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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11.30 조회 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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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혹은 ‘파트너’로서의 춤과 안무가
: 안무적 사고로 협업하기

글. 김재리
진행 및 정리. 허영균

일시: 2017년 11월 16일 목요일 오후 4시-6시
장소: 서울무용센터 내 구상실
참석: 김재리(드라마투르그), 금배섭(안무가, 춤판야무), 이세승(안무가, 쌍방 공동대표), 허영균(웹진 <춤:in>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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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김재리 시계 방향으로 이세승, 금배섭, 허영균 ⓒ박호상


동시대 예술 작업에서 안무가와 다른 예술가들의 만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과의 긴밀한 공동의 작업이 요구되는 무용과 공연예술에서는 ‘협업’이라는 용어가 새로울 것이 없지만, 우리는 어떤 예술가들의 만남은 하나의 사건이 되고, 역사가 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머스 커닝엄(Merce Cunningham)과 존 케이지(John Cage)의 만남은 서로에게 예술과 인생의 동반자가 된 것을 넘어 20세기 예술을 이전과 다른 지형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무용 역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기를 이루어냈던 포스트모던댄스는 안무가들의 공동의 상상과 예술적 실험을 시도했던 저드슨 그룹(Jusdosn Group)의 활동 그 자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피나 바우쉬(Pina Bausch)가 자신의 작업에 레이문트 호게(Raimund Hoghe)를 초대하면서 안무가 외에 안무에 개입하는 역할인 드라마투르그가 무용의 영역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이처럼 예술가들의 만남을 통한 작업의 시도는 과거로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개인적 필요이건, 제도적 요구이건 간에 많은 안무가들이 적극적으로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협업’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그 예술가의 진정한(authentic) 소유물임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게 그것이 ‘공동의’ 창작물임을 인정하는 것에는 예술에서의 형식적, 미학적 전환 이외에도 정치적, 경제적, 혹은 윤리적인 문제까지도 관련된다. 안무가와 다른 예술가들의 만남이 이루는 공동의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현재 예술에서 작동되는 협업의 의미와 실천에서의 접근 등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했다.



안무(가)로 협력한다는 것


허영균(모더레이터): 안녕하세요. 날이 갑자기 추워졌는데, 멀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이야기 나눌 주제는 ‘파트:너’로서의 안무 그리고 안무가입니다. 무용이 연극, 미술, 영화 등 타 장르와 협업을 요청받는 일이 점점 늘어가는 것으로 보여요. 무용은 다른 예술 장르 안에서 어떻게 쓰이며, 협업하는 안무가에게는 무엇이 요구되는지 각자의 경험을 통해 나누어 보면 좋겠습니다. 가장 먼저 콜라보레이션, 협업에 대해 이야기 나눠 볼까요? 안무가로서 다른 장르와 협업 할 때, 실제로 협력하는 부분이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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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배섭 ⓒ박호상


금배섭: 작품마다 다르긴 하지만, 가장 최근에 협업한 국립극단 젊은연출가전 프로젝트를 예로 들면,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작품의 콘셉트까지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금 참여 중인 작품은 호시 신이치 원작의 단편소설로 만드는 것인데, 연극 제목은 <나는 살인자입니다>에요. 소설을 연극으로 개발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입장에서 작업하는 것 같아요. 과거에는 한 장면의 형상, 동작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많았다면, 이처럼 초기부터 작업에 참여하는 경우는 보다 큰 시각으로 작품에 관여하게 됩니다.

김재리: 연극의 경우, 대본이 있고 연출과 배우가 결정되어 있을 텐데, 안무가가 같이 방향이나 개념을 정하는 부분에도 참여하게 되는 건가요?

금배섭: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창작극이다 보니, 안무적인 것과 연출적인 것을 가리지 않고, 경계 없이 다른 접근을 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했어요. 소설의 이야기를 소재로, 소설 바깥의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안무적으로도 여러 제안을 할 수 있었어요.

허영균: 작품이 신작이거나 창작극일 경우 혹은 공동창작으로 작업될 경우, 해당 프로덕션에 안무 혹은 안무적인 요소에 기대하는 정도에 따라 작업 관여도에 큰 차이가 있을 듯하네요.

