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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20.05.18 조회 1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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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유 × 김혜라 대담

춤을 매개로 사람을 치유하며 살고 싶어요

춤을 매개로 사람을 치유하며 살고 싶어요

웹진 <춤:in> 편집부

일시: 2020년 4월 21일 오후 5시
참석자: 미나유(무용가), 김혜라(모더레이터, 무용평론가)

미나유 선생의 춤을 향한 열정은 창작품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교육 현장에서도 빛난다. 예술적 신념과 일상에서의 삶이 다르지 않기에, 많은 후배들의 멘토가 되고 있는 미나유 무용가와의 대담을 통해 육십여 년간 걸어온 춤 길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나누고자 한다.
왼쪽부터 미나유, 김혜라 ⓒ이민희
김혜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위기상황이지만 예술가들은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들이 매체를 통해 전해지고 있어요. 선생님은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미나유: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얼마 전에 취소가 결정되었지만, LDP무용단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고 연습도 정말 즐겁게 했어요. 서울탄츠스테이션에서 수업도 계속하고 있어요. 3월에 즉흥 움직임 클래스를 처음으로 열었는데, 젊은 친구들이 요즘 갈 곳이 없었는지 43명이나 온 거예요. 그런데 코로나19가 유행하고 있는 시점이니, 서로 접촉하고 비비면 안 되니까, 서로 피하며 움직이자는 컨셉을 순간적으로 만들어서 진행했어요. 그때 와주었던 친구들이 좋은 댄서들이어서 즐겁게 잘 마무리했죠. 그 이후부터는 2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고, 선생님과 학생 모두 마스크를 쓴 채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그렇게 평소처럼 지냈던 것 같아요.

아, 코로나19로 인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운동센터가 문을 닫아서 운동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운동센터를 갈 수 없으니까 집 주변에 이 골목, 저 골목을 산책하게 되었어요. 제가 평소에 가지 않던 새로운 곳을 가보기도 하고, 그렇게 걸으면서 사람 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재미있어요. 많이 배우고 깨닫기도 하고요. 그리고 느꼈죠. 주변이 온통 스승이구나. (웃음)
김혜라: 작년 <구토>에 이어 최근 선보인 <바디락>까지 “인간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작품들이 울림이 있었어요. 제가 30년 넘게 선생님을 지켜온 바로는 하루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것 같은데, 70대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일상을 지내는 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미나유: 올해 2월에 <바디락(Body Rock)>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어요. 그 공연이 끝나자마자 급격하게 코로나19가 심각해져서 열 시간만 늦게 공연했어도 공연을 하지 못할 뻔했죠. 정말 다행이었어요. 그런 행운을 맛보니까 앞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웃음) 그 작품이 끝난 이후부터는 LDP 무용단 2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5월 초부터 열흘 동안 하는데, 처음 이틀은 제 작품과 전미숙 선생님 작품을 하기로 했어요. LDP 무용단에서 신작을 부탁하긴 했지만 지금 LDP에서 활동하는 무용수 친구들을 잘 모르니까, 옛 제자들과 15년 전에 했던 작품인 <포트레이트(Portrait)>를 다시 해보기로 했어요. 요즘 친구들은 서른 살만 되어도 무용수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작품은 40대 또는 50대인, 지금은 스승이 된 제자들이 무용수로 함께하는 작품이니까 무용계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까 기대돼요. 그래서 요즘 15년 전에 학생이었던 제자들과 연습하고 있는데, 정말 흥미로워요. 확실히 많이 바뀌었고 잘하더라고요. 제가 잘 가르쳤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요. (웃음)
미나유 ⓒ이민희
무용과 1기생, 해외 무대에 진출하다
김혜라: 시간을 거슬러 가볼까요. 선생님이 춤(무용)을 시작한 계기와 이화여대 무용과 1기생으로서 그 당시에 쉽지 않았던 유학의 길을 간 이유도 듣고 싶어요. 그때의 춤계 분위기도 궁금하고요.
