지는 용납이 안 됐던 건지, 클래식 발레에서 원하는 미의 기준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 때의 배신감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결론은 무용과를 다니면서 교수님들의 권위의식, 무용 장르간의 이해할 수 없는 경계심, 밥그릇 싸움으로 점철된 정치적 공작들이 난무하는 장면을 너무 많이 목격했고, ‘내가 속한 무용계가 이것 밖에 안 되는구나.’하는 자괴감만 가지고 졸업하게 됐다. 슬프게도 예술이라는 게 생각만큼 순수할 수 없다는 걸 대학에서 배웠다. 물론 선배, 동기, 후배들 중에는 대학에서 원하는 무용과 자신이 원하는 무용이 맞아떨어져서 그 안에서 잘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발레단 준비하느라고 다른 건 보지도 않고 연습만 죽어라하는 애들도 있었다. 어쩌면 나 같이 발레단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데 관심 많은 ‘프로불평러’들이나 이런 고민을 하고 다닌 걸 수도 있다.
그래도 내게 예술에 대한 어떤 이상이 있었나보다. 졸업하고 지긋지긋한 무용계를 떠날 수도 있었는데 그 와중에 ‘안무’를 해보겠다고 안무를 전공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창작하라고 만든 것 같진 않은 창작발표회에서 창작의 기쁨을 맛봤던 건지, 춤이 내 길인 것 같은 어떤 확신이 있었다. (할 줄 아는 게 이거 밖에 없기도 하고) 어쨌든 안무하면서 내가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애증의 발레를 형식적으로, 내용적으로 해체해보기도 하고, 무용이 뭔지, 춤은 어디서 발생하는지, 그런 고민들도 작업 안에 담기 시작했다. 그 때 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다. 작품을 만들면 그걸 보는 관객들이 피드백도 주고, 이런 세상이 있다니 놀라운 시간들이었다. 그 시기에는 학교 밖에서 무용수 활동도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 배운 게 많았다. 대학무용계를 벗어나니 오히려 무용의 신세계가 열렸던 것이다.
사회에서 무용을 한다는 것
그러던 중에 무용이고 뭐고 내가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냐 부터 고민해야하는 시기가 왔다. 바로 세월호 사고. 특히 그 해에 생애 처음으로 정부에서 주는 창작지원금을 받았는데, 최종 선정 발표가 난 날이 2014년 4월 16일 이었다. 선정되었다는 기쁨과 동시에 모든 게 무너졌고, 그 날 이후로 작품의 방향이 처음 심사 때와는 돌이킬 수 없이 바뀌어버렸다. 기본적으로 작업에 집중이 안 되고, 내 주변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 나라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SNS를 통해 올라오는 소식을 시시각각 팔로우 하며 눈물과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 작품이 산으로 갈 수밖에.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나도 내 작품이 그렇게 흘러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뭔가 더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하여튼 그렇게 처음과는 너무 많이 달라진 기획으로 결과 발표를 하려고 하니, 지원금 주는 기관과 관련 사람들로부터 외면의 시선이 느껴졌고,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가며 힘들게 작품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그런 내상을 입은 예술가가 나뿐이었을까. 다들 작업으로든 뭐로든 미친 듯이 돌파구를 찾으려고 헤맸던 게 생각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지원금 받아서 작업 하는 것’에 대한 회의도 커졌다. 지원금을 받는다는 것이 재정적으로는 안정되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은걸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구나, 꾸준히 내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한 거지 지원금 없으면 마치 작업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되겠다, 조급해하지 말자,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됐다.
그 후 나는 예술가로서든, 시민으로서든 더 이상 사회문제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난 해, 작업을 잠시 미뤄두고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 청년활동가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활동이 예술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기 보단 예술을 더 잘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좀 보고 싶었다. 예술계 밖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쩌면 너무 어렸을 때부터 예술교육을 받고, 예술계 안에만 있다 보니, 오히려 작업 안에 많은 걸 담아내지 못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거기서 활동하면서 내 또래 청년들이 뭘 하는지, 뭘 힘들어 하는지,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좀 포괄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시민사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눈을 떴다. 나중에 이런 경험이 소소하게 작업과 연결되기를 바라고 있다.
