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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11.13 조회 8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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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춤추는 미술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무용인을 위한 렉쳐 시리즈>는 무용의 창작 환경에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모르는’ 개념과 실천의 방법들을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공개강연과 워크숍을 진행한 후 이를 정리하여 싣습니다. 이 코너는 ‘영리한 땅’과 협력하여 진행합니다.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춤추는 미술

김해주_큐레이터

김해주 ⓒ 서울문화재단
김재리: 안녕하세요? 오늘은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네 번째 강의입니다. 네 번째 강의는 김해주 선생님이 ‘미술관에서 일어나는 퍼포먼스와 춤’을 중심으로 강의를 진행해 주시겠습니다. 김해주 선생님은 현재 아트선재센터의 부관장으로 일하고 계시고, 예전에는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작업하시면서 퍼포먼스를 다루는 전시 기획을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알고 계시는 아르코미술관의 <무빙 / 이미지> 전시를 기획하셨고, 그 외에도 퍼포먼스를 하는 시각작가와 안무가와도 작업을 많이 하셔서 시각예술과 무용이 연결되는 지점과 미술관에서 사용하고 있는 춤에 대해 실천적으로 다뤄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김해주: 처음 강의 제안을 받았을 때는 시각예술과 무용 두 장르가 서로의 역사나 개념을 참조하거나 형식적으로 결합하는 작품의 사례들을 소개해보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구체적인 공연의 사례가 아니라 관련된 비평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시각예술과 춤이 만나는 현상을 한 번 돌아보고, 그 안에서 몇 가지 작품에 언급하려고 합니다.

최근 웹진 <춤:in>에서도 ‘미술관에서의 춤’을 주제로 좌담을 진행한 바 있는 것처럼 현대미술과 무용의 협업 및 미술관에서 안무가가 작업하고 극장에서 시각예술 작가들이 작업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90년대 중반부터 서구 예술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왔고, 2000년대 중반부터 미술관 제도 안에서 확장된 것 같습니다. 안무가들이 미술관에서 공연하는 형태뿐만 아니라, 전시 자체를 퍼포먼스의 형태로 구축하려는 큐레이터들의 시도들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가 개관할 때,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나우 점프!(NOW JUMP!)>라는 개관 페스티벌의 퍼포먼스 프로그램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약 3개월간 매주 다양한 퍼포먼스가 소개되는 흥미로운 작업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연극, 무용 작업도 있었고 시각예술가의 퍼포먼스도 있었습니다. 그때 미술관에 퍼포먼스가 일어날 때 생기는 다양한 상황들, 특히 충돌의 지점을 경험했습니다. 첫 번째는 공간적인 충돌입니다. 실제로 조명과 사운드에 있어서 극장의 물리적 조건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을 위해 간이 극장 구조물을 전시장 내부에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임시 건물 형태의 극장이었기에, 소음과 빛이 완전히 차단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제도적으로 생기는 충돌이었습니다. 미술관과 공연예술에서 진행하는 계약 방식이나 지급 조건 등의 기준이 달라서 협의의 과정에서 서로의 다른 이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관람객의 입장으로 미술관에서의 춤을 바라보다가 실무자의 입장을 경험하면서 미술관에서의 춤이라는 것은 작품의 내용적 맥락뿐 아니라 제도와 공간 등 여러 요소가 관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작품의 내용만을 소개하기보다는 좀 더 다양한 맥락을 소개해 볼 수 있을지 생각을 하다가 이 같은 현상을 둘러싼 비평가들의 관찰과 입장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미술관에서의 춤을 둘러싼 비평

