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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8.05.14 조회 6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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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적 예술로 진화하는 장애인 예술의 해외동향

오세형_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사업운영팀장

장애인 예술의 현재
2007년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많은 지자체에서 관련 조례를 만들었다. 최근에는 문화예술과 관련하여 ‘장애인 문화예술지원 조례’가 광역지자체를 중심으로 수립되었는데, 2018년 현재 17개 광역자자체중 11곳이 제정을 마쳤다. 주요내용에는 장애인 예술활동의 실태조사, 기본계획 수립, 장애인예술가 육성 및 지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조례 중 재미있는 항목은 ‘장애인문화예술단체’를 규정하는 항목인데, 2년 이상의 활동과 20명 이상의 회원 등 기존 지자체에서 지원하던 문화예술단체에 적용하던 기준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부분, 그리고 장애인예술가를 ‘장애인복지법’에 의한 ‘등록장애인이면서 문화예술활동을 하는 자’로 규정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예술과 의학의 콜라보레이션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무난해 보이는 이 기준의 앞뒤 어디를 뒤져봐도 장애인 예술활동의 성격이나 정체성이 어떠한 것이라는 표현의 실마리조차 찾기 어렵다. 결국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지원하겠다는 관점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고, 그 대상인 장애인예술가를 의학적인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는 간접적 규정이라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국내 장애인 문화정책의 현주소다.
최근 영국, 호주 등 서구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다양성에 대한 논의의 핵심에는 장애인 예술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황에 대해 국내에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특히 장애인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여겨지고 있는 ‘포용적 예술(inclusive arts)’ 또는 ‘포용적 예술활동(inclusive arts practice)’은 장애인 예술의 지평을 근본적으로 넓히는 역할을 넘어 기존의 문화예술정책과 예술영역 전반에 눈에 띌만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 발단이 된 것이 영국의 ‘평등과 다양성법’ 제정이었다. 이 법의 제정 이후 영국 정부는 적극적으로 문화다양성 정책을 전면에 내세워왔고, 그 정책의 시행기관인 영국 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다양성 정책을 5대 정책전략 중의 하나로 놓고 있다. 소수자의 문화적 권리향상을 위한 문화다양성 정책을 시혜적이거나 보호적인 관점이 아니라 국가가 지향하는 ‘창조적 역량’의 핵심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들 국가가 비록 다인종사회라는 특징이 있어 문화다양성의 감수성에 일찍부터 노출되었다고 해도 애초부터 내부적인 구성원이었던 장애인을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잠재적 창조자’로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은 우리처럼 의학적 모델과 사회적 모델이 혼종되어 정책의 방향성이 아직 모호한 국가의 정책에 큰 시사점을 준다.
국내에서 의학적 관점의 영향력은 장애인예술 전시회에 가보면 알 수 있다. 많은 전시회의 작품 옆에는 으레 ‘00장애 0급’이라고 병기되어 있고, 관객은 작품을 보고나면 작품제목과 함께 장애등급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전시에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지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의 작품이 같이 전시되는 것을 보게 된다. 자폐증이나 발달장애 예술가의 그림과 그렇지 않은 작가의 그림은 장애인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공유되는 지점이 없으며 창작동기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출발한 것인데도 그렇다. 이러한 프로그램 기획의 관행들은 장애인 예술작품의 예술적인 맥락이나 작품에 대한 예술적 평가를 논외로 하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해외의 ‘포용적 예술활동’과 정책
호주의 장애인예술 전문기관인 Arts Access Victoria에서는 2015년 영국, 미국, 호주의 광범위한 사례조사를 통해 ‘포용적 예술활동’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예술 활동과 관련된 창의적 활동과 미학적 전략의 범주를 포괄하는 다차원적 영역’이라는 개념이라고 제안하는1)보고서를 발표했다. ‘미학적 전략’이라는 표현이 매우 반가웠는데, 여기에서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법적인 의무감 속에 잠겨있는 장애인에 대한 시혜적 관점을 떠나 장애인 예술이 지닌 예술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다루겠다는 의지였다. 이 보고서의 연구결과에서 흥미로운 점은 포용적 예술계(inclusive arts field)를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과 장애(arts and disability), 장애 예술(disability arts), 장애인 예술가(artists with disability)가 그것인데, ‘예술과 장애’는 주로 학습장애를 지닌 장애인 예술가와 비장애인 예술가와의 협업을 말하는 것이며 영국과 호주에서 포용적 예술의 가장 중요한 범주로 다뤄지고 있다. 이는 장애의 의학적 현상이나 명칭과 상관없이 예술활동을 하는데 중요하면서도 핵심적인 의사소통과 교육의 관점에서 장애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고, 또한 예술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의학적 명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비춰진다.
