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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20.03.17 조회 3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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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선미 좌담

진정한 춤꾼이 세상에 남긴 것

진정한 춤꾼이 세상에 남긴 것

웹진 <춤:in> 편집부

일시: 2020년 2월 24일 월요일 오전 10시
참석자: 김서령(독립 프로듀서), 문애령(춤평론가), 최지연(무용가)

웹진 〈춤:in〉의 대담은 중견 무용인의 춤과 예술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마련된 코너이다. 그 코너에서 만나고자 했던 무용가 김선미 선생이 지난 1월 21일 우리 곁을 떠났다. 창무회 중견으로서 평생 한국창작춤 활동에 매진해온 고인에 대해 오랜 기간 함께 작업해왔던 무용가·기획자와 작품을 지켜봐 온 평론가가 이야기를 나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故 김선미 ⓒ김선미
김서령: 독립 프로듀서 김서령입니다. 오늘은 〈춤:in〉의 무용인 시리즈-김선미 편에서 주인공 없이 이렇게 선생님의 춤세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공연기획을 시작했던 1999년부터 김선미 선생님의 작업을 함께 해왔고, 선생님의 춤을 좋아하는 팬이기도 합니다. 참석해주신 분들의 간단한 소개와 함께 이 자리를 여는 말씀을 부탁드릴게요.
문애령: 춤평론하는 문애령입니다. 원래 웹진 〈춤:in〉에서 김선미 선생님의 대담을 기획하고 있던 차에 김선미 선생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셨지요. 특별히 유명을 달리하셨다 하여 이런 자리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원래 훌륭한 무용인이셨기에 이렇게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인데요. 저로서는 어떤 안무가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작업을 맡긴다면 작업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참 많을 것 같아요. 그분의 예술세계가 일대기를 나눠서 정리할 만큼 깊이가 있었는가 라는 차원에서 볼 때 말이죠. 하지만 김선미 선생님은 한 명의 예술가로서, 차별성과 독창성의 면에서 일대기를 정리할 충분한 가치를 지닌 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서령: 문애령 선생님께서 오랫동안 김선미 선생님을 지켜보고 사랑하는 동료로서 함께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해주신 최지연 선생님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지연: 오늘 집에서 여기까지 올 때 언니가 옆에 있는 것 같았어요. 같이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어요. (자료를 들여다보며) 김선미 선생님의 공연실적에서 내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같이 했었는지 살펴봤는데 제가 다 있었더라고요. 오늘 이 자리는 무용인 김선미 선생님을 기리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한 것 같아요.
김서령: 최지연 선생님은 김선미 선생님 자리를 이어서 2013년부터 창무회 예술감독을 맡고 계시고요. 어릴 적부터 많은 작업을 같이 해 오셨던 걸로 압니다. 먼저 ‘인간 김선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지난 1월 21일 선생님께서 소천하셨고, 그 이전에 투병생활을 길게 하셨는데, 투병기간과 장례를 지켜보면서 선생님 주변에 사람이 참 많다고 생각했어요. 단지 무용인뿐만 아니라 음악인, 장르를 달리하는 예술인, 선생님의 춤을 사랑하는 팬 등 너무 많은 분들이 선생님의 쾌유를 빌었고 응원을 많이 했었어요. 그리고 떠나셨을 때엔 함께 울고 웃으면서 보내드리는 모습에 굉장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참석하신 분들께 인간 김선미에 대한 기억이 어떤지 여쭤보고 싶어요.
우리가 기억하는 김선미
왼쪽부터 최지연, 문애령, 김서령 ⓒKenn.김병구
문애령: 주관이 뚜렷하신 분이죠. 하지만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면서 변신할 줄 아는 예술가로, 범인(凡人)이 따라잡기 힘든 인간성의 능력을 갖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한국의 무용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성장한 분이기에 세계적인 추세의 창작성 면에서, 혹은 전통무용 쪽과 연관이 더 된 분이기에 현대무용, 발레 그 자체를 접하는 그런 안무가들과는 다른 특성이 있었어요. 다른 동료들처럼 영역의 특성을 이분도 갖고 계셨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2000년에 프랑스 리옹 댄스비엔날레에 가서 방을 같이 쓴 적이 있었어요. 나보다 늦게 잤다가 일찍 일어나고 아주 부지런한 사람이더군요. 그때 한국창작춤이 우리 것에 갇혀 세계화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않는 것에 대해 일침을 가하며 얘기를 건넨 적 있어요. “린 화이민(Lin Hwai-min)은 중국 무술 동작 타이치에 바흐 음악을 틀었다, 우리 스타일만 고집하면서 외국 사람들에게 좋아해 달라 할 수 있겠느냐, 린 화이민, 산카이 주쿠(山海塾)가 높이 평가받는 건 어느 정도 예술가로서의 타협점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냐”고 했었죠. 김선미 선생은 어떤 반응을 보인다기 보다는 가만히 경청해 주시더라고요. 마침내 김선미 선생님은 2009년에 〈볼레로(Bolero)〉를 만들어 보였어요. 혹시 그때 그 말을 기억하고 들어주셨나 싶어 굉장히 기뻤습니다. 이분은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만 그것이 자기한테 진심으로 공감이 생기면 반대의 의견도 충분히 수용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생각했어요.
김서령: 문애령 선생님의 조언이 김선미 선생님의 안무 방향에 큰 전환점을 주셨을 수도 있었겠네요.(웃음) 〈볼레로〉 이전에 2004년 〈나의 지고이네르바이젠(My Zigeunerwisen)〉부터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안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이후에 〈월광〉으로도 이어졌고요...작품에 대해서는 나눌 말씀이 많을 듯 하니 조금 뒤에 다시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최지연 선생님은 김선미 선생님과 춤 동료로서 오랜 시간 함께하셨는데요, 김선미 선생님과 얼마나 같이하신 거죠?
