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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9.06.14 조회 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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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 김채현 대담

자기 컨셉을 갖춘 창작자를 많이 기대합니다

웹진 <춤:in> 편집부

일시: 2019년 5월 6일 월요일 오후 2시
대담자: 남정호(무용가), 김채현(모더레이터, 춤 비평가)

국내 포스트모던 댄스 1세대 개척자인 무용가 남정호는 반세기 가까이 창작과 교육에 전념하며 한국 현대무용사를 관통해왔다. 1년 반 전 정년퇴직을 한 이후, 최근 솔로 작업을 선보이며 춤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는 그를 춤 비평가 김채현이 만나 한국 현대무용을 조망하는 한편, 오늘날 우리 춤 창작과 교육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왼쪽부터 김채현, 남정호 ⓒFotobee_이병곤
김채현: 요즘 사회에 정년은 과거에 비해 비중이 크지 않으나 개인에게는 자신이 속한 세계나 다른 사물을 넓은 각도로 볼 계기가 되리라 봅니다. 새로운 것을 준비하게 되는 거니까,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하고요. 선생님께서는 아직 정년이 되었다는 기분이 그다지 들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남정호: 정년은 멈출 정(停)자를 쓰지요? (웃음)
김채현: 네, 어디서 하는 작업이 멈췄다는 것이지 모든 게 멈추었다는 것은 아니지요. 저는 다른 장에서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해석하고 싶어요. 지난 4월에 선생님은 ‘서울국제즉흥춤축제’에서 공연하셨잖아요. 10분 정도 되는 즉흥 춤 소품(小品)을 독무로 혼자 하셨는데, 그걸 보면서 선생님께서는 정년 이후에도 작품활동을 놓지 않고 계속하신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죠. 최근 보여주신 그 공연은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전개됐는지 소개부터 하는 것이 어떨까요? 사람들은 궁금할 겁니다.
남정호: 정년을 맞고 나서, 작년 즉흥 축제에서는 일본 친구들과 함께 작업했고, 이번에는 혼자서 춤을 추었죠. 저는 ‘황홀한 고독’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혼자 있을 때 고독하지만 황홀해요. 그 상황을 한번 춤으로 맛보자고 생각했어요. 옛날에 제가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동요가 있었어요. 윤석중 시(詩), 윤극영 작곡의 동요 <배꽃>이라는 노랜데, “바람아 바람아 불어라. 배꽃아 배꽃아 떨어져라. 흰나비가 되어서 팔랑팔랑 날아라 날아라.” 최근에 그 노래가 저에게 오더라고요. 길거리에 다니면 흰 꽃잎이 마구 떨어지잖아요. 매화꽃이든 벚꽃이든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마치 나비가 팔랑이며 나는 듯, 나도 저렇게 편안하게 춤을 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번 춤은 트럼펫 하는 유태선씨에게 그 동요를 계속 반복해서 연주하도록 부탁했어요. 10분 정도 공연이니까 15번 반복하게 되더라고요.
김채현: 트럼펫 하는 유태선씨는 선생님 작품에서 10년 정도 음악으로 함께하시는 것 같아요. 선생님께 친숙한 음악 조력자 또는 감독이지 않겠나 싶은데….
남정호: 그렇죠. 이번에도 음악을 맡아주었어요. 작품에서 저는 꽃잎일 수도 있고, 들판에 꽃이 마구 떨어지면 그걸 잡으려고 뛰어다니던 어린아이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혼자서 꽃잎과 하늘과 바람과 땅이 되는 그런 춤을 한번 추고 싶었어요.
김채현: 작품 이름을 굳이 짓는다면….
남정호: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 되어> 정도가 좋겠어요.
김채현: 이 나이에 옛날 동요를 추상(追想), 그러니까 생각을 쫓아가면서 춤을 만든다는 게 어찌 보면 사람들에게 특이한 느낌을 줄 수 있겠어요. 결국, 사람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철들지 않는다는 원초적 심성도 있지 않나 싶어요.
남정호: 저에게는 항상 동요가 따라 다녀요. 선생님도 기억하시겠지만 “아이야 나오너라 달따러가자”와 같은 동요가 항상 마음속에 있었고 저를 지지해주었어요. 가끔 피곤할 때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따뜻함을 가진 그런 동요와 동시를 잊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정년을 맞으면 인생이 좀 변하지 않느냐 하셨는데요. 저도 사실 정년 전에는 약간의 공포가 있었어요. 한예종에서의 마지막 정기공연으로 학생들과 <구르는 돌처럼>이라는 작품을 만들었죠. 그 작품을 조금 바꿔서 하자고 해서 대안학교 학생들과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했고요. 밥 딜런의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을 자세히 보면 가사가 아주 잔인해요. ‘어떤 신세가 될 것인가? 구르는 돌.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한때 너는 잘 나갔었지.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너를 쳐다보지 않는다.’ 이런 내용인데 잔인하죠. 솔직히 말하면, 대학 시절에는 가사 내용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어요. 그저 리듬과 멜로디가 좋았죠. 그런데 밥 딜런이 노벨상을 탔고, 부끄럽게도 그제야 그의 가사들을 추적하게 되었죠.
김채현: 그것도 노벨문학상이에요. 음악상이 아니고. (웃음)
남정호: 네, 그래서 이 노래가 도대체 어떤 가사였을까 궁금하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밥 딜런의 노래 가사를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근데 이게 심오한 거예요. <Blowin' in the Wind>라든가 <Like a rolling stone> 등등 정말 굉장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고요. 내가 가사를 몰랐었지만 어떤 마력이 그 당시의 나를 흥분시켰고 지금까지 오래 나를 끌고 왔구나 싶었어요. 그동안 대학교수였기에 사람들이 인사도 했고 좋아하는 척도 했겠지만, 정년퇴직을 하면 발로 걷어차는 길거리의 돌이 분명히 될 거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돌이 될 것인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흥미로운 곳을 찾아서 누군가를 지지해주는 필요한 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여태까지 어딘가에 박혀있던 돌멩이가 이제 구를 곳을 자율적으로 결정하여 굴러다니면서 세상 구경도 하고 굉장한 자유를 누리는 돌이 될 것인가. 저도 어떻게든 그 선택의 공포를 극복하고 싶어서 작품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남정호 즉흥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 되어> ⓒ김채현
김채현: 다시 돌아와서, 즉흥 춤 축제에서 공연한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 되어>는 어떤 춤이었나요? 의상이 흰색이었고, 낙낙한 치마를 입으셨는데….
남정호: 어린아이들이 주로 입는 치마였어요. 허리에 고무줄이 있어 주름이 지어지고 약간 낙낙하게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하얀색 린넨 치마요. 그 위에 하얀색 짧은 반팔 블라우스를 입었고요.
김채현: 그런 의상을 입은 건 마찬가지로 동심의 기분에서인가요?
남정호: 그렇죠. 역시 흰색은 꽃잎을 생각했고요. 엄마가 어릴 때 만들어준 치마, 유년 때 많이 입은 옷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흰머리로 그 옷을 입으니 약간 할머니 옷 같기도 하네요.
김채현: 눈이 서린, 눈이 앉은 듯한 느낌도 들었어요.