김재리: 저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안무가가 무용을 주로 다루더라도 다른 장르, 분야에서 춤에 대해 생각하는 지점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멀티 스킬이 요청된다고 생각해요. 소재로서 텍스트나 소설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연출가와 함께 연극 작업을 할 때와 개인 안무 작업을 할 때는 기술적인 부분, 태도에 있어 차이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금배섭: 부담감이 제일 달라요.(웃음) 아무래도 연극에는 연출도 있고, 작가도 있기 때문에 작품 전체를 보았을 때 느껴지는 책임과 부담이 덜한 것 같네요.

허영균: 안무적인 맥락에서 춤을 다루는 것과 연극적 맥락에서 춤을 다루는 방법의 기술적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재리: 저와 협업한 연출가들의 춤에 대한 생각은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었어요. 개념이나 방향에 관해 이야기 한 바는 거의 없고요. 이미 텍스트를 통해 상황과 개념을 전달한 뒤에, 춤을 통해 분위기를 붐업 시키려는 생각이었죠. 분위기를 더 띄우거나, 배우의 희노애락을 관객에게 극대화하여 전달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이랄까요? 제한적인 용도로 춤을 사용했었어요. 물론 연극이란 것이 글이 압도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그럴 테지만. 매체에 따라 춤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저 개인의 고민이 확장되어 있는 것과 달리, 연극과의 협업에서는 제한적인 입장에서 춤을 다룰 수밖에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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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리 ⓒ박호상


이세승: 안무가들이 안무를 생각할 때는, 춤 동작 뿐만 아니라 감정이 시퀀스로 표현됩니다. 즉, 안무로 표현하고자 하는 외연이 훨씬 넓은 것이죠. 그런데, 협업자로서 작품의 한 부분에 참여할 때는, 연출가라는 책임자가 가지고 있는 ‘안무의 개념’에 맞춰 작업하는 것 같아요.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참여한 적도 있고, 후반 작업에 투입된 적도 있는데, 특히 중후반부에 참여하게 될 때는 더 넓은 관점에서 ‘안무’를 생각하기 보다는, 구도라던가 안무를 보다 짜임새 있게 푼다던가 하는 요청을 받았어요. 연극 그리고 뮤지컬 작업에 주로 그렇게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요. 안무가가 안무적 맥락에서 안무를 구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요.

허영균: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요?

이세승: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연출가들이 어떤 이미지를 제안하는데, 저도 그것을 이미지로 받아들여서 작업을 해요. 그렇게 작업해서 보여주면 의외로 ‘빠꾸’ 먹는다고 할까요? (웃음) 연출가가 준 이미지를 해석해서 어떤 동작이나 구도를 만들었을 때 주로 들었던 말은 ‘어렵다, 복잡하다’는 거였어요.

허영균: 이렇게 하면 관객이 알아 들을 수 없다는 입장인 거죠?

이세승: 단순, 명료한 쪽으로 해달라는 제안을 많이 받았어요. 작품 제작 중반에는 관습적인 의미에서 안무, 동작을 짜서 전달하는 일이 많이 이루어져요. 저 혼자 안무가로서 작업할 때와는 다른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연극은 보다 다매체 적이잖아요. 시간적으로 호흡도 길고요. 그래서인지 혼자 뭔가를 짜서 전달하고, 배우들에게 끌어내는 것이 물리적으로 쉬운 작업은 아니더라고요. 그럴 때, 공동창작 방식으로 배우들에게 끌어내기도 했었어요. 구상을 뛰어나게 한다기 보다는 완성도를 높여 나가는 측면에서의 협업에 힘을 쏟는 경우가 많아요. 공연장 가서는 장면 보면서 지적질하기도 하고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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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승 ⓒ박호상


김재리: 안무가들도 춤을 구성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맥락이나 작품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연출가의 마인드를 해석해야 한다고 봐요. 안무를 잘 짜고, 전달하는 것 이상으로 연극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영화에서 안무가로 작업을 했을 때, 감독님이 무대 공간이 아니라 카메라의 공간을 염두해달라고 얘기했죠. 관객을 고정된 상태로 두고 공연하는 극장 공연에서 벗어나 카메라의 기술적 측면을 고려하면서 안무한 경험을 통해 춤에서의 공간과 매체에서 다루는 춤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금배섭: 그래서 처음 호흡을 맞추는 작업자와 소통이 수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데,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거든요. 연출가의 마인드, 맥락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워요.