최지연: 제가 창무회에 입단했을 때 보다 더 먼저니까 35~6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김서령: 오랜 세월을 언니처럼 또 동생처럼 지내셨죠. 창무회는 워낙 연습을 많이 하는 그룹이기 때문에 어쩌면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지 않았나 싶은데, 김선미 선생님의 어떤 모습이 기억에 남나요?
최지연: 언니는 철저히 외로움을 즐기는 사람이었어요. 처음에 저한테 큰 인상을 줬던 것은 지금의 신촌역에 있었던 창무춤터에서 제가 신입 단원 인사를 하는 날이었어요. 그때 선배님 대표로 정훈희의 〈무인도〉를 불러줬어요. 그때 파마가 있는 단발머리였는데 노래도 너무 잘하고 멋있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고 나서 함께했던 첫 작업이 〈어우러기〉(1988)였어요. 그 작업의 동작을 미리 만들고 혼자 연습할 때 항상 저를 옆에 두고 하셨어요. 제가 막내라 그런지 붙박이처럼 옆에 늘 있게 하고, 음악을 틀게 했죠. 저는 선미 언니가 동작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고요. 연습이 끝나도 그림자처럼 저를 데리고 다녔어요. 시장갈 때도 저를 데리고 가고, 형부랑 데이트할 때도 저를 옆에 있게 하고 그랬죠. (웃음) 그런데 늘 혼자인 거예요. 그래서 철저히 외로운 이 작업을 혼자 꿋꿋이 즐기는구나, 부드러운데도 강함이 있구나 싶었어요. 그런 모습이 어릴 때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줬어요. 춤 스타일에 있어 새로운 장르를 만들고 정점을 찍은 작품으로 〈추다만 춤〉(1992)을 보면, 자신만의 독특하고 강렬한 힘과 에너지가 보이거든요. 그러한 작업이 탄생한 것은 오롯이 그분의 심지, 굳건한 외로움을 이겨내는 힘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김서령: 저도 비슷한 인상이었던 것 같아요. 말씀도 잘 안 하시고 낯도 많이 가리시고 누군가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 조용히 계셨고, 창무회 활동이나 예술감독 하실 때 보면 김매자 선생님이 답답해하실 정도로 앞에 나서지 않으셨죠. 늘 조용하지만 단단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인간적인 면모와 춤을 출 때도 단단하다는 게 떠올라요. 많은 기억이 있는데 안무가 김선미 또는 무용수 김선미에서 저는 무용가 김선미에 대한 인상이 강해요. 선생님께서 안무 작업을 많이 하셨고 좋은 작품도 많았지만, 그런데도 선생님이 춤추는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고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서 ‘무용가 김선미’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싶습니다. 선생님 예전 자료들을 보면 어릴 때부터 춤을 추셨잖아요. 리틀엔젤스 단원으로도 활동하신 걸로 알고 있고 어릴 때부터 전통춤을 추고 한국창작춤을 받아들이면서 많은 경험을 하셨어요. 무용가 김선미에 대한 기억을 이어서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문애령: 이 좌담을 하려고 창무회 25주년 책을 봤더니 제가 김선미 선생님이 춤을 춘 것을 보고 평을 쓴 것이 있더라고요. 저는 전혀 기억 못 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그때 호흡이 좋고,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썼더라고요. 저는 김선미 선생님이 춤을 잘 춘다고 생각 못했어요. 제가 창무회를 가까이에서 보긴 했지만 다 본 것은 아니었고, 마침 제가 볼 때 김선미 선생님이 공연에서 빠질 때도 많았고요. 김선미 선생님이 부각되는 무대를 많이 못 봤던 거죠. 심지어는 김선미가 무용을 못 했는데 갑자기 잘 해졌다고 썼더라고요(웃음). 그때는 창무회 단원들이 너무 훌륭해서 김선미를 부각시켜 볼 여력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김선미 선생의 〈승무〉를 보았는데, 보통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진짜 춤’을 추는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그 다음부터는 김선미 스타일의 춤을 발견하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창무회 작품 안에서도 ‘저 부분은 김선미가 안무한 것 같다. 저건 김선미 스타일이구나’를 가려내게 됐죠. 저는 김선미 스타일의 춤을 굉장히 좋아해요.
문애령 ⓒKenn.김병구
김서령: 김선미 선생님 춤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셨나요?
문애령: 굉장히 차가워요. 춤이 차가운데 따뜻해요. 필요 없이 겉으로 웃는다거나 인상을 쓰거나 춤을 장식하려 하지 않아요. 그래서 차가운 거예요. 그러면서 깊은 호흡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이 동작을 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감동적이죠. 몸, 그 자체로 춤을 춥니다. 과장 없는 외양은 차갑지만 춤 몸짓 안에는 정말 열정이 배어있어요. 김선미 선생님은 새로운 춤사위도 잘 만들어내요. 작은 움직임이지만 큰 충격을 줄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동작들을 보여줬어요. 김선미라는 사람은 사람의 몸을 움직여서 형상화하는 데 굉장히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안무력과 함께 몸에 담긴 춤의 표현성까지 매우 좋아하게 되었죠.