홍콩의 예술기관인 ‘파라 사이트(Para Site)’는 매년 심포지엄을 개최합니다. 2014년의 심포지엄 주제는 “Is the living body the last thing left alive?” 였습니다. 거칠게 번역해보면, “살아있는 신체는 과연 살아남은 마지막 것인가?”라는 뜻입니다. 미술관 안에 신체들이 춤으로 개입하는 현상을 보고, 이것이 동시대 예술에 남겨진 마지막 유효한 매체인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심포지엄에서는 최근의 ‘퍼포먼스 붐’이 미술의 퍼포먼스적 전환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거론되었던 이야기를 일부 참조합니다. 먼저 언급하게 될 이론가들이 다 외국학자라는 사실을 말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술관에서의 춤이라는 부분이 사실 서구 미술계를 중심으로 파생되며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주로 언급되는 작가와 안무가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파급력을 가진 미술관들이 직접 퍼포먼스 분과나 페스티벌 형태를 만들어 움직임을 주도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주제에 있어 한국에서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앞서 언급한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의 개관 페스티벌이나 <스프링웨이브>(2007), <페스티벌 봄>의 일부 작업, 201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했던 전시 <무브: 1960년대 이후의 미술과 무용>, 2013년 문화역서울 284의 <플레이타임>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퍼포먼스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가 지금 한국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나 무용이 간헐적으로 이야기되거나 소개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기획을 진행하고 있는 플랫폼은 보이지 않습니다. 일단 오늘 강의는 서구의 사례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걸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같은 논의가 한국의 상황과 어떤 연결성을 가지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한 파라 사이트의 심포지엄에서 비평가 보야나 스베이지(Bojana Cveji?)는 ‘미술관에 당도하기 전 유럽 현대 무용의 상황’이라는 발표를 통해 90년대 일어난 유럽 무용 씬의 변화를 설명합니다. 그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의 무용은 ‘텅 빈 상태’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치적이고 비평적인 작업을 옹호하는 비평가로서 90년대 초반까지의 무용 작업이 이론적이거나 정치적인 질문이 부재하고 제도에 대한 반성과 이를 둘러싼 관계성에 대한 고찰이 부재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저드슨 스타일(Judson Style)을 답습하는 아카데믹한 형식주의 - 저드슨 댄스(Judson Dance)의 미니멀한 형태를 차용하거나 학계를 중심으로 하는 네오 클래식한 춤의 공존 상태 - 그리고 미학적 카테고리를 두자면 일렉트릭 스타일의 춤(프랑스의 누벨 당스(Nouvelle danse) 계열, 벨기에의 울티마 베즈(Ultima Vez), 영국의 (DV8)과 같은 작업과 같이 춤에 대한 로맨틱한 접근이 우위를 점하던 시절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무용 교육과 관습적인 전문 지식의 영역 안에서만 춤을 추고 있었고, 이 같은 상황은 각자 개인의 입장을 강조하면서 안무의 영역에서 이해 불가능함과 전달 불가능함을 계속 주장하는 위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에 이러한 상황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추상적 형태와 표현의 근본주의적 방어를 거부하는 무용 작업이 등장했고, 무엇보다 제작 방식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고정 레퍼토리와 안정적인 단원을 두고 한 명의 안무가 리더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무용단의 구조가 바뀌어 프리랜서 중심과 프로젝트 베이스의 프로덕션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춤에 대해 잘 모르거나 춤의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장르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비에 르 로이(Xavier Le Roy), 마틴 스팽베르그(Marten Spangberg), 티노 세갈(Tino Sehgal), 안토니아 베어(Antonia Baehr)등의 작가들이 그 예입니다. 그리고 무용 교육과 활동의 경험이 있지만 협소한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빠져나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고 요구하기 시작하는 작가들로 베라 만테로(Vera Mantero), 제롬 벨(Jerome Bel), 라 리보(La Ribot), 보리스 샤르마츠(Boris Charmatz), 에스터 살라몬(Lester Salamon), 메테 잉바르텐(Mette Ingvartsen) 등의 예를 듭니다. 스베이지에 따르면 90년대 중반 이후의 춤은 신체를 하나의 주체의 표현이 아니라 다중적 주체가 관통하는 아이콘으로 보는 것 (제롬 벨의 <제롬 벨(Jerome Bel)>), 저자의 죽음과 새로운 관객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 렉쳐 퍼포먼스(자비에 르 로이)와 같은 형식의 제안, 페미니즘, 퀴어 크리틱(안토니아 배어), 움직이는 신체의 수행적 구성, 자본주의 및 작품의 제작 조건에 대한 비판적 작업의 등장으로 확장됩니다. 결국, 춤이 표현의 매체가 아니라 질문의 매체로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안드레 레페키(Andre Lepeckil) 역시 동일한 심포지엄에서 진행한 발표에서 무용이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것이‘새로운 수행적 전환’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것이 새로운 전환일 수 있지만, 첫 번째 장면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은 수행적 전환은 이미 과거에 한 번 있었기에 지금의 상황도 하나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전과 다른 형태와 특성을 가지는 전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첫 번째 전환을 1958년에서 1965년도 사이의 시기로 보고, 두 번째 전환을 90년대 중반으로 봅니다. 레페키는 1958년에서 65년 사이의 움직임은 시각예술과 무용이라는 다른 장르에 있는 예술가들이 만나서 생성된 게 아니라, 시각예술의 내부에서 안무나 춤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 생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알랜 카프로우(Allan Kaprow)가 “잭슨 폴록의 유산(The Legacy of Jackson Pollock)”이라는 글을 통해 회화 안에서의 운동성을 강조했을 때, 리지아 파프(Lygia Pape)가 리우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에서 <콘크리트 발레(Concrete Ballets)>를 발표했을 때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가 “댄스에 관한 노트(Notes on Dance)”를 쓰고, 헬리오 오이티시카(Helio Oiticica)가 “내 경험에서의 댄스”를 썼을 때 이미 일어났던 일이라고 봅니다. 이 작가들의 관심은 시각예술과 무용이라는 두 장르의 결합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각성을 어떻게 새롭게 발명할 것인가라는 질문 안에서 신체의 움직임과 춤이 들어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한스 나무스(Hans Namuth)