미나유: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시작했던 언니의 영향을 받아 무용을 일찍 접했어요. 언니가 입었던 무용 타이즈의 무릎이 나와서 버려지면 그걸 제가 다시 입어보기도 했죠. 그리고 그 당시에는 현대무용이 없었던 시절이라, 한국춤부터 시작했어요. 한국춤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때 마침 김백봉 선생님이 부산에 와 계셨기도 했고 춤을 추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한국춤이 재미없어졌어요. 한 번 배우고 나니, 매번 같은 순서로 똑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하는 게 너무 싫더라고요. 그래서 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그 당시에는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게 힘들었어요. 대사관에서 어떤 사람과 인터뷰를 하느냐에 따라 비자를 받을 수 있을지 말지가 결정되었죠. 첫 번째 인터뷰에서 떨어지고 다음 해가 되었는데 그때 얼마나 비장했냐면, 대사관 면접을 앞두고 수면제를 70개 정도 모으기 시작했어요. 이번에도 떨어지면 정말 죽으려고. 그 정도로 꼭 뉴욕에 가고 싶었어요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아무래도 대학이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어요.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대학에 무용과가 따로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무용과가 생기더라고요. 처음 생긴 무용과이니까 수업은 전공 구분 없이 다 함께 이루어졌죠, 그래서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게 매우 힘들었어요. 많이 방황하고 떠돌았죠, 그런데도 대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일 때 동아콩쿠르에서 무당춤으로 금상을 받았잖아요. (웃음) 그래도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무용을 배웠던 게 미국에서도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김백봉 선생님께서는 발레를 가르치실 때도 하나의 동작을 100번, 100번이 되면 500번, 500번이 되면 1000번 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1000번을 채우곤 했거든요. 그래서 언니가 미련하다고, 1000번 하라고 해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웃음) 그것 때문인지 다리가 굵고 근육이 많아요. 미국에서 무용단 생활을 할 때는 그런 제 다리가 너무 싫어서 원망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그게 그곳에서 살고 작업하며 버티는 데에 원동력이 되더라고요. 저보고 미스 발란스(Miss Balance)라고 하기도 했어요. 일단 한 번 올라가면 쟤는 안 내려간다고. (웃음)
김혜라: 재미있는 에피소드네요. 선생님께서 해외 활동을 했던 시기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해외에서 몇 년간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미나유: 먼저 미국으로 유학 가서 뉴욕에서 15년 정도 무용수로 활동했어요. 미국으로 가자마자 엄청난 기회가 저에게 찾아왔어요. 안무가인 엘리오 포마레(Eleo Pomare)의 작품 <레디 맥배스(Ready Macbeth)>의 맥배스 역으로 발탁이 된 거죠, 그 공연으로 뉴욕타임즈의 페이지 절반이 제 사진으로 도배되기도 했어요. 그리고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무용단에도 잠깐 있었는데 거기서는 오래 있진 못했어요. 왜냐면 그레이엄 무용단의 경우,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 항상 그 신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눈썹을 진하게 붙여야 하고 머리도 붙이고 화장도 진하게 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한국무용이 싫었던 건데. (웃음) 심지어 미국이라고 해도 규모가 큰 무용단은 선후배 관계가 견고한 편이라, 똑같이 공연했고 똑같이 피곤한데도 후배들은 선배한테 마사지해주고 커피 가져다줘야 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것까지 하라고 하니까 저는 그냥 가만히 있었죠. 그래서 선배들이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선생님은 저를 좋아했어요. 왜냐면 컨트랙션(Contraction)이, 앞의 배꼽이 등 뒤에 붙을 정도로 얇았거든요. 그래서 그걸 보러 오는 관객도 많았죠. 그레이엄 무용단이 등을 많이 봤는데 저랑 잘 맞았던 거죠.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했던 처음 10년은 정말 좋았는데, 10년이 지나고 나니까 회의감이 들었어요. 다른 친구들의 발레 테크닉이 너무 좋으니까, 그 친구를 따라잡으려면 발레 전공이 아닌데도 끊임없이 제 한계에 도전해야 했거든요. 어떤 친구가 100번 하면 저는 101번 해야 하고, 제가 101번 하면 다른 사람은 102번 하고. 무용의 정글과도 같은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산다면 과연 어떻게 될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고민되어 미국을 떠나게 됐어요. 미국 다음으로 간 곳은 유럽이었는데, 거기서도 15년 정도 있었던 것 같네요. 어떤 이들은 그동안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왜 한국에 소식을 알리지 않았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왜 알려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무용수가 공연하러 어디든 갈 수 있는 거죠. (웃음)
김혜라: 뉴욕에서 여러 단체를 거치시면서 회의감이 드셨을 것 같아요. 그때 한창 미국이 춤의 도시였죠. 미국 다음으로 가신 유럽은 어떻게 가시게 된 건가요?