남정호: 저는 평소에 짙은 색 옷을 좋아하지만, 무대에서는 거의 흰옷을 입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때가 묻거나 잘못될까 걱정되어 못 입지만 무대에서는 밝은색 옷을 입을 수 있죠.
김채현: 그리고 이번에 빨간색 양말도 신으셨잖아요. 어찌 보면 불균형, 부조화라고 할 수 있죠. 부조화 적인 색깔을 생각하면 과거의 시대상이 연상되기도 하고요. 색감의 조화라는 것이 인간에게 중요하지 않고 부차적인 사항일 테지만 세련된 색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부조화에 대해 뭔가 촌스럽고 유년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세상의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도 느낄 수 있어요. 어쨌든 빨간색이 임팩트를 주더라고요.
남정호: 빨간 양말은 안데르센의 <The Red Shoes> 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분홍신>으로 번역된 작품에 나오는 빨간 구두를 생각했어요. 그걸 신으면 춤을 춰야 하잖아요. 저는 빨간 구두를 신은 사람이에요. 구두는 움직임이 불편해서 양말로 대체했어요. 빨간 양말을 신으면 나는 원하든 원치 않든 춤을 추어야 한다. 춤을 춘다는 것은 하나의 선물이면서 조금 과장하면 저주일 수 있다, 어쨌든 춤을 추지 않으면 내 존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춤을 출 때 내 존재를 느끼는 거죠.
김채현: 이번 춤에서는 도는 춤, 회전무가 많이 보였어요. 수피댄스를 연상하게 했죠. 이전에 춤췄을 때와 다른 식으로 회전이 두드러져 보였는데 어떤 의미가 있을는지요?
남정호: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면 일 년이 지나죠. 돈다는 것은 시간성을 이야기해요. 나는 많은 시간 동안 살았고, 그 시간 동안 춤춰왔고, 또 춤을 출 거라는 시간성을 나타냈어요. 그리고 원이라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거니까 그 안에서 많은 동작을 포함하고 있죠. 많은 동작이 다 합쳐진 걸 어떻게 보면 도는 동작이 되니까요. 그런 면에서, 도는 움직임은 꽤 통쾌하더라고요. 마지막 즈음 현기증이 날 때가 있어요. 여기가 어디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죠. 혹은 지금 당장 쓰러질 수도 있는, 중심 잡기가 힘든 극한 상황으로 나 자신을 몰아붙이고, 관객 앞에서 나를 발가벗겼어요. 그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실험해보고 나를 완전히 드러내는 상태를 즐겨봤어요.
김채현: 그럼 해가 갈수록 더 많이 도시겠는데요? (웃음)
남정호: 모르죠. 제가 체력을 가지고 있는 한. 더 많이 돌긴 돌아야 해요. 나이가 들수록. (웃음)

남정호 ⓒFotobee_이병곤
김채현: 지난해 2월에는 일본에서 공연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남정호: 네, 제가 알고 있는 일본 무용가와 함께 했어요. 일본인 최초로 마사 그레이엄 무용단 정단원으로 활동했던 케이코 타케야라는 무용가인데, 남편도 유명한 일본 연출가예요. 그 부부가 가진 돈을 모두 털어서 요코하마에 조그마한 빌딩을 샀어요. 그 빌딩에 1층은 극장, 2층은 연습실, 3층은 레지던스를 만들어 춤과 연극 중심의 공연예술센터를 만들었죠. 그 극장 개관기념으로 공연했어요. 저하고는 개인적으로 다른 일을 같이 많이 했고 서로의 춤을 본 적도 많았지만, 함께 춤춘 적은 없었어요. 남편이 연출가니까 <베케트>같은 연극에 말 없는 배우로 자주 출연하기도 했고, 그레이엄 무용단에서 갈고 닦은 테크닉이 있어서 나이는 저보다 많지만 댄서의 기량은 굉장하죠. 그래서 같이 춤 한번 춰보자 했어요. 즉흥 춤을 해본 적 없지만, 최근에 즉흥이라는 것이 참 좋다면서 나와 함께라면 할 수 있겠다고 하더군요. 지금까지 열심히 무용을 해왔으니 지금부터는 자기를 믿고 정해진 것 말고 그 상황, 그 자리에서 움직이고 싶은 것을 real time composition, 실시간으로 구성하며 움직일 수 있다고 용기를 줬어요. 그리고 부토 댄서로서 독특한 작업을 해온 다케우치 야스히코라는 남자무용가도 합세하여 트리오 공연을 3일간 3번 그 극장에서 했는데,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부토만 해왔던 다케우치도 70대 중반, 케이코도 70대 초반, 제가 60대 중반인데 무용으로 인생을 살아온, 국적을 초월한 세 사람이 할 수 있는 춤을 3일 동안 주고받았죠. 문화는 다르지만, 각자의 춤을 춰온 나이 든 세 사람이 만나 함께 춤을 춘다는 건 아주 멋진 거구나. 언어는 다르지만 우리가 가진 몸의 언어는 거의 비슷하니까 통한다고나 할까, 이야기를 계속 연결할 수 있다고나 할까. 그런 친밀하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어요.

김채현 ⓒFotobee_이병곤
김채현: 앞으로도 신선한 느낌이 지속되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작품 생활도 오래 하셨고, 정년이라는 계기로 바라보는 시각이 더 넓어지면서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을 텐데요. 선생님께선 현대무용을 거의 50년 정도 해온 셈인데 선생님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한국의 현대무용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합니다. 한국의 현대무용을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조망해 본다면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남정호: 한마디로 말할 순 없겠죠. 제가 아직 완전히 그 안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있을 거고요. 우리가 처음으로 현대무용, 모던댄스라는 춤을 접했을 땐 미국이나 유럽에서 가져온 새로운 학문, 새로운 무용 스타일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했어요. 1963년 이화여대 무용과가 생겼잖아요. 그전에는 체육과에 무용전공이 있던 정도고요. 박외선 선생님이 일본의 타카다 세이코 무용연구소에서 수학하고 언론인 마해송씨와 결혼 후 잠깐 쉬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한국으로 오셔서 53년부터 이화여대 체육과에서 처음으로 창작 발레와 창작법을 지도했죠. 대학에서는 커리큘럼이 필요했고 그 모델은 미국 대학에서 갖고 온 것 같아요. 미국 대학에서는 현대무용이 주요 과목으로 짜여있거든요. 박외선 선생님은 일본서 타카다 세이코로부터 배운 무용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시고 방학 때마다 미국에서 연수도 받으시고 제자를 길러내기 위해 육완순 선생님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셨어요. 본토에서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을 배워온 육완순 선생님이 63년 개설된 이대 무용과에서 이를 가르치면서 본격적인 미국식 현대무용 교육이 시작됐고요. 박외선 선생님께서 프롤로그 역할을 해주셨죠.
김채현: 젊은 세대에게선 잊혀 가는 역사가 되고 있네요. 역사를 붙들지는 않더라도 역사를 기억해야 교훈도 얻고 오류도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말씀을 더 이어가시지요.