알랜 카프로우는 잭슨 폴록의 그림에서 움직임과 제스쳐를 발견하고, ‘잭슨 폴록의 유산’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1927년생으로 2006년에 사망한 알랜 카프로우는 본래 회화를 공부했지만 추상표현주의 미술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의 예술 언어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그 가능성 중 하나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었습니다. 폴록은 추상표현주의 전성기에 사랑받던 작가였지만 작가의 행위 자체의 중요성이 부각되진 않았습니다. 그러다 한스 나무스(Hans Namuth)라는 사진작가가 폴록이 그림 그리는 과정을 기록했는데, 카프로우는 그 사진을 통해 잭슨 폴록의 그림에서 움직임과 제스처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한정된 캔버스를 넘어가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지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행위를 하는 것도 하나의 회화 작업이며, 조각 작업으로 포함되고 해석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그는 <6파트로 나누어진 18개 해프닝(18 Happenings in 6 Part)>(1959)이라는 작업을 구성하게 됩니다. 작업을 안무적으로 접근하여 일상 동작을 코드화하고, 정확한 시간과 움직임을 종이에 미리 기록하여 계획을 세운 다음에 기호화하고 걸음과 제스처를 정리하여 실행할 수 있게끔 만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계된 방식으로 작업을 해오다가, 점차 삶과 예술의 형식을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것에 대해 탐구했습니다.

<콘크리트 발레(Concrete Ballet)>, 리지아 파페(Lygia Pape), 1958

뉴욕의 루벤 갤러리에서 일어났던 이 퍼포먼스의 1년 전에 브라질 작가 리지아 파페(Lygia Pape)는 레이날도 자르딤(Reynaldo Jardim)이라는 시인과 함께 브라질 코파카바나에 있는 극장에서 <콘크리트 발레(Concrete Ballets>라는 작업을 초연하였고, 그 다음해 <네오 콘크리트 발레(Neo-Concrete Ballets)>라는 작업을 만듭니다. 기본도형 형태의 대형 조각이 있고 무용수들이 조각의 뒤에서 이를 움직이는 작업입니다. 무용수들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시각예술가가 조각으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작업이었습니다. 이 작업을 보았던 동료 작가인 리지아 클락(Lygia Clark)은 이 퍼포먼스를 관람하고 난 후 공간 안에서 진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empty full space’라고 언급합니다. ‘텅 비어 있지만 꽉 차 있는 공간’이라는 모순적인 단어는 리지아 클락의 작업의 핵심이 됩니다. 조각이지만 움직이고 있는 상태이자, 정지한 동시에 춤의 요소가 있는 작가의 유기적인 선과 4차원의 운동성 있는 조각을 만들어내는 데에 영향을 줍니다.