미나유: 뮌헨(Munchen)에 있는 안무가 두 명이 미국에 왔는데, 무용수 한 명을 찾더라고요. 마크 데이비스(Mark Davis)라고 미국의 스타인 친구가 함께 오디션을 봤는데, 한 안무가는 마크를 원했고 다른 안무가는 저를 원했어요. 그런데 한 명만 데리고 가야 하니까, 제가 마음에 든 안무가가 조용히 오더니 다른 안무가의 마음에 들려면 이런 동작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더라고요. (웃음) 그러다가 나중에는 두 명 모두 데려가기로 결정되어 유럽으로 가게 됐어요.
김혜라: 그렇게 무용단에 합격하면, 어느 정도 생활할 수 있을 만큼 계약 기간에 맞는 계약금이 제공되나요?
미나유: 그렇죠. 스위스 무용단 같은 경우는 1년을 계약하면 1년 동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아침부터 퇴근할 때까지 직장처럼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생활 보장은 되지만 직장인도 아니고. (웃음) 그래서 진정한 아티스트는 프리랜서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프리랜서는 당장 내일 어떻게 먹고살지를 고민해야 하니까. 그와 달리 어떠한 단체에 소속된 사람은 정해진 루틴대로 살면 되니까 무언가를 따로 생각할 필요가 없죠.
왼쪽부터 미나유, 김혜라 ⓒ이민희
가능성을 열어주는 교육자
김혜라: 그렇게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하시다가 1990년대 중반 한국예술종합학교 실기과 교수로 한국에 돌아오셨어요. 선생님께서 한예종에 부임하실 당시에는 대학별로 개성이 뚜렷하여 댄서도 대학 단체의 스타일에 맞게 준비된 학생을 뽑는 경향이 있었어요. 반면 선생님께서는 잘 갖춰진 학생보다도 해외에서 쌓은 경험과 안목으로 학생들을 뽑고 키워내신 것 같아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보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미나유: 저는 자신만의 분위기와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개성이 정말 중요하죠. 아무것도 없는 인형 같은 친구면 아무 필요가 없어요.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학생이 이인승인데, 춤을 못 추는데도 분위기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 분위기가 흥미로워서 그 친구를 뽑고 싶었죠. 그때는 클래스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점수를 줬는데, 그 친구를 뽑고 싶은데 너무 못하니까 그 친구의 다리를 억지로 찢으면서 “이 사람 이렇게 잘 드는데 왜 못하니?”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그렇게 이인승을 뽑았죠. 전한성이라는 친구는 왜 뽑았냐면, 그 친구가 고3일 때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너무 느낌이 좋더라고요. 굉장히 도시적인데 그 안에 그늘이 있었어요. 그 그늘이 너무 흥미로워서 뽑았죠. 이인수 같은 친구는 정말 신기한 친구예요. 맨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고, 힙합을 해서 그런지 음악적인 감각이 뛰어나죠.