무용해서 먹고 산다는 것
자, 그럼 이제 먹고 사는 문제를 얘기해볼까. 무용과 나온 애들은 뭐해서 먹고 살까. 사실 이 문제는 아주 비관적이다. 예술을 전공했다는 것만으로 경제적 자립은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자괴감이 쏟아진다. 미리미리 먹고 살 걱정해서 무용 그만두고 회사 들어가거나, 무용학원 차린 애들이 현명하지 않나 싶다. 얼마 전에는 엄마랑 울면서 대화를 했다. 엄마는 내가 이렇게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될지 몰랐다고 했다. 교수님 밑에 있거나, 어디 강사를 하거나, 어디 무용단에 들어가서 월급 받으면서 살 줄 알았다고. 그러니 내가 이렇게 사는 거에 대해서 엄마한테도 적응할 시간을 달라고 호소하셨다. 사실 모두가 알지 않나. 무용 전공하는데 돈 많이 드는 거. 엄마는 그만큼 투자를 했다고 생각하셨을 텐데, 내가 바쁘게 뭘 하는 것 같으면서도 연 수입이 200도 안 되는 걸 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거다. 하여튼 엄마가 먼저 그런 말을 꺼내니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어쩔 수 없는 지금 상황에 화가 나기도 하고, 엄마가 그래도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는 생각에 고맙기도 했다. 내가 만약 대학 무용과에 발붙이고 적응했다면, 교수님이 밥 먹여줬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미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이 글을 쓰면서 그 강폭은 한층 더 넓어진 것 같다) 나는 계속해서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올해는 운 좋게 서울문화재단에서 지원하는 Teaching Artist(TA/예술가교사)로 활동하게 됐다. 예술 교육을 시작하니까 차원이 다른 돈을 벌게 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작업해서 일 년 동안 벌 돈을 한 달 안에 다 벌었다. 세상에.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을 하니까 돈이 된다. 내 생애 언제 이렇게 사치를 부리나 싶을 정도로 뭔가를 엄청 사고, 소비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아, 자본주의 한국에서는 이렇게 사는 게 정상이구나. 자본주의 좋아. 문득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솔직히 교육하면 작업하기 힘들어지는 거 해본 사람은 알거다. 작업하고 싶어서 돈 버는 건데 정작 돈 버느라고 작업을 못한다.사실 TA의 취지가 현역 예술가가 예술교육을 하면서 자기 작업도 이어나가는, 교육과 작업이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그런 건데, 솔직히 하루에 50명의 청소년을 상대하는 데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내 작업에 영감을 얻고싶다는 참여동기는 어느새 희미해지고 그 친구들에게 사랑을 쏟기에 바쁘게 된다. 이에 교육과 작업의 접점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예술교육의 다른 방식 또는 내 작업을 위한 다른 방법을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 해 사업 끝나면 TA활동과 예술가의 예술 교육에 대해 다른 분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정리해서 말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내 주변에 작업하는 사람들 보면 진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학원에서, 문화센타에서, 학교에서, 어디 기관에서, 서울에서, 지방에서, 입시무용부터 요가, 커뮤니티 댄스, 심지어 전혀 상관없는 전화상담원이나 옷가게 점원도 한다. 정말 안하는 게 없다. 닥치는 대로 한다는 게 맞는 표현일 거다. 생활을 해야 하니까. 물론 간혹 작업해서 돈 버는 사람들도 있다. ‘대학무용’과 자신이 하는 무용이 잘 맞아떨어진 사람들도 있던 것처럼, 돈을 벌 수 있는 무용과 자신이 하는 무용이 잘 맞아떨어진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처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단연 많을뿐더러 예술은 하나를 향해서 가는 게 아니라 각자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 우리의 고달픈 삶을 숙명처럼 받아드려야 하는 건가. 이 문어발식 생활을 그저 인정하고 애써 긍정할 수밖에 없는가.
내가 여기서 이렇다 할 해결책을 제시 할 순 없지만 한 가지 짚고 싶은 건, 사회가 우리에게 ‘정상 범주’에 들기를 너무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처럼 ‘정상 범주’의 학교에 들어갔다가도 튕겨져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 건데, 그 것은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 많은 청년들이 그런 위치이고, 예술가도 그런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의 생계문제에 대한 접근은 결국 예술가의 작업을 하나의 노동으로 인정하고 하나의 직업군을 가진 시민으로 보는 ‘인식 개선’이 먼저다. 그랬을 때, 예술가에게 적선한다는 식의 얄팍한 복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소위 정치하는 ‘윗사람’들은 정말 모른다. 그러니 그 때 그 때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 것 부터가 시작이다.
또 하나, 내 경험에서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서로의 동료를 져버리지 말자’는 것이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미미하지만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당최 믿을 사람이 없다가도, 그나마 의지 할 수 있는 건 동료뿐 이라는 걸 이 세계에 있으면서 점점 알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도움이 되는 구조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한다. 우리 예술 조금만 하다가 끝낼 거 아니지 않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같이 오래 예술 하자. 그 것 뿐이다.
윤상은_안무가·무용수·예술가교사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철학 부전공), 한국예술종합학교 창작과 전문사를 졸업하였다. 2014년 문래예술공장 MAP <코펠리아- 입을 다문 존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2016년 재주도좋아 레지던시 <흘러나온 알갱이>를 안무하였으며, 노경애, 최은진 등 다양한 안무가들의 작업에서 무용수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동료 무용가들의 작업과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는 블로그 ‘떵샤의 Modern Dance’(blog.naver.com/yse216)를 운영하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고 있다. 그 외 경기도 고양시에서 ‘고양청년네트워크파티' 활동과 청년 여성주의 공동체 ‘고양페미’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