김재리: 물리적인 시간도 무척 중요한 것 같아요. 작업이라는 것이 참여자들끼리 서로 맞춰가는 채널링의 과정이기도 하잖아요. 부딪히는 과정을 즐기면서 소통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죠. 연극 작업 안에서의 실험이 필요한데, 준비를 해와서 가르쳐주기를 바라요. 춤 이전에 몸에 대한 이해, 배우의 몸이라는 재료를 이해하고, 캐릭터에 맞는 몸들을 지켜보면서 소스를 찾아낼 시간, 리서치의 과정이 필요한데도요.

허영균: 맞아요. 연극 작업에서 안무가에게 요청되는 것은 ‘트레이너’의 역할이기도 한 것 같거든요. 안무가가 직접 배우들에게 동작을 지도하는 거죠. 그럴 때는 더더욱 ‘전달자’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 같아요. 간혹 안무가가 왔으니, 연습들 해라하며 자리를 비우는 연출가도 있고요.



안무가를 부르는 여러 이름들


허영균: 한편, 안무와 관련한 다양한 관련 크레딧을 봐요. 흔히 ‘안무’라고 표기되기는 하지만 움직임, 움직임 지도 등으로 표기된 경우도 많이 봤거든요. 그럴 때, 안무와 움직임은 작업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김재리: 안무가뿐만 아니라, 움직임 연출, 움직임 리서쳐 등의 크레딧으로도 들어가요. 안무가가 연극적 언어로 만들어낸 행위에 가깝거나, 텍스트와 잘 달라붙어 있는 동선을 포함한 행위를 만든 경우, 혹은 액팅의 관점으로 더 개입한 경우에 ‘움직임 연출’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아요. 실제로 일명 ‘춤장면’이라고 하는 춤 장면이 스팩터클하게 나온다거나, 뮤지컬적 성격이 강한 연극을 보면, 하나의 씬 자체를 연출하는 것으로 ‘안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 것 같고요.

이세승: 대체로 ‘안무’라는 크레딧을 쓸 때는 ‘춤장면’이 들어갔던 것 같아요. 공연을 보는 입장에서 구성적, 감각적,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안무적 터치가 들어갔구나 싶은 작업에요. 한편, 움직임 지도나 움직임 연출이라는 크레딧을 얻게 될 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텍스트를 따라 진행되는 자세 디자인이라던가 등의 보이지 않게 들어가거나,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작업에 움직임을 보탰을 경우였어요. 그래서인지 ‘안무’라는 크레딧이 ‘움직임 연출’보다 크고 포괄적인 것으로 느껴져요. 일례로 저에게 안무가로 작업에 참여해 달라는 섭외가 온 적이 있었는데, 여러 여건이 안 되어서 “안무는 힘들고, 움직임 지도를 하겠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거든요. 배우들하고도 좀 더 가벼운 수준에서 소통하면서 움직임에 대해 다듬어 나가는 작업이 됐어요. 크레딧에 따라 참여하게 되는 태도가 다르긴 하지요.

김재리: 막상 안무로 들어갔는데 민망한 경우도 많아요. 다음 날 갔더니 씬이 통째로 없어져 있거나, 춤 장면이 빠져버린 경우요. 배우의 연기적인 움직임만 신경 썼는데, 안무가라고 불릴 때도 그래요. 크레딧을 보면서 사람들이 “안무가가 있었어? 안무가 뭐 있었지?”할 때도 있고요. 저는 연극에서, 액팅이라는 용어에서 행위나 행동을 강조하는 만큼 움직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연출가들은 감각이나 지식적인 양면에서, 텍스트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관점이 또 다르죠. 셰익스피어, 체홉 등의 빅 네임의 경우에 더더욱 텍스트에 눌리게 되는데, “텍스트를 깊이 이해하면 몸은 저절로 나와.”하고 생각하는 배우, 연출들을 많이 봤거든요. 몸이 곧 재료인데, 사용할 수 있는 몸은 인지하는 정도에 따라 표현의 범위가 달라져요. 연출을 포함해서, 배우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면 소통이 더욱 편하지 않을까요? 안무가들이 연극적 맥락 안으로 들어가 해석해내는 것만큼, 배우와 연출가들도 몸에 대한 인지와 무용이라는 매체가 가진 신체적 사고를 하면 좋겠어요. 텍스트적 사고가 아닌 신체적 사고를 하는 것이요. 신체적 사고는 추상적이죠. 공연예술에서 단지 상황과 의도를 이해하는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니죠,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부분이나, 관객의 해석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장면을 통해 감상의 차원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금배섭: 저는 둘 중에 선택하라면 꼭 ‘안무’로 크레딧을 요청해요. 무용에서도 움직임은 많잖아요. 춤이라고 보기에 애매모호한 동작들? 제가 생각하는 움직임을 연출과 이야기 하고, 연출가의 생각에 맞춰 가려고 했다면, 지금은 조금 더 저의 상상으로 그리고 그걸 제시하는 편이에요. 생각이 잘 통하는 연출가와의 작업은 결과물도 좋아요.