1) <Beyond Access - The Creative Case for Inclusive Arts Practive(2015)>
‘장애 예술’은 장애의 경험을 다루는 예술로 장애인 고유의 당사자성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이 예술가들은 장애가 무엇인지, 장애인은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대한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발언과 표현을 하며 일부는 장애인 예술운동이라는 사회적 목적을 띄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애 예술가’는 장애를 가졌지만 예술활동의 영역이 주류 예술계와 장애인 예술계를 포괄해서 활동하는 예술가를 말한다. 척 크로스(Chuck Close, 미국)이나 잉카 쇼니베어(Yinka Shonibare, 영국)와 같이 장애 때문이 아니라 예술성으로 인정받는 예술가들이 이 분류에 포함된다. 장애 여부가 드러나지 않고도 원활히 활동하는 예술가들, 장애를 극복하고 주류예술가로 활동하는 예술가들, 때때로 장애가 작가가 드러내는 예술성의 특징이 되는 경우들이 이에 속한다. 예를 들어 척 크로스는 인지기능에 문제가 있는 ‘안면인식장애’를 가지고 있으나 오히려 이러한 요소가 그의 유명한 초상화 연작의 원천이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러한 유형의 제시는 지금껏 미분화된 상태였던 장애인 예술 또는 장애 예술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준다. 국내의 장애인 예술 중에서 두드러지는 장르중 하나는 음악분야였다. 시각장애인들의 뛰어난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오케스트라, 연주자, 가수가 두각을 많이 나타냈고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도 주목받아왔다. 물론 이들의 활동의 이면에는 조력자와 가족의 헌신과 희생이 뒤따랐고 이를 통해 현재의 위치에 다다른 점도 있다. 지금껏 상당수의 국내 장애인 예술은 주류예술을 지향하는 동시에 ‘장애 극복’의 신화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장애를 지닌 예술가들은 비장애 예술가들과 대등한 예술적 역량을 지녀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국내에 있는 약 250만의 장애인 중 이러한 극복의 스토리를 담아낼 예술가들이 소수라는 것이다. 새로운 장애인 예술가를 발굴하려는 경연대회와 축제가 있지만 새로 등장하는 신예 예술가의 수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비장애 예술가가 대학과 유학이라는 전문적인 교육시스템을 통해 배출되는데 반해 정규교육조차 받기 어려운 장애인이 예술가로 성장하기에는 근본적인 장벽이 있고, 장애를 둘러싼 여건을 극복하는 일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번째 유형인 장애인 예술가는 일반적인 여건에서 나올 수 있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유형의 예술가는 훨씬 낮은 확률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미학적 전략으로서의 포용적 예술
포용적 예술은 주류예술을 쫒거나 미학적 관점에 종속적이었던 장애인 예술에 대해 새로운 미학적 전략을 제시한다.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주류 문화가 되려고 하거나 예술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영국 브리튼 대학의 앨리스 폭스 교수는 포용적 예술 전공의 석사과정을 개설하고 장애인 예술단체인 로켓 아티스트(Rocket Artists)와 수년간 함께 한 공동프로젝트와 연구를 통해 대안적 미학전략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녀는 ‘포용적 예술활동’이라는 용어를 위의 유형에서 첫 번째 경우인 학습 장애 및 비학습 장애 예술가 간의 공동작업에 제한하여 쓴다. 지적장애, 발달장애 등 학습에 어려움을 지닌 장애인 예술가와 숙련된 예술가의 공동작업을 통해 비장애 예술가는 장애인의 정체성과 경험에 관해 의사소통을 하게 되며, 이들의 공동성은 예측할 수 없고 개방적인 형태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비장애 예술가는 장애 예술가를 가르치거나 치료하거나 돕는 역할이 아니며 공동협력이나 공동창작을 진행하는 협업자다. 이들은 공동작업을 통해 쌍방향적이면서도 복잡한 의사소통을 통해 새로운 창의적 방법과 표현을 추구하게 되고 이를 ‘변형적인 잠재력’이라고 표현한다. 미술사와 현대예술에 익숙한 비장애인 예술가들은 실제로 이 과정을 통해 독특한 경험과 자극을 받게 되고 협력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생산하는 경험을 한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서로 다른 두 영역의 예술가 간의 작업을 ‘상호주관성’ 또는 ‘만남의 윤리’라 표현하면서 동시대예술의 주요 사례인 관계적 예술, 참여적 예술,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등의 이론적 성과를 경유하면서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의 작업은 서서히 주류예술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례로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는 수년 전부터 관련 워크숍과 함께 퍼포먼스를 선보여왔다.