김서령: “차갑지만 뜨겁다.” 굉장히 인상적인 말씀인데요. 돌이켜보니 그 말이 이해돼요. 옆에서 선생님을 지켜보면 눈만 뜨면 춤추고 싶은 마음밖에 없으셨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습을 열심히 하셨어요. 김매자 선생님도 자주 그 말씀을 하셨거든요. “오늘 연습도 우리 둘이 했다”고요. 정해진 연습 시간에 충실하게 나오시고 전통부터 창작춤 기본, 연습으로 넘어가는 그 과정들을 단 한 순간도 허투루 하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차갑지만 뜨겁다는 것에서 ‘뜨겁다’는, 결국 선생님이 오랜 시간 연습실에서 스스로 담금질을 하면서 만든 시간을 다 덜어내고 정제된 것들이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춤사위가 가능해지고 그런 춤 스타일이 만들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최지연 선생님은 옆에서 같이 땀을 흘렸던 입장에서의 무용가 김선미 선생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 같아요.
최지연: ‘차갑지만 뜨겁다’처럼, ‘부드럽지만 단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땀 흘리는 돌〉(1997) 첫 작업을 할 때 무용수들에게 자신의 비석을 새겨보라고 주문했어요. 그때부터 김선미 선생님의 무언(無言)의 숙제들이 많이 와 닿았어요. 내 비명에는 과연 무엇이라 쓸지 고통하면서 거울을 보며 글을 새기는 듯한 느낌으로 춤을 만들었거든요. 그리고 겉으로 표정을 나타내지 않으시잖아요. 〈추다만 춤〉(1992)은 음악도 없어서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초를 세며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는 훈련을 했어요. 언니가 초시계를 재고 1분 될 때 손을 들라고 했죠. 그게 훈련이 되니깐 무용수들이 정확하게 자기 초에 움직임을 하기 시작했어요. 정확하게 말이죠. 음악은 나중에 ‘나의 살던 고향’을 무용수들이 직접 부른 것과 춤출 때의 호흡소리 그리고 발자국 소리들… 그렇게 음악은 현장에서의 몸의 소리뿐이었죠. 부르면서 석회 가루 위를 거닐게 했던 작업이 저한테 새로운 형태의 춤을 접하게끔 했어요. 안무에 대한 많은 경험을 주신 선배님들이 많은데 유독 김선미 선생님은 새로운 장르, 새로운 실험법들을 많이 경험하게 하셨어요. 특히나 창무회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메소드 중에 ‘몸본2’는 김선미 선생님이 무술에서 가지고 온 기본적인 춤사위를 가지고 엮어주었거든요. 이게 창무 기본 틀이 되었어요. 이런 업적이 너무나 감사하고 대단하죠.
안무가 김선미의 작품세계
최지연 ⓒKenn.김병구
김서령: 장례식장에서 선생님의 영상을 틀고 있었잖아요. 그러면서 선생님 작품을 다시 쭉 보면서 이전에 봤던 작품도 있고 그렇지 못했던 작품도 있었는데, 오셨던 많은 분과 이런 얘기를 했어요. “참 가볍다. 단순히 몸무게가 가벼워서가 아니라 저렇게 가볍게 추기 위해서 선생님은 얼마나 연습과 노력을 했고, 저 춤사위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그리고 이제 저 춤을 누가 출 수 있을까.” 저 춤을 다시 못 본다는 게 안타깝다는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최지연 선생님께서 무용수로서 만났던 김선미 선생님의 작품에 관해 열어주셨으니 작품 이야기로 이어가면 좋을 것 같아요. 안무가 김선미의 작품이 어떤 게 있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을 나눠보죠. 선생님께서 85년도에 안무자로 데뷔를 하셨더라고요. 스스로 인터뷰를 하실 때 본인이 안무가로서 주목을 받았던 작품으로 〈추다만 춤〉을 항상 이야기하셨어요. 이 작품에 최지연 선생님도 출연하셨네요. 혹시 초기 작품을 보셨는지요? 전 흑백 사진으로 처음 보고 놀랐어요. 시각적인 미장센이 충격이었는데요, 석회 가루와 깨어진 독, 그리고 석회 가루가 블랙 의상과 몸에 잔뜩 묻고 공중에 날리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어요.
문애령: 〈추다만 춤〉은 대표 작품으로 공연도 많이 했죠.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깊이 공감한 작품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그 안에서 고민했던 흔적들이 후에 〈볼레로〉 같은 작품으로 발전하여 완성되었다고 생각해요. 〈추다만 춤〉은 상념을 강조하는 작품이었어요. 움직임 없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가 많았죠. 저로서는 정지된 공연을 별로 안 좋아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힘들어요. 안무가들은 정지에 의미부여를 하고, 관객들에게 요구해요.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정지를 하니 나의 정지에 공감하시오’라고요. 때론 정지도 움직임의 일부겠지만, 무용가는 어떻게 해서든지 움직임을 통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항아리 깨는 장면을 매번 보면서 저 사람이 열정이 굉장히 많고 그 열정을 안에 억누르고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자기 침잠의 시간이 〈볼레로〉 같은 작품으로 표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지연: 〈추다만 춤〉 같은 경우에 여러 가지 상반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주위에서 석회가루가 몸에 쌓이면 배출이 되지 않아 굉장히 안 좋다고 얘기를 많이 했는데도 석회가루의 무게가 가지는 흩날림을 포기할 수 없어서 그 느낌 때문에 고집하셨죠. 공연이 거듭될수록 석회가루 위에서 춤을 출 때의 건강이 걱정됐고, 암전 상태에서 큰 항아리를 깰 때 괜찮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 해머로 깨는 소리가 너무 컸거든요. 그 이후에 〈숨결〉(1996)이라는 작품을 창무예술원 6층에서 연습할 때였어요. 옆에 계속 있었는데, 언니가 “다른 동선 안 쓰고 사선만 쓸 거야 여기서 숨이 느껴지는지 봐줘”라고 했어요. 작품을 만들 때 이렇게 하겠다는 생각이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번 이거라고 생각하면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는 고집스런 투지가 있으세요. 〈추다만 춤〉에 참여한 미술가도 안무자 김선미와 닮은 부분이 많았어요. 그분이 ‘미술의 죽음’이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김선미 선생님이 가서 보니 갤러리에 그림이 하나도 없어서 당황했었대요. 그리고 미술의 죽음이라는 작가의 강한 주관을 들었다고 해요. 그렇게 자기만의 철학으로 단단하게 밀고 나가는 힘이 있었죠.