<비초(Bicho)>, 리지아 클락(Lygia Clark), 1960

리지아 클락의 비초(Bicho-‘짐승’이라는 뜻)라는 시리즈의 작업은 모두 관절 부분이 있어서 접을 수 있는 조각으로, 놓여 있는 상태에서 관객들이 어떻게 만지는가에 따라 형태가 달라집니다. 조각이 고정적으로 놓여 완성된 상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움직이고 변형 가능한 형태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한편, 오이티시카는 춤을 통해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발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앞서 ‘내 경험 안에서의 댄스’라는 글을 1965년에 썼는데, “춤은 행동이고 춤은 이미지를 생산한다, 행동은 이미지를 생산한다, 그리고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기에 행동도 시각예술을 작동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에게 춤은 새로운 이미지로의 발견을 이끌고 고정성에 묶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시각적 한계로부터 벗어나는 기능을 가진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됩니다. 1968년 리차드 코스텔라네트(Richard Kostelanetz)와의 긴 인터뷰에서 그 자신의 1960년대의 댄스 퍼포먼스에 대해 ‘이미지’라고 칭했습니다. 매일의 조각, 제스쳐의 일상성과 신체적 행위에서 ‘그 특수한 순간의 가장 추상적인 이미지’를 끄집어낸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에 추상적인 이미지를 끄집어내기 위해 사람의 신체를 쓴다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상태에서 시각예술 작가들은 시각예술의 시선으로 움직임을 바라봤습니다. 이것이 안드레 레페키가 말하는 첫 번째 전환의 시기입니다.





<무빙/이미지>, 문래예술공장, 2017
<무빙/이미지>, 아르코 미술관, 2017

저는 2016년과 2017년에 <무빙 / 이미지>라는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되돌아보면 움직임 안에서 이미지를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라는 전시의 질문은 앞서 언급한 50-60년대의 작가들의 생각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영상 작업을 의미하는 무빙이미지라는 단어의 가운데를 ‘/’로 나누어 표기한 것은 ‘움직임’과 ‘이미지’ 양쪽을 모두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시간의 움직임인 퍼포먼스도 인지의 차원에서는 이미지의 연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퍼포먼스를 이미지의 구성체로 분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2017년의 두 번째 <무빙 / 이미지>는 특히 ‘사물에서 어떻게 움직임을 상상하게 할 수 있을까?’와 ‘사물이 움직임의 가능성을 갖고 있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일부 작업은 사물의 움직임이나 시간의 흐름을 기록한 방식의 영상이었지만, 설치와 조각 작품들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김동희의 <자동문>은, 미술관 전시장의 문을 자동문으로 전환하는 것이었고, 그레이스 슈빈트(Grace Schwindt)의 작업은 퍼포먼스의 오브제로 사용되었다가 퍼포먼스가 끝나면 조각의 위치를 점하기도 했으며 이미래의 <스크리블 캐리어즈(Scribble Carriers)>는 손으로 쓴 낙서의 형태로 된 철제 조각으로 몸에 두를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실제로 움직이는 사물이거나 움직임에 대해 은유적으로 접근하면서 정지와 움직임이 교차하는 전시의 관람경험을 퍼포먼스로 상상해보았습니다.