남정호: 우리나라 현대무용은 이렇게 대학에서 시작했거든요. 굉장히 아카데믹하게요. 이사도라 던컨을 생각하면 현대무용은 아카데미와 전혀 관계없고 오히려 체계적인 연습이 필요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발레가 아카데믹한데 말이죠. 현대무용은 굉장히 개인적이고 표현적이며 자신의 독특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으로부터 시작된 한국 현대무용은 대학 스타일을 갖게 됐고 어쩔 수 없이 개인의 개성보다는 어떤 테크닉을 연마시키는 경향을 취했어요. 이런 풍토에서 테크닉을 위주로 한 실기교육이 없다면 대학교수가 가르칠 게 없잖아요. 사상, 역사, 철학이라는 것을 가르칠 수 있겠지만 실기만 연마한 무용교수들에게는 부담스러울 터이고, 테크닉을 잘하게끔 어떻게 보면 테크닉이 가장 우선되도록 유도한 교육이 몇 십년 흘렀던 것 같아요. 현대무용은 발레의 기교에 반발해서 무용은 기교가 아니고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이라고 주장한 이사도라 던컨으로 부터 나왔는데 한국에서는 그 시작점과 다르게 현대무용은 다시 또 다른 기교 중심의 무용으로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됐죠. 1960대 말에서 70년대 초 미국의 포스트 모던댄스, 80년대 유럽의 누벨당스가 나타나며 세계의 무용 의식이 바뀌고 혁명이 일어났지만, 한국무용계는 그 상황을 감당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해외초청공연이 많아지니까 그걸 보고 흉내를 많이 낸 것 같아요. 새로운 무용혁명의 풍토에서 나온 그 결과물을 학습해야 할 또 하나의 새로운 사조로 받아들였다고 할까요. 90년대에 와서 컨템퍼러리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니 아직 동시대적 컨셉을 세울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내용은 그 대로 가고 포장만 바꾸어 말하게 되었지요. 자기 최면에 걸렸다고나 할까요. 너무 부정적 시각에서 말한 것 같아 좀 긍정적 자세를 가져보면 아직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무용계에서의 국립현대무용단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어요. 이제는 학교에서는 교육하고 무용단에서 예술적인 것을 하는 역할을 재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술감독의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전체 대한민국 현대무용 흐름에 신선한 영향을 주는 그런 역할을 국립현대무용단이 조금씩 해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창단 이후 이 땅의 젊은 안무가들에게 안무할 수 있는 기회를 꽤 주고 있죠. 자신의 작업을 분석하고 해부한다든지 드라마투르그 등 객관적인 외부시선도 받아들여 스스로 낯설게 보는 경험도 해 왔고요. 물론 전문가의 시선으로는 100프로 만족은 못하지만, 조금씩 변화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김채현: 1980년대 이래 국내 춤계가 창작을 중심으로 활성화됩니다. 그런 와중에 알맹이라 할 창작자의 자기 소신 또는 예술적 관점이 실하지 않은 맹점을 현대무용뿐 아니라 춤계 전반이 반복해왔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춤 공연은 아직 과도기의 양상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지요.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이 ‘현대무용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4월부터 10회 강좌를 열고 있어요. 첫 강좌 강연자로 저에게 제의가 와서 승낙했어요. 강좌를 들으러 예술의전당 회원들을 비롯해 생각보다 많은 분이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날따라 비가 오고 날이 궂어서 아무도 안 오겠다고 생각했는데 160명이나 온 거예요. 타이틀이 ‘현대무용의 이해’였어요. 낯선 현대무용, 이게 뭔지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거죠. 발레나 한국무용처럼 답이 있는 게 아닌데, 그래서 더 궁금하고 이걸 알아야 현대인 또는 문화인이 된다는 느낌도 있고…. 어쨌든 많이 와 계셨어요. 재미없는 현대무용이 여러분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게 놀랍다는 얘기를 했죠. 많은 사람이 방탄소년단의 춤과 현대무용을 헷갈릴 정도로 비슷하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요. (웃음) 현대무용이 이 땅에서 수행된 지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에 박외선 선생님부터 육완순 선생님을 필두로 대학에서의 현대무용교육이 이뤄졌고 80년대에 들어서는 각 대학 출신들의 동인 그룹 전성시대가 있었지요. 그 다음에 무용이 주역이 되는 교육기관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이 생겼고요. 그러고 보니 국가가 예술학교도 만들어주고 국립현대무용단, 서울무용센터와 같은 춤의 공공기관도 만들어줬네요. 이렇게 최근 공공이 춤을 지원하면서 이제야말로 서양 사람들이 잘 만들어 놓은 것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만든다는 인식이 더러 생긴 것 같아요. 저는 이 땅의 무용에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아요. 물론 너무 쉽게 얼렁뚱땅 작업한다거나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남이 한 것을 차용하거나 베끼는 후배나 제자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죠. 그렇지만 그것도 하나의 과정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결국에 그런 사람들은 어디까지 가다가는 도태되고 마니까요.
김채현: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서구의 것을 유입하는 단계에서 자기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과도기 혹은 이행기가 우리에겐 너무 긴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이행기에서 자기 것의 형성 내지는 도출을 위한 노력이 따라야 하고 그런 방향에서 분명한 자기의식을 갖고 행해야 한다는….
남정호: 네, 과도기 혹은 이행기가 길어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 역시 교육이 특히 테크닉 위주의 대학교육이 큰 걸림돌이 된 것 같아요. 저도 대학에 있었지만요. 그동안의 교육이 아티스트보다는 테크니션을 양산했지요. 가장 큰 문제점은 지금까지 계속 존재하는 무용대회죠. 군대 면제, 입시, 상금 등 달콤한 혜택에 젊은이들은 이끌리기 마련이니 상 타기 위하여 젊은 무용가들은 엄청난 노력을 하죠. 그런데 이런 무용대회가 정말 독특한 개성적인 예술가를 만드는 진도를 느리게 하고 있어요.
김채현: ‘발목을 잡고 있다’는 표현을 쓸 수 있겠네요.
남정호: 네, 저는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상당히 오래 전부터 기회가 있는 대로 얘기했는데 30여년 간 말하고 있네요. 바뀌지 않는 거죠. 무력감이 듭니다.
김채현: 우리는 컨템퍼러리 댄스 시대에 살고 있어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무정형’이거든요. 무정형의 시대에서 예술가가 자기로서의 예술가라고 한다면, 자기 메소드를 찾는데 열중해야하는 것이지 콩쿠르라든지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될 수 있는 경로나 이력에 연연해서는 안 되겠는데 대학이 오히려 그런 점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반성까지 해달라는 뜻이죠. 선생님께서는 소싯적부터 근 50년 가까이 현대무용을 해오셨잖아요. 그동안 과거의 인터뷰나 선생님의 글을 통해서 남정호 선생이 어떻게 현대무용에 입문하셨는지 알 사람들은 압니다. 그래도 오늘 이 자리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선생님의 현대무용 입문기와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면 좋겠어요.