김선미 〈달하〉 ⓒ김선미
김서령: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초기에 솔로 작품 위주로 만드셨지요. 제가 처음 보았던 선생님 작품은 ‘월영’ 시리즈 였어요. 〈천불탑 월영〉(1998)과 〈월영 일시무〉(1998)와 같은 작품들은 영상과 춤의 결합이 시작될 때 만들어졌던 작품이죠. 혹시 이 작품들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때부터 시작해서 최근작 ‘달하’ 시리즈(2016~2018) 까지도 ‘달’이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게 되는데요.
문애령: 많이 봤죠. 〈월영〉 작품들은 김선미 스타일의 평균치를 담고 있고, 김선미 선생님이 추구하는 정신세계가 반영된 작품이 아니었는가 생각해요. 김선미 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굉장히 미니멀하다는 거예요. 미니멀한 감각은 전통춤을 바탕으로 해서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기법이에요. 현대무용가 중에서도 자기에 대한 성찰이 있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지요. 저는 이게 김선미만의 현대성이자 독특한 개성이라고 생각했고 세련되게 느껴졌어요. 김선미 선생님은 한국춤에 근거한 자기만의 해석이 담긴 춤사위와 미니멀한 감각을 연결시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이뤄냈습니다. 다만 이분이 한국무용이라는 큰 틀 안에 있기에 기존의 안무 스타일과 어느 정도는 타협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그것 역시 세계적인 무대에서 보자면 김선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매우 훌륭한 안무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김서령: 저는 1990년~2000년 초반까지는 자료로, 또 관객으로서 객석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보아 왔었고, 기획자로서 선생님과 만난 건 2000년 작품 〈아우라지〉부터였어요. 이전 자료들을 봤을 때 선생님이 말씀하는 대로 미니멀한 감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근간은 한국춤, 본인 스스로 오랜 수련 기간을 통해서 자기의 스타일로 만들어낸 춤사위로 이루어지지 않았냐는 생각과 함께 굉장히 실험적인 도전정신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새로운 것에 두려움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작업을 조용히 하고 계신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우라지〉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되었었는데, 주로 대형작품이 올려지는 큰 극장에서 창무회 단원 10명으로 작품을 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걱정들이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 작품이 선생님께서 군무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큰 무대에서 했던 공연인데요. 그때의 기억을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최지연: 〈아우라지〉는 바라를 가지고 마지막에 달아오르듯이 끝나는데 연습할 때마다 숨이 차오르는 느낌이었죠. 긴 장대에 소금을 넣어 밑의 랩을 빼면 소금이 나오고, 밑바닥에 잉어 그림을 그리는 장면도 있어요. 아크릴 통에 파란 물을 담아서 머리도 감고, 동물의 형태를 가지고 춤을 춰보라고 하셔서, 제 옆에 항상 강아지가 있었기 때문에 강아지의 모습의 춤을 추면서 만들었고요.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김재철 선생님과의 만남이었어요. 그때부터 라이브 음악이 아주 독특하게 들어오면서 김선미 선생님께서 좋은 작업의 파트너들을 엮어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음악에는 김재철 선생님, 의상에는 한진국 선생님 등 좋은 파트너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죠.
김서령: 김선미 선생님은 호기심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하셨어요. 그런 것이 작품 안에 많이 녹았던 것 같아요. 그때 동작 중에 ‘일무’ 동작도 있었고 큰 세트는 아니어도 다양한 소품을 사용하면서 요소요소에 아이디어를 녹여냈던 기억이 있어요. 공연이 끝난 후 어떤 평론가께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를 10명으로 채울 수 있는 건 창무회 밖에 없다’고 칭찬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그 무대를 과하지 않게 채우기 위해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생각도 들어요. 아까 김재철 선생님과의 만남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는데 사실 김선미 선생님의 춤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셨던 분이었던 것 같아요. 오랜 시간 음악감독으로, 예술 동반자로 계속 같이 해왔고 작품을 고민하는 과정부터 대화의 파트너가 되셨던 분이셨죠. 훈련을 늘 함께 하셨고 김선미 선생님의 무예 스승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이 좌담에 김재철 선생님을 모시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다음에 꼭 김선미 선생님의 춤 세계에 대해 김재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최지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1999년에 북경 소극장에서 ‘월영’ 시리즈를 공연했는데, 바닥이 시멘트인 조그만 실험극장이었어요. 무릎 꿇고 숙이는 장면이 있었는데 너무 몰입해서인지 바닥에 이마를 부딪치신 거예요. 그때 관객이 놀랄 만큼 울림이 컸었죠. 이마에 혹이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오르는 상황이었고 모든 사람이 놀란 와중에 그대로 이어 하셨거든요. 그런 사건들이 너무 많았어요. 일본 공연 가서도 바닥에 떨어지는 등 사건사고들이 따라다녔죠.