안드레 레페키가 언급하는 두 번째 전환은 보야나 스베이지와 동일하게 90년대 중반에 일어났던 무용계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50년대 60년대 중반까지의 전환이 시각예술에서 춤을 새롭게 상상하는 방식으로 움직임을 이미지로 등장시키는 것이었다면 90년대 중반부터 일어났던 시각예술과 무용의 만남과 전환은 춤과 안무 내부에서 일어났던 전환이었습니다. 50년대와 60년대의 예술은 회화적 한계에서 이미지와 오브제를 자유롭게 하고, 사회적 관습이나 제약에서 자유롭게 하는 게 주요 논의였으며 예술과 삶을 혼합해 보려는 상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각예술이 가진 역할이었고, 춤을 해방적 매체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상황 안에서 춤을 통해 삶과 예술이 통합된 해방의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한다면, 회의적이거나 비관적인 답변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오늘날은 삶과 예술이 통합되어 있기 보다는 모순적으로 함께 공존하고 있으며 양쪽 모두 비판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매우 규범적일 수도 있기에,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의 순간들 위를 살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 90년대의 상황에서는 춤을 춘다는 것이 해방이나 자유, 이미지와 매체의 구속으로부터 탈출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춤과 안무가 보다 정교하고 섬세해야 하는 문제가 되었고, 스스로 제도 비판을 하거나 질문하는 매체가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것이 새로운 전환으로 드러났습니다. 춤춘다는 사실 만으로 비평적일 수 없는 시대이기에 어떻게 춤을 춰야 하고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가 훨씬 정교해진 것입니다. 이는 춤의 장을 풍성하면서도 산만한 장으로 만들었으며 텍스트와 출판, 매니페스토, 설치 등 온갖 장치들이 들어오고 비평 이론과 정치 프로젝트, 조각, 드로잉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심포지엄에서 던진 “살아있는 신체는 과연 살아남은 마지막 것인가?” 즉 춤추는 신체의 유효함에 대한 질문에 안드레 레페키는 “아니오”라고 답합니다. 지금은 그 어느 것도 살아있는 상태로 남아있을 수 없다며, 신자유주의적인 하이퍼 식민주의, 기회주의 안에서는 살아있는 신체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것으로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삶이나 신체가 아니라 쌓이고 썩고 흩어지거나 서서히 폭발하고 잘못 관리되고 잘못 기억되는 사물의 어떤 것들이고, 그래서 춤은 사물을 봐야하고, 주체와 사물의 관계, 그 한계를 봐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두 비평가는 90년대 중반 이후로 춤과 무용이 스스로 질문하는 매체로 변모하였다는 점에서 동의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신체로 태동하는 춤이 아니라 사물화된 신체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게 되면서 춤과 무용이 미술의 장에서 질문을 함께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술 안으로 무용이 진입하게 되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김해주 ⓒ 서울문화재단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를 할 때 많은 안무가가 우려하는 것은 퍼포먼스가 하나의 이벤트로 쉽게 소비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미술관에서 하는 퍼포먼스나 무용은 비평적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정지되어있는 오브제나 그림보다는 관객을 활성화하는 효과를 가진 매체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실제로 여전히 많은 미술관에서 안무가를 초대할 때 오프닝 이벤트로 요청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비단 무용뿐만 아니라 미술 안에서도 퍼포먼스가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비평의 지점이기도 합니다. 퍼포먼스의 붐이란 새로운 스펙타클에 대한 필요이며 미술관이 관객 개발을 위한 수단으로 활성화하는 것 아닌가, 경험적 차원의 서비스를 위한 수단으로 가져오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술사학자인 할 포스터(Hal Foster)는 “실제를 찬양하며”라는 글을 통해 “더는 돌아볼 현재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즉 어떤 것도 현재처럼 느껴지지 않는 좀비와 같은 시간성을 갖고 있어서, 오히려 현재에 대한 요구가 커져가는 것이다.”라고 진단합니다. 재연(reenactment)의 붐도 같은 상황으로 설명합니다.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의제의 유행에 대해서도 이 말이 작업이 관객에게 더 개방적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고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은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그는 작업에 있어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관객에게 더욱 투명하게 다가가기보다는 더욱 불투명하게 다가가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작업이 임의로 드러나게 되는 상황은 집중적 경험이나 공유된 토론 없이 빠르고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관람을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미술관이 수용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퍼포먼스의 행위나 제스처를 보여주는 것이 과정을 오픈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관객을 능동적으로 여기게 만드는 기획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믿음은 매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또는 미학적인 토론이나 비평적인 관심을 저하하고 오히려 관객이 판독할 수 없게 만드는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여와 과정을 중시하는 예술 작업은 민주주의적이고 관객에게 무언가를 더 제공하고 그들이 결정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열려 있는 건 형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미술관 안에 들어오는 모든 무용 작업을 비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퍼포먼스가 미술관에서 펼쳐지는 시간성 자체를 과정이라고 보는데 모든 퍼포먼스가 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퍼포먼스에서 일어나는 순간이 과정이자 동시에 완성태일 수도 있습니다. 할 포스터가 비판하는 지점은 미술관에 들어오는 퍼포먼스를 개입시키는 경향의 문제점과 미술관이 퍼포먼스를 관객에게 개방하며 취하려고 하는 욕망의 문제점입니다. 이 비판은 미술관 안에 들어오는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이 “적대와 관계미학(Antagonism and Relational Aesthetics)”이라는 글을 통해 관계 미학을 비판하며 ‘참여’의 맹점에 대해 비판할 때도 적용됩니다. 관계 미학은 관객들이 작업을 과정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일시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되는 작업의 경향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관계 미학으로 언급되는 여러 작업 역시 퍼포먼스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클레어 비숍은 여기서 말하는 관계가 과연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냐를 질문합니다. 이것은 피상적인 참여이지 비평적인 참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레이 존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춤추는 미술> ⓒ 서울문화재단