영국 테이트 모던에서 진행되었던 Rocket Artists와 Corali Dance Company의 협업 퍼포먼스
포용적 예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더라도 영국의 장애인 예술은 그 다양성과 예술적 역량을 이미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런던의 사우스뱅크 아트센터에서 격년으로 개최되는 언리미티드 페스티벌에서는 매년 높은 수준의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고 영국정부는 많은 예산을 공동제작비로 투자하고 있다. 많은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극단인 그레이아이(Graeae)나 얼마 전 국내에서도 선보인 칸두코 무용단(Candoco Dance Company) 등 여러 단체가 공연예술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왔다. 영국과 호주의 예술사례와 정책은 아직까지 호혜적 관점에서 장애인 예술을 지원하고 있는 국내 장애인 예술정책의 분발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영국은 장애인 예술을 미학적, 예술적 가능성을 넘어 문화다양성 정책의 기반구축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도 관련 연구와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사례는 영국의 드레이크 뮤직( Drake Music)이다. 이 단체는 벌써 20년 된 음악단체로 기술을 음악에 접목시켜 기존의 교육시스템 하에서 예술에 접근하기 힘들었던 중증장애인도 참여할 수 있는 음악프로그램을 실행해왔다. 이들은 신체의 일부만 움직일 수 있는 장애인이 작곡과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센서로 움직임을 포착해 소리를 내는 ‘사운드 빔(Sound Beam)’이라는 악기를 개발하여 보급하였다. 이 외에도 디지털 기기로 연주가 가능한 앱, 청각장애인을 위해 사운드를 진동으로 전환시키는 기계 등을 개발했다. 기술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것은 이들이 축적해온 포용적 예술 프로그램의 가치를 폄하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심지어 학습장애를 지닌 참여자를 위해 단순하고 쉬운 악보를 개발하여 교육과 연주에 이용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애를 지닌 참여자가 음악에 접근할 수 있도록 다층적인 노하우를 쌓아왔다. 이들은 장애인이 음악을 배우며 느끼는 장벽을 넘어서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필요에 맞게 음악의 언어와 악기를 재구조화함으로써 획기적인 접근성을 제공하였다. 예술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장르의 고유 언어와 도구가 어떤 장애인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드레이크 뮤직(Drake Music)의 접근법은 포용적 예술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들의 공연에서 휠체어에 앉아 손 끝에 놓인 소리를 내는 버튼과 휠체어 등 뒤에 달린 센서를 누르며 연주에 참여하는 여성 장애인은 11년째 음악활동을 하고 있었다. 5~7명으로 구성된 밴드는 오랜 인내와 배려를 통해 성장하고 활동해왔으며 음악을 하는 자긍심과 자신감이 가득해보였다.



오세형_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사업운영팀장 경기문화재단, 아시아문화전당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문화예술기획을 했으며 현재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사업운영팀을 맡고 있다. 다원예술, 커뮤니티아트, 아시아예술 리서치를 통해 예술과 문화적 다양성의 관계에 경험을 쌓아왔다. 현재는 문화다양성의 맥락에서 장애인 예술의 성장가능성을 발견하는 프로그램을 발굴하는데 관심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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