김서령: 조안무와 곽씨부인 역으로 참여하셨던 창무회 〈심청〉이라는 작품도 그랬었죠. LG아트센터 초연 때 오케스트라 피트로 스탭이 떨어져서 앰뷸런스에 실려 갔죠. .그런데 그 대신 이런 사고들이 있을 때 꼭 공연이 대박이 났고요. 징크스가 있던 작품들이 있어요. 중국 공연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도 생각나네요. 북경국가대극원이 엄청나게 큰 무대였는데 작품 중에 〈볼레로〉가 있었죠. 솔로 공연을 어떻게 할까 싶을 정도로 큰 극장이었고, 모든 작품에 김선미 선생님이 출연했었죠. 군무 작품을 하고 이어서 〈볼레로〉를 하러 무대 위에 오르셨는데 그때 에너지가 폭발하는 거예요. 무대가 넓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 만큼 신명나게 춤을 추셨고 관객들은 박자에 맞춰서 박수를 쳤는데, 소름이 끼칠 정도였어요. 한바탕 춤을 추시고 불이 꺼진 후, 선생님이 무릎이 꺾여서 무대 옆 막으로 굴러 들어오면서 쓰러지셨어요. 정말 탈진하듯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추신 거예요. 다음 작품에도 출연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섰죠. 몸이 일어나지지 않는 상태여서 공연하실 수 있겠냐 했는데 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김재철 선생님이 침을 넣고 제가 주무르고. 그러다 〈춤, 그 신명〉 음악이 시작되니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춤을 추셨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소름이 끼치면서 춤 귀신이 몸에 들어왔다 나갔나 했죠. 손가락 하나도 못 들었던 사람이 어떻게 조명 들어오고 음악만 나오면 춤을 출까 정말 신기했어요.

김선미 선생님께서 학창시절 신촌 음악카페에서 DJ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클래식, 전통 가리지 않고 음악을 다양하게 들으셨던 것 같아요. ‘달하’ 시리즈 하면서도 클래식 음악과 만나는 작업을 계속 진행하셨고, 그밖에도 다양한 음악가들과의 협업을 진행하셨고요.
안무가로서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던 작품 중 하나는 〈강변북로〉(2005, 2010)가 아닌가 생각해요. 저도 두 번의 작업을 같이하면서 선생님의 안무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창작자들과 본격적으로 협업하는 걸 이때 처음 했던 것 같아요. 윤정섭 연출, 황지우 시인의 대본, 김태근 작곡가의 음악에 의상부터 동작, 접근법을 파격적으로 달리 했죠. 무용수 연습을 달리기만 엄청 시켜서 더 기억에 남아요.
최지연: 연습 끝나고 다 같이 강변북로에 가서 쌩쌩 달리는 차를 느껴보자고 했어요. 언니는 예전에 했던 〈추다만 춤〉도 갑자기 시골 논두렁 가서 걸어보라고 했던 것처럼 〈강변북로〉 작업을 할 때도 차 사이에 서 있게 했어요.
김선미 〈볼레로〉 ⓒ김선미
김서령: 그 이후에 선생님 작품, 많이 기억하시는 작품이 〈볼레로〉 입니다. 제가 알기론 투병 기간에 구상한 작품으로 알고 있어요. 병상에 계시면서 춤추고 싶은 욕구를 이 작품으로 해소하셨다고요.
문애령: 오늘 아침에 컴퓨터로 김선미를 검색했어요. 〈볼레로〉에 대한 기사들을 봤는데, 자신의 전환을 드러내 주는 작품이라고 자평하면서 몸이 아팠기에 〈볼레로〉를 얻을 수 있었다고 인터뷰했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김선미 선생님의 〈볼레로〉가 김선미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작품들도 장점이 많지만 아무래도 타인의 의견이 반영이 안 될 수 없죠. 창무회라는 큰 틀 안에서 하니까요. 좋게 말하면 협업이고 나쁘게 말하면 일종의 창의력의 흔들림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볼레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창의성을 가진 김선미의 대표작이에요. 병마와 싸우면서 만든 이 작품은 안무자가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남달라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김서령: 초연을 2009년 서울세계무용축제 ‘우리춤빛깔찾기’ 시리즈로 서강대 메리홀에서 했었어요. 그날이 생각나요. 선생님이 투병을 마치고 난 첫 무대라서 쓰러지시진 않을까 걱정이 많았어요. 저는 발코니석에서 봤는데 무대와 객석을 모두 볼 수 있었어요. 몰입감이 컸고 끝나고 나서 기립박수가 나왔죠. 관객들이 하나둘 일어나서 박수를 치는데 그 진심과 시간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생각에 매우 감동했어요. 그 이후에 이 작품이 해외초청도 많이 되고 재공연을 많이 했는데 개인공연을 하실 때도 레퍼토리로 많이 올렸던 작품이어서 공연될 때마다 많이 회자되었어요.
문애령: 〈볼레로〉는 진실성이 담긴 작품이에요. 단 한 동작도 필요 없는 동작이 없어요. 모든 움직임이 없어서는 안 되는 적합한 움직임이라는 공감대가 있으니까 기립박수를 받은 것 같아요. 버릴 게 없죠. 그냥 들어간 동작이 없어요. 모든 동작을 안무자가 정확히 잘라서 원하는 만큼 넣어 연결했기 때문에 완성도로 치자면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없어요. 짧지만 높은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죠.
김서령: 너무 잘 알려진 음악이었고 많은 안무가들이 도전하는 음악이어서 섣불리 도전하기 어려운 곡이지만 그 곡이었어야만 했던 이유가 분명히 있었어요.