왼쪽부터 김채현, 남정호 ⓒFotobee_이병곤
남정호: 처음에는 발레를 배웠어요. 제가 다닌 학교가 다행히도 예술과목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학교였어요. 부산성모여자중고등학교였는데 연말에는 항상 학예회가 있었고 연중에 운동회가 있었어요. 그때마다 제가 항상 앞에 나가 춤을 췄어요. 운동장에서 혼자서 <아베마리아> 음악에 맞춰서요. 운동회 시작을 그렇게 했던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웃음) 사진을 보면 검정 옷을 입고 운동장 한가운데서 춤을 추었어요. 무용선생님은 체육과 출신이시고 카운슬러이셨는데 저한테 음악을 주고 동작을 주시지 않아 그 음악에 맞추어 즉흥을 했어요. 연말 학예회 때도 이리저리 천사들의 춤, 성모마리아 춤 같은 걸 했어요. 그때부터 제가 한 게 아마도 현대무용이었네요. 어쨌든 연구소에서 발레를 배우고 이화여대에 발레전공으로 입학했죠. 들어가서 보니 발레라는 실상이 막연하게 꿈꿨던 분홍색의 예쁜 모습이 아니더라고요. 처절하게 훈련해야 했어요. 그리고 서양 사람들 사진이나 영상을 볼 수 있잖아요. 도저히 저는 안 되겠더라고요. 내 평생을 바쳐 따라해봤자 그들 같은 신체조건이 아니잖아요. 내 몸은 자그마하고 어깨는 좁고 다리는 짧고 말이죠. 그래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지?’라고 생각을 했어요. 발레 선생님과 약간 불화도 있었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현대무용으로 전환하게 됐죠. 제 성격이 반항적이라. 지금도 여전히 반항하는 면이 있죠. (웃음) 어릴 때부터 ‘왜요?’라는 말을 너무 잘해서 선생님들이 저를 보면 도망갔어요. 대학 가서 책도 좀 읽어보니까 저의 기질이 기교만 얌전히 고지식하게 익히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마침 이사도라 던컨을 책으로 접했고 던컨이 저의 대선배이자 아이돌이 됐어요. 그러면서 현대무용 전공으로 바꾼 건데 사실 대학에선 현대무용 수업이 육완순 선생님 한번, 박외선 선생님 한번 이렇게 일주일에 한두번 있을 뿐이었어요. 현대무용 기교 자체는 매력이 없었어요. 발레보다 오히려 매력 없었다 할까. 작품도 그렇게 매력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름대로 눈은 높았어요. 영화나 연극도 많이 봤고 책도 좀 읽고….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그래도 발레는 아니다, 그리고 이사도라 던컨과 같은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석사를 마치고 프랑스에 가게 됐죠. 프랑스 유학 중에 공연을 보고서 바로 이거야 싶었어요. 어떤 공연이든 그 자유로움, 상상력이 엄청 났어요. 답이 있는 게 아니라 어디로 갈지 모르는, 마지막까지 계속 주시하지 않으면 내가 챙길 게 없는 춤 작품들은 대본이 있는 연극과 달랐고 그래서 아주 매력적이더라고요. 밖에 나오면 평범한 사람, 무대에서는 요정이 아닌 인간, 그들이 가진 인간의 깊이를 잠시 엿볼 수 있게 해줬죠. 무대에서 내가 가진 또 하나의 나를 노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걸 발견하게 하는 춤을 춰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유학할 때는 머스 커닝햄 테크닉과 사상 “어떤 동작이든 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주류였는데 그걸 배웠죠.
김채현: 그럼 국내에서는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 위주로 공부했었고 유학에서는 머스 커닝햄 스타일을 배운 거죠?
남정호: 네, 커닝햄과 호세 리몽 스타일을 배웠어요. 호세 리몽 테크닉은 둥글어서 한국무용과 비슷하여 친근했어요. 커닝햄 테크닉은 낯설더라고요. 카운터도 복잡하고 단순한 거 같은데 여러 작전이 많이 들어있고 신체공학 적인 부분이 있었죠. 그 부분을 정복하고 싶었어요. 커닝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요. 커닝햄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라든가 그가 사용하는 테크닉, 하체는 발레고 상체는 그레이엄 테크닉인 것에 상당히 매료됐었어요. 다행히 어릴 때부터 했던 발레가 도움이 됐지요. 그렇게 유학을 마치고 프랑스 (장 고당의) 프로무용단에서도 작업할 수 있었어요. 그때 아주 잘하는 애들이 많았는데 하필 저를 뽑았는지 안무자에게 물어봤죠. 다른 사람이 안 가진 독특함, 아시아적인 부드러움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부드러운 춤을 춘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제가 부드러운 거예요. 한국에선 뾰족한 춤을 춘다고 들었는데. (웃음) 그 뒤로 서양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니까 나도 모르게 부드럽게 추더라고요. 어차피 그들이 잘 추는 뾰족한 춤을 같이 춰봤자 게임이 안 되니까 나도 모르게 느리고 부드럽게 움직였고 그건 그들이 흉내 내지 못하잖아요. 저의 작전이었겠죠. 그게 좀 먹혀들어갔고요. 당시 프랑스 누벨당스 초기의 냄새를 조금 맡을 수 있었어요. 그때는 의기양양했죠. 바뇰레 무용콩쿠르에 앙쥴랭 프렐조카주, 레진 쇼피노, 다니엘 라 리우 등 누벨당스 초기의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다 나와서 작품을 했고 수준이 너무 높았어요.
김채현: 그때가 79~81년 무렵이지요? 프랑스에서 컨템퍼러리댄스가 일어설 때 아닙니까?
남정호: 네, 맞아요. 정부에서 대폭적인 지원을 했지요. 안무대회, 무용센터가 활성화됐죠. 당시 피터 고스 무용스튜디오에서 테크닉을 연마했는데 마기 마랭도 가끔 배우러 왔어요. 무용가들이 예쁜 인형이 아니라 모두 철학자 같았어요. 안경 쓰고 춤을 추는데, 와우! 너무 멋진 거예요.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춤을 추려고 하는 걸 보니까 춤이라는 게 굉장한 거구나 싶고. 초기 누벨당스를 조금 맛보고 한국에 돌아왔죠.
김채현: 프랑스에선 3년 정도 계셨지요?
남정호: 네, 3년 반 있었어요. 짧은 시간이지만 3년 반을 깊숙이 그 안에 들어갔었어요.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부산 경성대학교에서 자리를 잡았지요. 서울에서는 이화여대 중심으로 하는 현대무용이 있잖아요. 부산에는 현대무용이 없었으니까 완전히 하얀 도화지였었어요. 거기선 제가 원하는 그림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었어요. 무용을 잘하건 못하건 가진 게 별로 없는 친구들에게 제가 가진 생각을 움직임으로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손잡고 밤을 새기도 하고, 바닷가에 가서 춤도 추고, 산에도 같이 올라가고 그런 아주 즐거운 시절을 보냈죠. 13년을 경성대에서 가르쳤어요. 부산은 제2의 도시인데 의외로 열등감이 많더라고요. 부산엔 문화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프랑스 남부에 아비뇽 같은 곳 있잖아요. 평소 파리가 중심이지만 여름 시즌엔 아비뇽이죠. 부산을 그렇게 만들어보자 생각해서 ‘부산여름무용축제’를 만들었어요. 학교의 조그마한 실험실습비를 가지고. 학생들과 방파제에서 춤을 췄어요. 처음엔 부산 사람들이 지나가다 보고, 그 다음해에는 지나치지 않고 멈추거나 앉아서 보고, 3회째에는 미리 와서 기다려 보는 거예요.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이런 것을 훨씬 더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김채현: 말하자면 예상외의 호응이군요.