이렇게 재능 있는 친구들은 졸업하고 빨리 해외로 진출했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아요. 그래서 무용계의 세대가 교체되고 새로운 무용단이 등장할 기회가 별로 없는 거죠. 막상 졸업하면 예술고등학교 선생님 등 안정적인 직업에의 기회가 생기잖아요. 그러니 일찍 자리를 잡으려고만 하죠. 또 유학을 다녀온 사람 중에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해외로 나가지 않으려고 해요. 예전에는 해외 무용단에서 활동했다고 하면 정말 좋았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리고 은근히 한국에 기금을 받을 기회가 많아요. 그런 기금에 의존하면서 어떻게든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다 보니 새롭게 발전하려는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죠.
김혜라: 선생님께서는 많은 제자들이 국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진로를 열어주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선생님과 만난 제자들은 복 받은 세대라는 생각이 드네요. 나아가 한예종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LDP무용단을 설립할 수 있게 도우시기도 했어요.
미나유: 제가 이름을 지었죠. 진짜 금방 지었는데. (웃음) 한예종 친구들이 좋은 댄서이다 보니, 학교를 졸업하면 선배나 선생님이 불러서 쓰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 제안을 거절하는 게 힘들거든요. 그래서 LDP무용단을 만들자고 한 거죠. 타당한 이유로 거절을 할 수 있게끔 시스템을 만들어주려고. (웃음) 사실 LDP 무용단이 만들어지기까지 제가 도운 게 없어요. 알아서 잘했죠. 절대 관여하지 않기로 하고 학생들에게 온전히 맡겨 두었는데, 첫해, 둘째 해가 지나더니 스스로 자리를 잡더라고요. 최근 LDP무용단에서 공연을 준비하다 보니 그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가 많았어요. 그런데 젊은 친구들이 정말 열심히 살더라고요. 무용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친구는 이른 새벽 또는 밤에 직접 청소를 한대요. 그래서인지 거긴 항상 깨끗해요. 이렇게 젊은 친구들의 성실함과 삶을 대하는 진지한 모습을 알게 되니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그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이해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죠.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김혜라: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은퇴하신 이후, 더욱 활발하고 자유롭게 사시는 듯 보이는데요.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춤 연습과 가르침을 서울탄츠스테이션으로 옮겨 비전공자까지 품으며 교류하고 계세요. 서울탄츠스테이션에서는 무엇을 기대하며 가르치고 계시나요?
미나유: 지금까지 평생 무용 전공자들 사이에서 살아왔으니 처음에는 비전공자가 흥미로웠죠. 그런데 기본이 안 되면 오래 버티진 못하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몇 명을 만났어요.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무용이 너무 좋다며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길래 작품을 함께했던 적이 있었는데, 함께하는 전문 무용수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주눅이 들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니까 현실을 보면서, 자신이 못한다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친구도 보았고요. 물론 저도 그 친구의 부족한 점을 알고 있기에 거짓말을 해줄 수는 없는데, 충분한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는 만큼 작은 꿈을 가지고 있는 게 안타까웠어요. 그리고 그 친구가 춘천에 사는데 병원에서 새벽 5시부터 8시까지 일을 해요. 그럼 새벽 4시에는 일어난다는 건데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제가 그 친구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려고 해보니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 친구가 제 선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수업에 가기 싫을 때마다 그 친구는 새벽 일찍부터 일을 하고 수업을 들으러 오는데 내가 안 갈 수 있나 생각하면서 가곤 했죠. 그렇게 일 년을 버텼어요. (웃음) 그래서 한 번은, 스승의 날에 여기에 내 스승이 있다며 그 친구를 이야기했어요. 스승의 날 선물로 없는 돈을 모아 비엔나 페스티벌에 보내주기도 했죠. 앞으로도 그 친구가 꿈을 크게 펼쳐나갔으면 좋겠어요.
미나유 ⓒ이민희
지금 시선이 머무는 곳
김혜라: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딱 맞네요. 컨템포러리 예술가는 끊임없이 ‘오늘’의 삶을 고민하고, 발을 내딛는 실천적 행위가 수반될 때 작업에서 예술적 향기가 배어나는 것 같아요. 그런 지점에서 미나유 선생님은 가장 컨템포러리한 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의 현재 관심사가 듣고 싶어요.