문애령: 국제적인 무대에서 당당할 정도로, 김선미처럼 그 음악을 해석한 사람이 없어요. 김선미의 독창성, 그것 때문에 여러 곳에서 초청됐겠죠.
최지연: 처음에 메리홀에서 할 때는 아픔을 딛고 일어섰다는 인간승리 같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기립박수를 쳤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도 이 작품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치잖아요. 관객들도 똑같은 심정으로 함께 고조됐던 거예요. 작품에서 관객의 박수도 음악처럼 함께 했죠.
김서령: 춤과 음악이 함께 절정에 치달으면서 마지막에 관객과 하나 되는 느낌이 인상적이었어요.
문애령: 절정에 치달으며 몸은 점점 가벼워지죠. 이 또한 그분의 매력이고 연출력이에요. 창무회가 이런 작품은 더는 가미하지 말고 김선미가 했던 그대로 끝까지 보존했으면 좋겠어요.
최지연: 네. 이 작품은 그대로 받아서 하려고 해요.
문애령: 창무회에서 〈볼레로〉를 온전히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다만 무용수 각자 몸이 다르므로 모두 다르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점을 감안해야겠지요. 내가 김선미 선생이 아니므로 춤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면 다양한 볼레로를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최지연: 선생님의 후배들과 ‘김선미 선생님의 춤을 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 적 있어요. 다들 하고 싶어하는 동시에 두려워했죠. 그런데 후배들이 춘다면 선생님이 얼마나 좋아하실지 상상이 돼요. 선생님 작품 중에 대중들이 좋아하는 작품이 있어요. 〈서른 즈음에〉(2011)인데, 제 주변에서 작품을 보고 통곡하고 나온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음악이 갖는 힘도 있지만 음악에 김선미 선생님의 춤, 이야기, 인생이 같이 얹어지면서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준 작품이었어요.
김서령: 2016년 포스트극장에서 공연된 창무회 40주년 〈창무큰춤판〉 에서도 그 작품이 공연 되었는데, 그때 기획자 후배 정혜미 씨가 〈서른 즈음에〉를 보고 통곡하면서 나오더라고요. 그 친구가 인순이 선생님 연락처를 알아내 이 작품을 꼭 보여드리고 싶다 해서 연락이 닿았고, 인순이 선생님이 다음 공연 때 극장에 오셔서 작품을 보셨죠. 언젠간 두 분을 무대에서 만나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문애령: 감성적인 내용도 좋았지만 안무 스타일이 굉장히 세련됐어요. 분석하고 이해하고 공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각의 우월성이 있어요. 〈서른 즈음에〉는 요즘 소위 말하는 다큐멘터리 시어터잖아요. 오직 진짜만 있는 거죠. 그 진짜를 가지고서 음악가들과 같이 협업하고 춤을 춰요. 과연 누군가가 무용미학의 흐름이 이렇게 흐르고 있으니 이렇게 하자고 했을까요? 그냥 그분은 본능적으로 대사가 있고, 춤이 있고, 연주가 있는 작품으로 기획했을 텐데 우연히도 지금 현대무용 사조에 맞는, 피지컬시어터 이후 현실적인 다큐멘터리를 가지고 만드는 안무 패턴이랄까. 이런 걸 한 거잖아요. 본능적으로 감각이 세련된 거죠. 앞서나가는 것에 자연스럽게 동화될 만한, 세련된 판단력의 안무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점이 일종의 다큐멘터리 형식이지요.
김서령: 그 작품에서 선생님이 독백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꾸며진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한 예술가, 한 인간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받아들였어요. 부고를 전송할 때 선생님이 그 작품 안에서 내레이션했던 이야기를 보냈었는데, 전 늘 그 글이 선생님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40년 이상 춤이 좋아서 춤만 춰온 춤바람 난 여자입니다”라며 시작한 독백의 글이에요. 왜 춤을 췄는지 왜 춤을 춰야만 했었는지, 그리고 춤을 잘 춘다는 이야기가 가장 행복하다는 내용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춤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서른 즈음에〉 작품은 밝넝쿨 안무가가 만든 기획공연 ‘춤.신 프로젝트’에 초대해서 만든 작품이었거든요. 선생님은 창무회나 한국무용을 하는 친구 외에도 젊은 후배들과 소통하는 걸 즐기셨던 것 같아요. 홍혜전 안무가의 〈新수궁가〉를 할 때도 최진한 씨와 듀엣을 했잖아요. 홍혜전 선생님은 작품을 준비하면서 누가 이 역할에 어울릴까 생각하면서 김선미 선생님과 하고 싶다고 제안했고, 김선미 선생님도 흔쾌히 재밌겠다면서 받아들이셨죠. 너무 열심히 연습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2017년 서강대 메리홀에서 〈달하2-월광〉 공연을 마쳤을 때, 선생님은 그때도 몸이 안 좋으셨는데 전화통화에서 또 춤추고 싶다고, 춤추게 해달라고 하시더라구요. 이듬해 남산국악당 기획공연인 ‘남산컨템퍼러리-전통, 길을 묻다’에서 〈월광〉을 다시 올리게 됐고 음악을 좀 더 새롭고 정교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어 젊은 음악팀을 합류시켰어요. 김재철 선생님의 타악에 앙상블시나위가 함께 했는데, 선생님이 투병 중인데도 워낙 연습을 열심히 하시니까 음악 하는 친구들이 당황해했죠. 제자 분들이 부축해서 연습실에 들어올 정도였는데, 그 체력으로 음악팀과 함께 연습하고 따로 주 2회 개인 연습도 하셨어요. 주변에서 연습을 말릴 정도로 절대 춤을 놓지 않으셨어요. 그때 젊은 친구들이 선생님을 보면서 굉장히 감동받은 것 같아요. 공연이 끝나고 나서 그 친구들이 하는 말이, 그동안 연습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자성하면서 선생님을 존경하게 됐고 계속 작업을 함께하고 싶다고 했어요. 장례식장에도 와서 앞으로 같이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했지요. 김선미 선생님은 그렇게 후배들과의 소통에 있어서 굉장히 열려 있었고, 가로막힌 벽 없이 호기심이 많은 예술가였어요.