남정호: 개인적으로 작품할 때는 저를 위해서 했지만, 경성대 부임 시절엔 저의 일터인 학교, 부산,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부산여름무용축제는 호응이 좋았죠. 8월 서울에 아무것도 없잖아요. 축제 초반엔 언론 중계차들이 부산까지 오고 서울의 무용평론가, 기자들이 부산을 찾아줬어요. 제가 서울 올라오고 나서도 20회까지 지속되었고 현재 부산시가 후원하는 부산국제무용제로 확장이 되는데 기여하게 되었다고 자부해요.
김채현: 그랬죠. 그때 상당히 활성화됐었어요.
남정호: 네, 부산 해변가 호텔을 협찬받는 등 여러 곳에서 꽤 직간접적으로 후원도 받았어요. 부산에 사는 보람, 부산에서만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을 강조하면서 퍽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지요.

남정호 ⓒFotobee_이병곤
김채현: 귀국 후 경성대에 부임하셨는데 초창기 때 공간사랑에서 ‘현대무용의 밤’인가요? 귀국공연을 하셨잖아요. 시리즈로 한 건가요?
남정호: 공간사랑 소극장 개관 5주년 기념으로 초청돼서 귀국 공연을 했어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왔는데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신세를 ‘춤지’의 조동화 선생님에게 한탄했더니 ‘공간 사랑’을 소개시켜주셨어요. 강준혁 극장장이 “공간소극장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솔로 3작품을 공연했죠. 첫 번째 작품이 <안녕하세요>인데 피나 바우쉬에게 영향을 받은 작품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니 피나 바우쉬의 <콘탁트호프(Kontakthof)>와 아주 비슷해요. 여자들이 자신을 소개하고, 무대를 돌아다니고, 남녀가 서로 만나 접촉하는 순간에 자신이 얼마나 정상적이고 매력적이며 괜찮은 존재인지 과시하고…. 그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바로 내가 하고 싶은 걸 피나가 다한 거예요. 제가 그걸 귀국하기 직전에 봤어요. 사실은 비행기 표를 물리고 피나 바우쉬 무용단에 가서 작업하고 싶었어요. 동시에 힘이 쫙 빠지더군요. 이 사람이 내가 막연하게 하고 싶은 거를 다해버렸는데 내가 뭐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한 게 있으니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게 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나중엔 그게 내 것인지 그 사람 건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웃음) 나중에 보니까 제가 그걸 많이 차용했더라고요. 혼자 솔로를 하는데 음악은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썼고 정면에 섰다가 90도씩 돌면서 내 신체의 우수함, 특별함, 정상을 과시하고 그랬죠. 당시 저희 어머니가 운동실조증에 걸리셨는데 모시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손가락 세어보기 같은 신체 기능을 테스트하는 동작을 시키더라고요. 그 동작을 나는 다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한번 해보기도 하고. 어쨌든 제가 볼 때 피나 바우쉬 <콘탁트호프>의 남정호 솔로판이에요. 세월이 많이 지나 돌이켜보니 부끄럽죠. 왜 내가 그걸 했지? 싶은데…. 그걸 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꼭 하고 싶은, 저 자리에서 나도 하고 싶었던 것을 비로소 했기 때문에 거기서 졸업할 수 있었던 거죠.
김채현: 컨템퍼러리 댄스로 나아가기 위해서 남정호 선생에게는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통과의례였던 셈입니다.
남정호: 그렇죠, 통과의례 같은 거였어요. 예쁜 드레스 입고 뾰족구두를 신고, 피나 바우쉬 같은 이미지를 다 해본 거예요. 의자에 앉아서 “안녕하세요”를 말해요. 프랑스에서는 ‘봉쥬르’라고 하죠.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봉주르!’ 나는 너의 적이 아니라는 인사죠. 자동으로 나오기도 하고, 무성의한 인사도 있어요. 때로 사람들은 그 말을 하면서도 서로가 경계하고 누군가 벨을 누르면 바로 문을 열지 못하고 살펴보기도 하고요. 사실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척 하잖아요. 가식적 자기 방어를 봉주르라는 말로 한다, 그런 뜻이 <안녕하세요>에 있었어요. 컨셉은 저의 것이었지요. 두 번째 작품 <대각선>에서는 한 사선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동작을 여러 다른 에너지로 실행하는 작품이에요. 느리게 또 빠르게, 세 박자로 또 스타카토로 움직였어요. 무음악이었고 공연할 때마다 소요시간이 다른 작품이었어요. 특히 느린 버전에서는 시간성을 너무나도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지요. 컨셉츄얼한 작품이었어요. 머스 커닝햄적이었고요. 세 번째는 <계속>이라는 작품인데 이건 트리샤 브라운적이에요.
김채현: 혹시 트리샤 브라운의 <축적(Accumulation)>인가요?
남정호: 네, 맞아요. (웃음) 점 다섯 개를 놓고 각각의 점에 지정해 놓은 움직임들을 해요. 뛰기, 돌기, 떨어지기, 소리하기, 이상적인 포즈 취하기를 하는 거죠.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가서 동작을 반복해요. 그 지점에 가면 무조건 해야 하는 움직임들이 축적되는 거예요. 사실 유학할 때 이런 방식 공부를 했던 것이었어요. 나중에 보니 트리샤 브라운 스타일과 비슷하더라고요. 30분 논스톱으로 뛰고 돌고 일어나고 하면서 체력을 과시했죠. 그걸 본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얘기하는 걸 보니 꽤나 강렬했나 봐요. 그렇게 솔로작품 3개를 선보이고 대한민국 무용계에 첫 발을 디뎠어요.
김채현: 발표한 세 작품은 해외 유학에서 익혔던 걸 선보인 것이고 이후 그 틀을 벗어났다고 했잖아요. 당시에 틀을 벗어나게 됐다는 자각이 들었습니까?
남정호: 자각은 그 이후에 들었죠. 처음에 솔로 했을 때는 제가 3년 반 동안 프랑스에서 뭘 공부했는지 보여준 학습 보고서였어요.
김채현: 그때는 해외 춤의 동향이나 흐름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었으니까….
남정호: 그렇죠. 그러니까 아무래도 미국 무용, 특히 그레이엄 테크닉 위주의 한국 무용계에선 상당히 신선했을 것 같아요.

남정호 ⓒFotobee_이병곤
김채현: 예술계의 1차 자료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작품입니다. 또 하나는 작품을 한평생 추구해 오신 분들의 술회(述懷)예요. 우리 춤계는 술회가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점을 등한시해온 거는 반성해야 할 터입니다. 1차 사료로서의 술회를 중시하여 그동안 작품을 해온 선생님의 입장에서 한국 현대무용의 흐름을 일별해보면 어떻겠는가, 말하자면 1980년대 이후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몇 가지 중요한 흐름이나 조류를 짚어보면 어떨까요? 현장에서 작업에 전념해 오신 분의 의견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남정호: 80년대가 무용의 르네상스라고 했잖아요. 경제가 발전하면서 지원제도가 마련됐어요. 1979년에 시작된 대한민국무용제는 자기가 가진 모든 재능을 많은 무용수와 함께하는 큰 규모의 극장식 춤, 스팩타클 댄스를 만들게 한 장이었죠. 대한민국무용제가 초창기 현대무용에 기여했어요. 저도 거기에 참여했고 상은 타지 않았지만 이런 작품을 한다고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어요. 그리고 1987년 현대춤작가전이 만들어져 초기의 무용가를 춤 작가로 명명하면서 작가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며 솔로작업을 하게 했어요. 저도 이 작가전을 통하여 <자화상>, <달따는 아이>, <가시리>, <신부> 등 독무를 만들었죠. 동시에 아까 잠깐 이야기가 나왔지만 동인춤 전성시대가 되고 무용과 출신들이 출신대학을 중심으로 춤 활동을 지속했죠.