허영균: 작가들이기 때문에, 안무가들은 개인의 욕망에 따라 작업을 하게 되는데, 누군가와 작업을 나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협업은 ‘함께 한다’는 의미지만, 실제로는 작업 안에서 영역을 ‘나누는’ 것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거든요.

김재리: 안무 작업에 개입하는 드라마투르그로서, 안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맥락 안에 있느냐는 건데요. 주어진 환경을 우선 고려하는 거예요. 내가 하고 있는 작업 안에서 파트너들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우리의 작업에서 관객과의 대화의 지점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항상 고민해요. 미술이나, 연극 분야에서 작업을 하더라도, 같은 생각과 태도가 이어져요. 주어진 맥락과 환경,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별로 다르지 않잖아요. 소통의 언어를 찾기 위해서 노력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연극 작업을 할 때는 내가 연극을 이해하는 작업자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해요. “미쟝센이 말이죠”라던가, “여기선 꺾어야죠.”등 그들만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했을 때, 대화의 물꼬가 터져요.

이세승: 의견 차이가 일어날 때는 역시 책임 부분을 먼저 생각해요. 연극 작업의 예를 들면, 무대 위에 무엇을 올릴 것인가하는 결정에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연출가니까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장면을 드러낸다거나, 부분적으로 동작을 없앤다거나 해도 일단 존중하죠. 쉽게 콜라보레이션이라고 하는 공동창작의 방식으로 안무에 참여하게 될 때는 역시 의견차이나 갈등을 해결하는 시간이 실제적으로 필요하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작업 내에서 움직임, 무용, 안무가 어떻게 발현될지 좌지우지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예술가 개인으로서 참여할 때, 이것만큼은 양보 못한다고 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작품을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세, 태도를 견지해서 작업의 다른 프로세스 안에서 다른 영향을 끼칠 때가 있더라고요. 모두 다 양보하면, 작업 프로세스 안의 제 행동기제가 양보로 굳어지게 되어서요. 개인들마다 조금씩 다른, 협업 작업에 임하는 전략이 있는 것 같아요.



개념의 탄생과 협업이라는 사유


허영균: 이야기가 연극 분야에 집중되고 있네요. 잠시 후에, 미술이나 영화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기로 하고요. 세승 안무가는 <사계절 연극제> 등에 참여하시면서 연극 연출가의 역할도 하시잖아요. 안무자가 연출도 하게 될 때, 예술가 한 명의 자아는 어떻게 분할되어 작동하게 되는 걸까요?

이세승: 무용 공연을 보러온 관객이냐, 연극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냐의 차이가 큰 것 같아요. 제가 연극을 보러 갈 때와 무용을 보러갈 때, 기대하는 바도 다르고, 무대 위에서 펼쳐진 것들을 해석하는 방향도 다른 것 같거든요. 텍스트 없이도 연극이 성립되고, 무용 역시 텍스트가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창작의 결과물이 장르에 따라 반드시 다른 요소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때문에 움직임이나 언어의 측면보다도 어떤 식으로 관객들에게 받아들여 지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공연의 작동원리라면 원리죠.

허영균: 금배섭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아까 말씀하신 부담감의 차이 외에도, 콜라보레이션 작업에 있어 고려하는 작업적 태도가 있다면요?

금배섭: 극단적으로 말하면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접을 수도 있는 거죠. 저에게 콜라보레이션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느낌이에요. 내가 이런 것을 하고 싶으면, 다른 창작자의 아이디어 하나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요. 공동안무 작업을 세 번 해보았는데요. 세 번 다 아이디어만 넘치고 뭔가 잘 안 되는 느낌이었어요. 결국 아이디어가 꿰어지지 않고 붕 떠있는 듯한 느낌만 받고 끝났어요. 그 이후로는 안무자끼리 협업은 잘 안 하게 되었어요. 협업의 실질적인 방법은 뭘까요? 사실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기브 앤 테이크, 싸움 없이 진행하는 것만이 방법일지.