앞서 90년대 중반 이후 무용에 있어서 내부 변화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안무의 형식과 매체가 다양해지고, 장소 특정적인 작업이 가능해지면서 극장뿐만 아니라 미술관을 비롯한 다양한 장소에서 구현 가능한 무용 작업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미 90년대의 무용 작업들은 극장이라고 하더라도 기존의 프로시니엄 형태의 극장보다는 관객과 퍼포머의 시선이 가깝거나 다양한 방향에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박스 씨어터 형태의 공간을 더욱 선호합니다. 특히 시간의 경계나 제한이 없는 안무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무용 작업이 전시라는 매체에 적용될 수 있는 프레임이었습니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은 이동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데 무용 공연이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 선택한 시점부터 볼 수 있거나 전시와 같은 긴 시간을 점유하는 작업이 등장한 것입니다. 클레어 비숍은 춤이 함께 등장하는 90년대 중반 이후의 미술관 속 퍼포먼스 공간을 블랙박스(Black-box)와 화이트큐브(White-cube)를 구분하는 ‘그레이존(Gray-zone)’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그레이존은 화이트 큐브와 블랙박스가 결합했다는 사실보다 새로운 기술적 장치인 스마트폰을 매개로 하는 현재의 관람 방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클레어 비숍은 1980년대 이후의 극장이 점점 더 어떤 기술적인 숙련도를 보여 주는 장소로 변해갔다고 언급합니다. 근접성과 즉각성을 강조하는 실험적인 기술이 극장 내부의 테크닉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서 관객이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미술관에서의 화이트 큐브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한 기록의 장소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전시를 보는 관객들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립니다. 미술관 안에서의 퍼포먼스가 SNS 기록 중심의 관람 방식과 맞닿아 있는 지점을 설명합니다.

클레어 비숍은 고정된 사물 중심으로 구축되어있는 미술관의 영구적 시간성이 얼마나 공고한지를 설명합니다.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를 볼 때, ‘조각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조각적이라는 말은 미술관에서 쉽게 통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는 범주 안에 들어와 있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퍼포먼스는 본래 한시적이며 잡아 놓을 수 없는 상태인데, 미술관은 결과물을 붙잡고 남기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기에 퍼포먼스가 조각적인 형태를 보일 때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에서 느리거나 정지 동작이 많이 사용되는 경우는 미술작품과 전시환경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해독하기 편안한 광경일 것입니다.