김채현: 동인보다는 대학 중심의 동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남정호: 그렇지요. 그 시기를 거쳐서, 제가 재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199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의 개원이 한국 춤계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된 것 같아요. 특히 국내 무용대학이 실기 위주의 교육을 했다면 한예종은 실기를 비롯해 이론과, 창작과를 신설해서 교육했죠. 음악의 작곡처럼, 연극의 연출이나 극작처럼 무용창작의 특성을 창작과에서 습득하게 됐고 이론과도 마찬가지예요. 무용 중심의 특화된 교육을 하는, 춤 전문가를 양성시키는 기관이 생긴 거죠. 이전에 대학 무용과는 교수님 작품에 출연해서 춤을 잘 출 수 있는 무용수 양성이 중심이었어요. 자신의 경험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해도 왜 춤을 추고, 어느 정도에 있는지 외부적인 시각으로 자기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그런 여지는 못 준 것 같아요. 한예종 무용원 창작과에서는 자신을 낯설게 보는 작업들, 예를 들어 시대 안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테크닉에 너무 연연하지 않은가 등을 끊임없이 자문하게 해요. 특히 전문사 같은 경우에는 국내 명문대에서 수학한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보장된 직업을 마다하고 춤이 좋아서 전공으로 전향해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리고 언젠가부터 학교 졸업생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코드를 갖고 무용계에서 작업하는 걸 볼 수 있었어요. 혁명의 주역들이 나올 게 아닌가 감히 그렇게 생각도 해요.
김채현: 최근의 컨템퍼러리 댄스는 창작자 자신의 초상, 자화상을 예술로 정립해 나가려 하는 과도기에 있다고 볼 수 있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외에서 유입된 사조 자체가 다양해졌다는 거예요. 굳이 무용원의 설립이 아니더라도 90년대 중반부터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 춤을 수련한 무용인들이 많이 등장했어요. 그런 사실이 한국 현대무용의 흐름에 무용원 이상으로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남정호: 동감해요. 학교에 창작과가 생기면서 입시에서 즉흥력을 보니 고등학교에서도 즉흥을 가르치더라고요. 어쨌든 대학에서 하는 것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겠죠.
김채현: 입시가 교육과정을 결정짓는다는 것이군요.
남정호: 그렇죠. 어릴 때부터 즉흥춤 수련의 기회를 갖게 되어 자신의 춤을 찾는 작업을 졸업 후에도 추구할 수 있게 됐어요. 국내에서 점차 테크니션이 아닌 무용작가로서 무용을 리서치하는, 움직임으로, 콘셉트로 연구하는 집단이 생겨났고 동시에 해외에서 돌아온 무용가들의 많아졌는데 그들의 신선함이 한국 현대무용계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이죠.

김채현 ⓒFotobee_이병곤
김채현: 90년대 중반 한국 현대무용계가 세대교체를 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때 우연의 일치로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대개 유럽에서 현대무용을 전문으로 하신 분들이 많이 돌아와서 국내 무용계에 다양화라는 각성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 나눈 한국 현대무용계의 흐름에 비추어 선생님께서 걸어온 길을 어떻게 진단하시는지요?
남정호: 무용가는 공연예술가잖아요. 무용은 완성되면서 소멸됩니다. 그래서인지 그 자리에서 내 것을 보는 관객에게 사랑과 이해, 공감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어요. 부산에서의 작업이 어쨌든 부산 땅에서 이해되었으면 했고 나와 함께 하는 무용수들도 좋아하기를 바랐어요. 수준이 낮아졌다기보다는 기본 혹은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는, 부산 풍토에서 만들 수 있는 음식을 만들었던 거죠. 그때 ‘유희’라는 화두가 나왔어요. ‘놀자, 무대에서 열심히 놀면 관객도 그 놀이에 참여하고 싶어질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김채현: 그러니까 놀이적 마인드를 춤 공연에 도입하려고 노력하셨다는 거군요.
남정호: 네, 맞아요. 제 성격과도 잘 맞았고요. 긍정적이면서 노는 거 좋아하니까요. 우리끼리 재미있게 무대에서 놀자, 놀 적에 우리의 구조를 가지고 재미있게 놀면 보는 관객도 자연스레 우리의 구조를 이해할 것이고 그 사람들의 호흡과 근육도 우리처럼 같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믿었어요. 부산에서는 계속해서 유희라는 화두를 던졌어요. 혼자 할 때는 고독한 유희. 지금까지도 유희 정신은 남아있어요. 그때는 낙관적인 시선이었던 것 같아요. 부산이라는 환경이 저를 참 편하게 해주었거든요. 옆에 친정이 있고 유년기를 같이 보낸 친구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죠. 재능기부도 많이 해주셨어요. 부산에서 재밌게 했던 작업이 서울 무대에서 눈에 띄어 한예종 교수를 위촉받았다고 생각해요. 서울에 와서 무용원에 창작과를 만들었고 대한민국에 무용수는 많은데 안무자는 없다, 안무자를 키워야하므로 내가 감히 총대를 메겠다는 갸륵한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느라 저의 활동을 많이 접었던 것 같아요. 춤을 너무 좋아하는데 말이죠. 그 대신 학생들이 작업할 수 있게끔 도와줬어요. 춤을 너무도 추고 싶어 어쩔 수 없을 때는 즉흥춤페스티벌 같은 곳에서 춤추고요. 아직 미숙한 젊은 아이가 교육을 통해서 행동이 바뀌고 생각도, 작품도 변해 가는데 그때 제 소임을 다하는 것이 굉장히 재밌더라고요. 그렇게 학생의 멘토로서, 또는 자신만의 수업을 개발하고 또 학생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외부 강사들을 초청하는 등의 선생으로서의 일을 귀찮아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왼쪽부터 김채현, 남정호 ⓒFotobee_이병곤
김채현: 아까 말씀 중에 컨템퍼러리 댄스 시대에서 암기식 또는 정형화된 모던댄스에 머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지금은 과도기이자 이행기라고 하셨어요. 그것이 우리 춤계에 하나의 과제가 되겠죠. 그 과정에서도 한국 현대무용이 갖는 특성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한국의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컨템퍼러리 댄스는 유럽이나 미국 등 해외의 것에 비해 긍정적 특성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남정호: 한국인은 가무를 즐기는 민족이잖아요. 특히 현대무용은 자유로운 춤이니까 비록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으로 시작했지만 음악에 맞춰 춤을 즐기는 재능, 그 특성이 나타나기 마련이죠. 꼭 작품성을 따지지 않더라도 춤만 봐도 즐거운 좋은 춤꾼들이 많이 있어요.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사람들도 있고 동시에 국내에도 꽤 있고요. 많은 외국인이 한국에서 일어나는 춤 공연을 보고 무용수들의 기량에 깜짝 놀라는 것 같아요. 한국의 무용가들은 어릴 때부터 춤추기 시작해 콩쿠르와 입시를 거치며 뛰어난 기량을 갖추죠. 춤을 좋아하고 잘 추는 기질도 갖췄고요. 백업댄서만 보더라도 리듬을 타잖아요. 일본의 어느 무용평론가가 몇 년 전에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를 비교한 적 있었어요. 저는 아사다 마오가 테크닉에 연연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나도 하지 못하는 것을 봤어요. 그에 비해 김연아는 춤을 추잖아요. 아사다 마오와 김연아를 통해 일본과 한국의 춤을 연상할 수 있어요. 한국은 동작과 동작을 다 곡선으로 연결하거든요. 일본은 세부적인 것을 잘하려다보니 연결이 안 되고요. 똑같은 동작을 해도 프랑스 사람들은 향기롭게 처리한다면 한국은 된장 고추장 맛처럼 구수하고 둥글게 하고, 일본은 와사비처럼 톡 쏘듯 하죠. 우리 춤은 참 맛깔스러워요. 춤을 잘 추는 것이 한국 무용수들의 가장 긍정적인 특성이죠. 그런 말이 있어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오히려 너무나도 춤을 잘 추기 때문에 춤을 과시하고 싶어 논리적 구조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요. 그래서 좋은 작품이 잘 나오지 않는 것 같고요.