미나유: 시드니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호주에 갔던 적이 있어요. 그때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숲길이었는데, 정말 나무가 많고 새소리가 가득하더라고요. 우리나라의 새들은 울지도 않고 조용한데, 시드니의 새들은 막 시끄럽게 울어요. 살면서 새가 무섭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게 너무 무서워서 공연도 못 보러 다닐 지경이었죠. (웃음) 우리나라랑 다르게 새도 많고. 우리나라는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참새를 구워 먹었을 정도로 참새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참새가 없잖아요. 그리고 왜 우리나라의 새들은 울지 않게 되었는지가 궁금하고 흥미로워요. 같은 새인데도 나라마다 새소리가 다른 것도 재미있고요. 그래서 이번에 LDP무용단 작품을 준비하면서 무용수들에게 새들이 왜 울지 않게 되었는지에 대해 고민해보자고 했어요. 코로나19가 확산된 이후로 세계의 유명 도시에서 짐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잖아요. 생각해보면 짐승들도 다닐 수 있는 거리인데 사람들 때문에 못 다녔을 뿐이에요. 코로나 전에는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질 않았는데 코로나가 저를 바뀌게 했죠.
김혜라: 최근 한국의 창작 경향이 예전보다는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어요. 특히 젊은 창작자들에게서 안무의 개념이나 움직임을 재정립하는 다원적인(퍼포먼스) 작업이 많이 등장하고 있어요.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작업을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미나유: 저는 다원적인 작업이 재미없어요. 달이 하나이고 손가락은 다섯 개인데, 굳이 하나 더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쓸데없는 거지. 그리고 항상 새롭고 세련된 것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 부르짖는 사람이 오히려 더 감각적이지 않더라고요.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자신이 움직이는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작품에는 이유가 없어요. 예를 들어, 두 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고 가정해 보면, A 무용수가 B 무용수를 바라보고 B 무용수는 A 무용수를 바라보아야 움직일 이유가 생기는 거죠. 서로 느끼지 않고 움직이는 건 말이 안 돼요. 머리로만 계산해서 움직이는 건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거예요.
김혜라: 맞아요. 요즘 제가 느끼는 것은, 공연이 많은 것에 비하여 작품의 결들이 비슷하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국내외 무용수로 몇 년 활동하다가 안무가 또는 교수가 되는 것이 정석처럼 여겨지잖아요. 또 중년 세대 때와는 달리 젊은 세대들은 기금에 의존하여 기금 맞춤형으로 공연 제작도 하고요. 많은 사람이 어느 정도 정형화된 패턴을 향해 살아가서 그런지 작품에서 보이는 성향과 지향성이 비슷해요. 안정적인 길이 최고라고 여겨지는 이 사회에서 예술가도 똑같은 길을 가려고 하니 틀 밖에서의 시선이 드러나는 작품이 많지 않은 것 같네요.
미나유: 안정적인 길을 추구하는 게 오늘날의 구조라고 하지만, 그런데도 이탈하는 누군가는 있어야죠.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기금을 주는 심사위원도 춤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무용은 무용한테 맡겨야 하는 거예요. 무용을 너무 사랑해서 매일같이 보러 다니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심사위원의 60%라도 그런 사람들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용 공연의 관중도 마찬가지예요. 무용 공연의 관중 대부분이 무용과 관련된 사람인데, 무용과 관련된 사람이 60%이고 그 외는 다양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외국에 가면 제일 부러운 게 관중이잖아요. 저는 서울탄츠스테이션에게 그런 걸 원하고 있어요. 다양한 관중. 서울탄츠스테이션에는 무용 전공생들만 있는 게 아니라 무용을 사랑하는 비전공생도 많으니까요. 다행히 서울탄츠스테이션은 그 취지를 유지하며 10년 동안 잘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돈 문제에서 자유롭지만은 않죠. 누구든 돈 없이는 살 수 없으니까. 그런데 살아가면서 제일 먼저 추구하는 것이 돈이 되어서는 안 돼요. 첫 번째는 무조건 자신이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이어야 하죠. 저는 지금도 움직이는 게 너무 좋아서 매일 아침이 빨리 왔으면 좋겠거든요. 이렇게 미치도록 좋아하다 보니까 계속하게 되고, 계속하다 보니까 하는 것에 자유로워져요.