<플라스틱(PLASTIC)>, 마리아 하사비(Maria Hassabi), 2016

마리아 하사비(Maria Hassabi)는 사이프러스 출신의 안무가이고 극장 작업뿐만 아니라 미술관에서도 퍼포먼스를 보여줍니다. 정지와 움직임 사이의 안무로서 몸은 아주 천천히 움직입니다. 이 안무가의 솔로 작품에서는 커다란 페르시안 카펫을 움직이며 춤을 추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때때로 얼굴과 신체 일부가 카펫에 가려지면서 설치 자체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상황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플라스틱(PLASTIC)>이라는 작품도 뉴욕 현대 미술관(MOMA)의 계단에서 퍼포머들이 매우 천천히 움직이는 상황을 그리고 있으며, 바쁘게 움직이던 관객들은 자신들의 속도와 대비되는 퍼포머의 움직임을 보며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레트로 스펙티브(Retro Spective)>, 자비에 르 로이(Xavier Le Roy), 2012

2012년에 처음 소개된 자비에 르 로이의 <레트로 스펙티브(Retro Spective)>는 회고전입니다. 미술에서는 중견작가가 자신의 작업 세계를 일괄하여 보여줄 시기가 되었을 때 회고전이라는 형식의 전시를 합니다. 자비에 르 로이는 자신의 안무 작업들을 모아 미술관에서 퍼포머의 몸을 통해 실행하는 회고전을 열었습니다. 앞서 보여드린 영상은 자비에가 몇 가지 장면을 설명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는 어떤 장면을 계속 반복하는 공간이고, 두 번째는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는 것 사이를 탐색하는 공간입니다. 자신의 기존 퍼포먼스에서 가져오지만, 회화나 조각처럼 정지된 순간을 만들려고 하는 스팟이 있고, 또 하나는 ‘인디비주얼 레트로 스펙티브(Indivisual Retro Spective)’로 자비에르의 공연에서 출발하지만 퍼포머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전시장에서 사람의 신체가 사물처럼 읽히면서 신체가 가지고 있는 주체성에 대해 질문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퍼포먼스를 미술관으로 가져왔을 때 신체의 사물화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의 질문입니다. 또한, 퍼포먼스는 관객의 주체성을 확장할 수 있는가, 신체는 유사오브제가 되는 동시에 유사 주체가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합니다.

그 맥락에서 자비에 르 로이는 우리가 때로는 신체를 사물처럼 느끼고 때로는 주체로서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퍼포먼스를 만들 때를 예로 들면, 퍼포머는 때때로 자신의 주체성을 안무가의 작품에 대입시키고 싶어하지만 때로는 의견에 따르거나 결정하기를 피하는 경우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서 대상이 되기도 하고 주체가 되기도 하는 전환의 과정이 전시장에서 퍼포먼스를 할 때 실험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상과 주체의 전환, 발화와 수용의 상태, 관객과 퍼포먼스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레트로스펙티브>를 구성하는 배경이라고 설명합니다. 한편, 이 퍼포먼스는 새로운 관객이 들어올 때마다 상황을 재배치하는데 비숍은 이를 웹페이지에 여러 개의 창이 떠져 있는 라이브 브라우저의 형식을 닮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파우스트(FAUST)>, 안네 임호프(Anne Imhof), 2017

안네 임호프(Anne Imhof)의 <파우스트(FAUST)>는 설치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작업으로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탄 리투아니아의 파빌리온의 작업 역시 오페라를 차용한 설치 작품으로 라이브 퍼포먼스를 진행하였습니다. 영상을 보시면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움직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강렬한 흐름의 움직임보다는 포즈가 강조되어 있고, 때로는 광고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관객과 퍼포머들 사이에 있는 거대한 유리 플로어는 거대한 터치스크린을 연상시킵니다. 이 작업에 대해 비숍은 물리적인 퍼포먼스를 보는 경험과 가상적으로 이미지를 보는 경험을 겹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비숍은 안드레 레페키가 기술이 관객의 주의집중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레페키는 구경꾼(Spectator)과 증인(Witness)을 구분합니다. 구경꾼은 수동적으로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사람이며, 증인은 집중하여 언어로 번역하고 다른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사람으로 모든 퍼포먼스를 제대로 관람한다고 말합니다. 비숍은 이제 관객들이 바뀌고 있으며 눈앞에 퍼포먼스가 있어도 주의집중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현재는 주의집중 하는 것과 주의집중 하지 않는 것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으며, 주의와 부주의의 경계가 사라지는 복잡한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화이트 큐브와 블랙박스 사이에 춤과 무용이 등장하는 ‘그레이 존’은 기술의 등장에 의한 주의집중과 주의 분산의 사이에 있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미술관에 개입하는 전시는 그런 면에서 모순적입니다. 이는 지속적으로 디지털 매체에 종속된 일상의 삶의 현상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속도에 저항하고, 일시적인 명상과 감속의 장소를 경험하려는 열망 두 가지를 다 반영합니다. 한편으로는 온라인 중심의 일상에 대한 반발로, 체화된 근접성, 공동의 공간, 물리적인 가까움, 장소에 대한 감각, 타인과의 소통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추동되면서, 동시에 우리의 경험을 디지털로 포착하고 유통하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한다는 것입니다.