문애령: 네. 모든 면을 갖춘 예술가였죠. 춤도 잘 추고, 안무도 잘하고, 열정도 많은 선생님의 작업을 조금 더 일찍 평가했으면 좋았겠어요. 여러모로 능력이 탁월하신 분이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제가 무용가에 대한 평가를 나서서 하는 것은 이분 외에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진정한 무용예술가였고 진정으로 무용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면에서 정말 감사하고 미안하고 안타까운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최지연: 후배로서, 삶을 같이한 동생으로서 바랐던 건 언니의 속상함을 춤으로만 풀지 말고 말로도 풀었으면 했어요. 어떤 날은 속상해하면서 전생에 빚이 많나보다, 이번 생에 이 빚을 갚는가보다 이런 말을 했는데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안타까운 심정이 커요. 할 말 하고 마음에 쌓아두지 말고 했으면 더 기쁘게 살지 않았을까. 이런 부분이 마음이 아파요.
김서령: 많은 것들은 속으로 감내하면서 사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오로지 춤을 통해서만 푸셨던 것 같고요. 선생님 돌아가시고 새벽에 김매자 선생님께서 “김선미는 창무회랑 자신의 춤을 지키기 위해 교수를 욕심내지 않은 유일한 제자였다”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셨어요. 제가 봤던 모습도 그랬어요. 정말 춤밖에 모르셨기 때문에 내밀한 이야기들과 자신의 색깔을 담은 춤, 정제된 춤이 나오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랬기 때문에 주변 많은 후배들과 예술가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으로 회자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저는 의외의 분들이 선생님 장례식에 찾아보는 걸 보면서 굉장히 놀랬거든요. 연락도 드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오셨을까 싶었고, 정말 어린 무용계 후배들까지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 빈소를 찾아주었어요. 항상 조용하시고 스스로 드러나게 행동하지 않으셨지만, 선생님의 참된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했어요.
문애령: 예술가로서 모범을 보였어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김서령 ⓒKenn.김병구
김서령: 선생님께서 40~50년간 춤을 추면서 참 많은 작품을 추고, 만들고, 함께 해오셨는데요. ‘몸본’ 같은 경우도 정리되고 조명되어야 하는 중요한 메소드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선생님의 춤 자산들이 어떻게 기록하고 후대에 남길 수 있는지 계속 고민하게 돼요. 연구자들, 글을 쓰시는 분들이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리고 창작과정에서 함께했던 저희 이오공감 뿐만 아니라 창무회와 김재철 선생님, 그리고 제자를 비롯한 주변 분들께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그 자료들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도 고민입니다. 예술자료관으로 옮긴다 해도 예산과 인력문제로 정리와 공유가 미뤄지고 수장고에 갇혀있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문제에 대해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선생님들의 조언이 필요해요.
문애령: 예술자료관의 일처리가 더디더라도 자료관에 넘겨 일원화하는 게 좋은 것 같더라고요. 저도 민간단체와 자료작업을 몇 차례 해봤는데, 결과적으로는 국가기관에서 하는 것이 자료의 정리와 보존 면에서 더 나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창무회는 자료 관리가 어렵죠.
김서령: 창무회 분들은 앞으로 남겨질 유산들을 어떻게 보존하고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워낙 선도적인 활동을 해온 단체이니까 모범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동시에 예술자료관이 제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도 그런 요구가 있어야 합니다. 자료를 넘겼는데 후속 결과가 없으니, 많은 분이 두려워해요. 자료를 모아놓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그 자료를 정리하는 것은 전문적인 거라 현장에서 소화할 수 있는 일은 아니거든요. 김재철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소장하고 있는 김선미 선생님 자료를 정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굉장히 많은 인력이 필요한 일이라서 기본적인 것만 가능한 상황이에요. 결국 예술자료관으로 넘어가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통예술 같은 경우는 문화재보호재단, 국립무형유산원 등 여러 기관이 생겨서 그 안에서 소화할 수 있지만 한국창작춤 같은 경우는 그렇지 못해 고민이 많습니다. 어떻게 정리하여 후세에 남길 것인가. 연구자료로서 어떻게 기능하게 할 것인가. 우리의 중요한 춤 유산을 어떻게 해외에 전달할 것인가. 이제는 큰 그림 안에서 제도적인 시도가 있어야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최지연: 창무회에서는 김선미 선생님의 작품을 레퍼토리화해서 춤을 보존하고 지속적으로 공유하고자 해요. 〈볼레로〉나 〈나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의 미장센에 관하여 춤을 분석하는 학술지도 내고요. 다각도로 작업해보려 합니다.
김서령: 선생님께서 남겨주신 춤 자산들이 앞으로 창무회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어요.