김채현: 춤을 잘 추는 것에 안주하는 위험도 따른다는 거죠.
남정호: 그렇죠, 안주하고 그냥 즐기는 거예요. 근데 그게 일반 관객 입장에서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춤 잘 추는 무용수를 보는 것만큼 기분 좋은 거 없잖아요. 저희 같은 전문가들이 따져보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지만요. 일단 춤을 재밌게 맛깔스럽게 추니까 그것이 한국 현대무용의 가장 강점이 아닌가 싶어요. 그 강점을 위축시키진 않았으면 해요. 사실 저는 춤 잘 추는 사람이 안무하는 건 반대해요. 잘 추는 사람은 춤을 즐기고, 안무자나 매개자, 컴포저가 그들이 그 춤을 잘 추게끔 적재적소에 잘 기용하고 이를 한 데 모아 구성하는, 그렇게 춤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봐요. 한 사람에게서 이성적인 동시에 감성적인 작업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무리하게 포장하지 말고 협력을 통해 작업해야 한다는 거죠.
김채현: 현대춤에서도 적절한 분업체계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시네요. 한 사람이 할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고 분업이 명백하다면 이를 모을 수 있는 컴포저 역할이 중요하고요. 이제까지 그런 점이 간과되어 왔지요.
남정호: 그렇죠, 분업이면서 통합이 중요해요. 최근 이런 협업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는데 그럴 때 서로가 주눅 들지 않고 도와줄 수 있어야 해요. 그 과정에서 간혹 무용수가 스스로 지적으로 개발되지 않은 것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게 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협력하는 것이 좋겠죠. 우리는 드라마투르그가 굉장히 부족해요. 무용을 잘하는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무용만 했기 때문에 책을 읽을 시간도 없었고 해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시작해서 과정을 거쳐 마무리되어야 하는지, 그게 부족하니까 20분짜리 작품에서 춤은 정말 잘 추는데 5분만 보고 나면 다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계속해서 20분을 끌고 나갈 수 있도록 드라마투르그와 같은 역할이 도왔으면 해요. 무엇보다 스스로 개발한다면 더욱 좋겠죠. 근데 그게 쉽진 않잖아요.
김채현: 자신이 개발하려면 그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하거든요. 각성을 갖도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교육인데, 현재는 그런 측면에서의 교육을 소홀히 하는 것 같아요. 아예 누락이 되어있거나. 그렇게 되려면 소크라테스 식의 산파법이라 할까. 묻고 답하는, 물음을 갖고 답을 찾아 나아가는 교육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국 현대무용의 자산이라 할 수 있는 특성을 살려나가는 것이 당면한 과제일 겁니다.
남정호: 춤 잘 추는 무용수들을 데리고 좋은 작품을 만들려면 작전이 필요해요.

왼쪽부터 김채현, 남정호 ⓒFotobee_이병곤
김채현: 창작과를 창설할 때 동참하셨고 교육에 열중해 오셨습니다. 창작의 길에 나서는 후진들이 꼭 무엇을 갖춰야 하는지, 그리고 갖추기 위한 방법이나 경로 등 준비사항도 있을 거고요. 포괄적인 측면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활동과 노력을 해야 하는지 조언해 주셨으면 합니다.
남정호: 자기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자기의 다름에 대해서 자각할 수 있어야할 것 같아요. 그게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채현: 왜 자기의 다름을 찾아야 하죠?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어요. 왜 나는 무용가로서, 예술가로서 자기의 다름을 자각해야 하는가? 다름을 자각하기 전에 나 자신을 파악해야 한다는 말씀 같습니다만….
남정호: ‘너 자신을 알라’로 귀결되는 것 같네요. (웃음) 창문 열어놓고, 남의 것을 열심히 보고, 영향도 받고, 바람도 맞고, 햇빛을 쐬면서도 잘 자라는 나무처럼 자신의 뿌리는 밑으로 내려야한다는 거죠. 자기를 낯설게,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경험이 필요해요.
김채현: 테크닉 위주의 사고에서도 자신의 다름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형식을 잣대로 해서 기량의 부족함이나 나음을 파악할 수 있고 무용수라면 이런 점을 자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각 속에는 다름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자각은 없다 봅니다. 기량의 수준 차이를 기준으로 한 자각은 신체 조건이나 수련의 차이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어쩌면 아주 텅빈 반성이겠지요. 테크니션을 부정할 일은 아니고, 테크니션의 자기 확신이 전제되어야 하겠습니다. 도대체 왜 이것을 해야 하지? 자기가 익숙하게 해온 것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통해서 자신을 더 잘 파악해야 된다? 테크닉을 잘하든 못 하든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또 테크닉 뿐만 아니라 습관적으로 익혀온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이 하는 것을 대상화시켜 나름 따져 묻는 스스로 훈련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러면 테크닉에 대한 시야도 오히려 넓어질 것으로 봅니다.
남정호: 그렇죠, 거리를 두고 다른 사람하고 같은 것과 다른 것을 해보는 경험이 중요해요. 그리고 무용의 경우에는 다양한 테크닉을 경험해보는 것도 요구돼요. 다양한 신체 움직임을 해보는 것이 좋아요. 그게 꼭 춤이 아니고 수영이라도, 무술이라도 말이죠. 몸의 움직임, 몸의 다양성을 자기 몸으로 체득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 저는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쇼를 보여주고 있다’는 말을 좋아해요. 일상을 하나의 쇼로 볼 수 있는 관찰자 눈을 가지는 것, 어떻게 보면 조금은 냉소적이고 이성적이죠. 그런 시각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어떤 때에는 맹목적인 순간이 필요해요. 예를 들어 맹목적으로 잘 뛰기 위해서 땀을 흘리는 것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몸에 집중하는 순간도 필요하다는 거죠. 우리가 부정적으로 얘기했던 테크니션이 되기 위한 그 훈련, 어떤 과정에서 테크닉이 습득되는지 신체의 한계를 극복해보는 과정도 있어야 해요.