무용인을 위한 렉처 시리즈 <춤추는 미술> ⓒ 서울문화재단

미술관에서의 공연예술에 관심을 가지는 또 다른 이유는 시각예술의 퍼포먼스가 옛날처럼 급진적이고 저항적이거나 제도 비판적인 작업을 잘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그런 작업은 액티비스트의 영역으로 넘기고 작업 자체는 보수화된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공연예술 작업이 감각에 대해 각성하며 정치적이고 비평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미술관에서 그 질문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앞서 보야나 스베이지와 안드레 레페키가 얘기한 90년대 이후의 무용의 자기 혁신, 정치적 비평적 가능성의 활성화의 효과를 여전히 안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미술관에서 춤을 보는 것은 관객으로서도 특정한 시간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퍼포먼스를 보는 것은 신체의 움직임이 붙잡고 있는 시간을 인지한다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관객의 관람 방식이 바뀌고 인지가 점점 분산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주의 깊은 인지가 여전히 가능한 영역이기도 합니다. 몸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신체의 변화, 인지되는 변화를 지속적으로 체크하려고 하게 됩니다. 춤을 미술관에서 본다는 것은, 시간성을 인지하게 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움직임을 만들고 반복하는 시간을 바라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합니다. 한편 춤은 작업이라는 노동의 형태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예술이기도 합니다. 작동과 생산을 연결하여 제도를 질문하는 측면이 자비에 르 로이의 <레트로 스펙티브>에도 담겨있습니다. 안무가에게 있어 미술관의 공간은 무대보다는 관객과의 접촉이 더 가까우며, 다양한 시점의 위치와 공간 이동을 통한 형식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아직 가능성과 질문, 의심과 충돌이 남아 있는 영역이 바로 미술관 안에서의 무용, 퍼포먼스입니다. 그 형식이 포괄하는 범위가 넓고, 특성상 유동적이고 또한 휘발하는 성격이 미술관의 고정된 분위기를 자극하고 역동적인 장소로 만들어 줄 수 있지만, 쉽게 그 어떤 대상보다 보수적으로 수용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고 문헌

Andre Lepecki, Dance, Choreography, and the Visual:Elements for a Contemporary Imagination, Is the Living Body the Last Thing Left Alive?: The New Performance Turn, Its Histories and Its Institutions, Sterngerg Press, 2015, p.12-19



Bojana Svejic,European Contemporary Dance, before Its Recent Arrival In the Museum, Is the Living Body the Last Thing Left Alive?: The New Performance Turn, Its Histories and Its Institutions, Sterngerg Press, 2015, p.29-33



Hal Foster, In praise of the actuality, Bad New Days: Art, Criticism, Emergency, verso books, 2015



Claire Bishop, Black Box, White Cube, Grey Zone: Dance Exhibitions and the Audience Attention, The Drama Review, Vol.62, n.2, Summer 2018, MIT Press, p.22-42

김해주_큐레이터 김해주는 큐레이터로 현재 아트선재센터 부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결정적 순간들: 공간사랑, 아카이브, 퍼포먼스》(아르코 예술자료원, 2015), 《무빙 / 이미지》(2016, 2017), 《이 연극의 제목은 없읍니다》(삼일로 창고극장, 2018)?등 공연예술과 퍼포먼스 관련 전시와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보다 최근에는 아트선재센터에서?《색맹의 섬》, 구동희, 리킷, 줄리앙 프레비유의 개인전, 《포인트 카운터 포인트』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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