왼쪽부터 김서령, 최지연, 문애령 ⓒKenn.김병구
문애령: 정말 믿고 보는 안무가를 이제 더는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워요. 김선미 선생님의 작품에 처음부터 공감하진 못했지만, 어느 순간 독특한 매력을 발견했고, 〈볼레로〉에서 완전한 모습을, 마지막 〈서른 즈음에〉에서 자유로움을 느꼈어요. 안무에 대해 예술가로서의 고집이 있지만, 그 고집보다 더 큰 자유로운 영역을 받아들이는 포용성, 그래서 인간적으로도 훌륭했어요.
최지연: 장례식장에서 같이 작업했던 젊은 친구들, 객원들이 많이 울었잖아요. 언니가 상상했던 대로 못 따라와 주면 기다려 주는 게 있었어요. 기다리며 모두 이뤄지게끔 하더라고요. 안무의 기술인 거죠. 그런 부분에서 아마 많은 사람이 마음을 드렸던 것 같아요.
문애령: 자기 것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아요. 조용하게 한 마디를 내뱉는데 결국엔 그렇게 하게 만들죠.
김서령: 작품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전혀 타협이 없으신 것 같아요. 강요하진 않으시는데 결국에 본인이 원하는 그림으로 가는, 사실 저도 기획팀에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거든요. 알겠다고는 하시지만 결국에 본인이 원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욕심이 있었어요. 많은 평론가분들과 글 쓰는 분들이 선생님 춤에서 뚝심을 발견하고 언급하셨던 것 같아요. 앞으로 그런 모습을 못 본다는 게 안타깝지만, 또 그런 선생님의 춤의 세계, 정신, 사랑 같은 것들이 또 주변 동료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으로 남을 거라고 믿어요.
문애령: 춤 언어의 다양성은 김선미 선생님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예요. 집중력과 노력의 결실이라고 봐야 해요. 작품을 풀어나가는 구성력도 세련된 감각을 가졌어요. 앞서 언급했듯이 그런 세련된 감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 같아요.
김서령: 선천적인 감각도 있었지만 평소에 학습도 많이 하셨어요. 책도 많이 보시고 음악도 듣고, 해외공연 가서도 갤러리, 박물관에 가는 걸 좋아하셨고 듣고, 읽으면서 끊임없이 학습하셨죠.
최지연: 연습을 시켜줄 때 너무 잘 이해할 수 있게 지적해주는 것도 굉장한 힘이에요. 저에게 너무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김서령: 다들 선생님의 부재로 허전하고 그리운 마음이 큰 것 같아요. 2월 23일은 김선미 선생님 추모 모임을 하기로 했던 날이었어요. 코로나 확산이 심해서 모임을 연기하고 다음을 기약하게 됐는데 여전히 현실감은 없는 것 같아요. 3월 9일 날 선생님 49제인데 가능하다면 그 전에 추모 모임을 가졌으면 해요. 많은 분들이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기억을 나누고 싶어 하시거든요. 김선미 선생님은 오래도록 기억되는 안무가, 춤꾼이지 않을까요. 지금도 여전히 하늘에서 춤을 추고 계실 것만 같네요. 돌아가시기 3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갤러리에서 〈시행간여〉를 공연하실 때도 저는 말렸거든요. 근데 꿋꿋이 하셨어요. 그러면서 앞으로 이 작업을 발전시킬 거라는 계획을 갖고 계셨죠. 주변 모든 분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고 했는데 결국 그날도 30~40분 춤을 추셨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선생님의 평소 바람대로 몸이 움직이는 그 순간까지 춤을 추셨어요. 훨훨 춤을 추면서 하늘나라로 가셨을 것 같고 지금도 여전히 어디에선가 행복하게, 춤을 추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문애령: 무용 전공자들은 많지만 무용예술가라고 자타가 인정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아요. 김선미 선생님은 선두 그룹에 속하는 무용예술가이셨습니다.
정리. 웹진<춤:in> 편집위원 김인아

김선미_무용가 김선미는 1982년 한국창작춤의 산실인 창무회에 들어가 1993년부터 창무회 예술감독, 2013년부터 (사)창무예술원 예술감독을 맡아왔다. 한국 전통의 토대 위에 한국 창작춤의 틀을 마련하는 작업을 시도해 왔다. 리옹댄스비엔날레 등을 통해 한국무용을 세계화에도 힘썼다. 선정고등학교 교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주요 안무작으로 〈공으로 돌지〉(1985), 〈천불탑 월영〉(1998), 〈아우라지〉(2000), 〈강변북로〉(2005), 〈달하-달의 강〉(2016), 〈달하2-월강〉(2017), 〈달하〉(2018) 등이 있다. 제26회 무용예술상 ‘예술대상’을 받았다.

김서령_독립프로듀서 문화예술기획 이오공감 공동대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연과 축제, 예술교육 프로그램 등을 기획, 제작, 연출, 컨설팅 한다. 창작 콘텐츠 개발, 창작 환경 조성, 예술가-매개자 네트워크, 문화공간과 창작 플랫폼, 예술과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문애령_춤평론가문애령은 이화여대 및 동대학원에서 발레를 전공했고. 미국 조프리발레스쿨 등지에서 수학했다. 월간 〈객석〉의 예술평론상 공모를 통해 무용평론가로 등단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자 현장 비평가로 〈객석〉 〈몸〉 〈춤웹진〉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비평작업을 하고 있다.

최지연_무용가 최지연은 창무회 예술감독이며, 최지연 무브먼트 대표이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연극원 연기과에 출강하고 있으며, 한국춤협회 이사직을 맡고 있다.

웹진 <춤:in> 편집부 최지연은 창무회 예술감독이며, 최지연 무브먼트 대표이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연극원 연기과에 출강하고 있으며, 한국춤협회 이사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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