김채현: 몸에 대한 몰두라고 할까요?
남정호: 네, 다른 걸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그것만 하는 수련과 같아요. 불교에서 위파사나(Vipassanā)라는 수행이 있거든요. 그처럼 몸에만 집중하는 거죠.
김채현: 집중할 적에 의식이 완전히 놓아지는 것은 아니죠? 의식이라는 것이 몸 외부, 바깥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자기 몸의 흐름에 집중하는 거라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남정호: 네, 그렇죠. 종교에서 말하는 ‘분심(分心)’을 갖지 말라는 것과 상통해요. 이성적으로 거리를 두고 보면 많은 잡념이 생기잖아요. 너와 나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나는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등 그런 이성적인 상황도 챙기면서 동시에 잡념을 버리고 완전히 자기 몸에만 집중하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춤 창작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에요. 굉장히 어려운 길이에요. 처음부터 나는 창작하겠다, 좋은 작품 내겠다고 욕심내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질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는 이거 하고 싶다, 이게 너무 좋다 하면서 놀다 보면 어느 날 선물처럼 주어지는 게 아닐까. 신이 왜 인간을 만들었을까, 어쩌면 장난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해봐요. 굉장한 걸 만들겠다고 욕심 부렸으면 우리 같이 이렇게 멋진 존재가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이야기 같기도 한데, 너무 계산하면 오히려 얻기 힘든 것이 좋은 작품이지 않나 싶어요. 창작을 위한 준비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것 같아요. 가진 것을 강점을 증진하면서 모자란 것도 보충해야 하니까 사람마다 개별적인 문제예요. ‘나 창작하겠어’라기 보다 ‘무용이 좋아. 춤추고 싶어’라는 마음으로 하다가 자기만의 것이 되었다는 게 정답이지 않을까…. 그리고 아무나 창작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무용대학을 나왔다거나 춤을 잘 춘다는 이유로 무용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춤을 하고 싶지만, 아직 생각이 뚜렷하진 않은 때 여러 협업과정을 해보고, 그러다 생각이 명확해지면 할 수 있겠죠. 어떤 사람들은 이른 20대에 좋은 작품을 선보이기도 해요. 반면 일본의 오노 가즈오 같은 사람은 대표작이 아주 늦게 나왔죠. 70대에 <라 아르헨티나 쇼(아르헨티나를 찬양하며)>를 발표해서 세계적인 무용가로 명명됐어요. 시간을 갖고 해야겠어요. 그러면서도 ‘이거 아니면 안되’라는 생각, 춤에 혼신을 다하는 마음가짐은 반드시 필요해요.
김채현: 어떤 명확한 대가를 염두에 두고 세상일을 해선 안 된다는 말을 종종 듣거든요. 그게 무슨 뜻인가를 새겨볼 만합니다. 명확한 대가를 보장받는다든지 염두에 두면 목적 자체가 흐려질 수 있어요. 그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나 호기심을 갖거나 몰두하는 것이 사회와 주변의 요구와 일치하는 걸 파악하는, 그 정도의 혜안은 필요한 것 같고요.
남정호: 그럴 때는 인문학적인 어느 정도의 소양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나 너무 또 이성적인 사람은 작품이 재미없더라고요. 무용에선 참 애매모호한데… 제롬 벨, 자비에 르 루아 같은 사람들 실험적인 작품 보여줬고 아주 좋았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만 있으면 또 재미없지 않나요. 이성적이기보다 춤 자체를 보여주는 무용가도 필요해요. 자기가 제일 잘하는 것인 뭔지를 생각하고 자기 것을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김채현: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두해야 함과 더불어 특히 창작자는 몸적인 인식과 이성적 인식의 경계를 자주 넘나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오가는 수련이 사실 대학에서 활성화되었으면 합니다. 대학에서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서 저버릴 일도 아니고요. 힘들지만 그런 과정 자체가 좋은 작품을 만드는데 아주 중요해 보여요.
남정호: 선생님 말씀, 전적으로 동감해요. 설사 교육환경에서 제공하지 않더라도 개인이 정보를 가질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자신이 필요한 것을 섭취할 수 있는 자율적인 선택이 필요하죠. 그리고 예술성과 시장성을 놓고 볼 때 시장성에 너무 연연하지 않았으면 해요. 근데 그게 잔인한 말이잖아요. 생계가 보장된 경우라면 모를까. 시장성이 없어서 아무도 안 사간다면 밥도 못 먹고 예술 하란 말이냐 싶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잘 팔리는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면 저는 일단 시장성에 연연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요. 아주 이율배반적이죠. 저희 세대의 선배들, 그러니까 초기 한국의 무용가들은 무용하기 위해서 집을 팔았다고 그러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내가 가진 것만큼 작품을 만들라는 주의예요. 요즘은 지원금이 나와야만 작품 하겠다는 분위기 같은데, 젊은 친구들이 지원금에 너무 매달리면서 순수함이 없다고나 할까. 사랑하는 사람과 라면을 먹을 것인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스테이크를 먹을 것인가. 선택의 문제겠죠.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인간은 누구나 진짜 사랑이라면 라면을 먹어도 좋다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겠나 싶어요. 당신이 진짜 무용가라면, 무용을 정말 사랑한다면, 춤 작품을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라면을 먹는 것도 감수하지 않겠느냐는 거죠. 70년대 포스트모던 댄스 사람들, 많은 예술가들이 자기만의 작품을 하기 위해 아르바이트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해냈잖아요. 그 각오를 갖고 한번 해보라는 말씀을 감히 드리고 싶어요. 저 역시 유학 시절에 집에서 돈 한 푼 받지 않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 레스토랑 아르바이트, 대타 강사를 하면서 무용을 했어요. 지금 생각하니 그게 저한테 제일 큰 도움이 된 거예요. 그렇게 어렵게 터득한 것이니 지킬 수 있었던 거죠. 어렵다고 불평하지만, 대한민국 전체의 경제 수준이 올라간 현재, 특히 젊은 예술가들의 상황은 우리가 보기에 상당히 쾌적한 상태거든요. 그런 환경을 활용하되 불평하지 말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혼신을 다해보는 자세를 갖추면 어떨까. 감히!
김채현: 젊은 세대를 비롯해 저마다 어려운 사정이 많은 점을 고려해 보면 그런 측면이 조심스럽긴 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흐름은 춤 교육의 한계를 딛고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보자, 동시에 노력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겠지요. 오늘 대담을 통해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슬기롭게 파악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긴 시간 동안 말씀 감사드립니다.
정리. 웹진<춤:in> 편집위원 김인아

남정호_무용가 즉흥무용가. 무용교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김채현_춤비평가 예술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민음사),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사회평론)를 비롯 다수의 논문, 그리고 ≪우리 무용 100년≫(현암사) 등의 공저와 ≪춤≫(청년사), ≪미적 체험의 현상학≫(민음사) 등의 역서 20여 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춤 영상 문고를 개설할 예정이다.

웹진 <춤:in>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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