김혜라: 선생님께서 지금껏 살아오시면서 제일 잘한 게 있다면, 멈추지 않고 가장 좋아하는 걸 추구하셨던 거네요. (웃음)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미치도록 좋아하는 걸 발견하지 못하거든요. 미치게 좋아하는 걸 발견했어도 그걸로 돈까지 버는 건 정말 쉽지 않죠. 자신의 삶을 대하는 방식 외에도, 선생님의 라이프스타일은 국보급인 것 같아요. 그 흔한 휴대폰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고 최소한의 식사로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이 평범하지는 않으신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미나유: 맞아요. 휴대폰도 없고 거의 먹질 않죠. 저는 이렇게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가지고 살고 싶어요. 지금 입고 있는 바지는 스승의 날에 제자가 선물해준 건데, 횟수로 20년이 되었어요. 그리고 이 티셔츠는 모다페(MODAFE)에 갔더니 공짜로 준 티셔츠. 평소에도 여기에 배낭만 메고 다녀요. (웃음) 이렇게 옷도 구제인 것이 좋고 저렴한 게 좋아요. 그리고 저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참을 수 없어요. 형제들이 권하길래 외국에서 무용단 활동을 오래 하면서 벌었던 돈으로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하나 샀는데, 막상 사고 보니 미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아파트를 팔려고 부동산에 내놓으니까, 또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고 절차가 복잡하길래 그냥 조카한테 줘버렸어요. 이 기회를 통해서 조카한테 고맙다고 전하고 싶어요, 버린 걸 주워줘서 감사하다고, 정말 후련하더라고요. 이제는 정말 제 이름으로 된 게 거의 없어요. 유일하게 있다면 카드 한 장? 제자들 오면 맛있는 거 사 줘야 하니까요. 사람 사는 데에 많은 게 필요하지 않죠. (웃음)
김혜라: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네요. (웃음) 선생님의 앞으로의 계획과 어떤 예술적 비전을 이루고 싶은지도 듣고 싶어요.
미나유: 요즘 흥미로운 것은 사람이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고민을 풀어주고 싶고 치유해주고 싶다는 게 앞으로의 계획이에요. 그리고 제가 가진 경험을 많은 이들에게 베풀고 싶죠. 그래서 올해부터는 프리랜서 안무가를 해보려 해요. 지금까지는 월급을 받는 단체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외부 단체의 힘겨움을 몰랐는데, 그들의 힘겨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작업을 통해 아파하는 사람을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 LDP무용단에서 작업하는 것도 그렇고, 올해 최명현 안무가와 하기로 한 8월 공연도 프리랜서 안무가로 참여하는 거죠. 아직은 그렇게 해본 적이 없어서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계속하다 보면 어떻게든 답을 얻게 되겠죠. 1~2년 해보다가 별로라며 그만둘 수도 있고. (웃음) 일단 올해는 분명하게 프리랜서 안무가가 되고 싶어요. 지금 가장 흥미로운 건 사람이니까, 선배로서 후배와 함께 이야기하면서 그들을 치유해주고 싶네요.
김혜라: 든든한 어른으로서 주변의 후배들을 도와주실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선생님이 살아오신 삶과 춤의 역사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의미 있는 대화였습니다. 긴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왼쪽부터 미나유, 김혜라 ⓒ이민희
정리. 웹진<춤:in> 에디터 이주연
미나유_무용가 미나유는 미국과 유럽각지의 유명무용단에서 객원안무가와 교육자로 활발히 활동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초대현대무용교수로 초청되어 실기학과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국민대학교 무용학부 겸임교수와 서울탄츠스테이션 Creative Adviser로 재직하며 공연활동과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김혜라_무용평론가 김혜라는 춤미학과 비평을 전공하였고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하였다.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이며 <춤웹진> 편집위원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문심의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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