허영균: 기브 앤 테이크를 택하지 않고, 부딪혀서 의도적으로 갈등을 통해 해결을 노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재리 선생님이 말씀하신 ‘채널링’의 과정 중에 갈등은 피하기 어렵기도 하잖아요.

김재리: 드라마투르그인 보야나 쿤스트(Bojana Kunst)는 콜라보리이션은 ‘저자를 지우는 일’이라고 강조했어요. 저는 이 말에 동의하는데, 선장, 감독 등으로 권한이 한 명에게 집중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센틱, 작가주의를 지울 때 콜라보레이션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즉 ‘작가없음’이야 말로 진짜 협업인 거죠. 그것을 통해, 각자의 장르가 합쳐진 제3의 무언가로 갈 수 있길 기대하는 것이 협업 작업이 아닌가 생각해요. 작가 대 작가로 만나서, 작가없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협업 작품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색깔을 찾을 수 있다면 협업의 과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다른 파트너와의 수행적인 관계를 통해 이전에 없었던 것을 발견할 것이라는 기대와 그것이 결과로 이어졌을 때 협업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작가들의 아름다운 만남은 환타지라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경험과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통일된 생각을 갖는 것은 한 명이 포기하거나 맞춰주는 것이죠. 작업에서의 태도가 중요할 것 같은데, 충돌 속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가능성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협업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허영균: 미술 작업은 어떤가요? 미술은 안무 혹은 움직임보다도, 주로 ‘퍼포먼스’ 또는 ‘퍼포머’라는 지위로 무용과 협력하는 걸로 보여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다원예술’이라는 항목이 있더라고요. 이런 걸로 보아도, 융합, 인터디스플리너리, 콜렉티브, 콜라보리에션 등 ‘함께’하는 것, 여러 장르가 모여서 뭔가를 해내기를 요구하는 걸로 보여요. 왜 그럴까요?

김재리: 미술은 분명한 것 같아요. 장르적인 측면에서 보다도, 미술관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 같거든요. 춤과 같은 시간에 기반한 예술이 미술관에 들어가 고정불변의 예술품과는 또 다른 작업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는 자본주의 맥락에서 미술품 자체가 자본이 되는 것에 대한 거부, 누군가가 소유하고 재산으로 환원되는 예술로서의 미술에 거부하는 움직임이기도 한 것 같아요. 퍼포먼스와 같이 사라지는 미술품을 생산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비평적 의식을 가진 작가들이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몸이라는 매체에 대한 매력을 느끼는 것도 같은데, 몸을 곧 하나의 오브제로 보고, 생명이 있는 몸들을 자꾸 미술관에 개입시키는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몇 백 년 동안 지켜온 극장이란 공간에서, 화이트큐브로 무대가 전복되는 변화에 대해 무용도 반겼던 것 같아요. 서로의 니즈가 잘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닐까요? 다만, 안무가들은 신체적인 사고를 하고, 신체 자체가 곧 매체인데에 반해, 미술가들은 신체를 재료로, 오브제처럼 도구화하는 것 같기도 해요.

허영균: 최근에 <무용수들>이라는 전시가 있었잖아요. 혹시 보셨나요? 이 전시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셨는지 궁금해지네요.

김재리: 이 전시는 미술관에서 만나는 무용은 극장 밖을 벗어나, 사회 안에서 무용수들이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들의 행위, 정치적인 맥락 안에서 다루는 주제들 안에서 무용을 발견해요. 그것이 재미있었어요. 예전에 우리는 무용실 안에 세상이 있다, 춤을 깊이 추면 세상을 깨달을 수 있다고 배웠는데, 과연 그럴까요? 오히려 무용의 외부에서 무용을 새롭게 발견하고 갱신해왔다고 생각해요. 과거 페미니스트 운동에서 “춤출 수 없으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기조가 있었어요. 이 맥락 안에서 춤은 다른 의미를 부여받죠. 우리가 알고 있는 춤은 극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맥락과 환경 속에서 꿈틀대며 살아있어요.

허영균: 미술관의 오프닝이나 중간 행사, 혹은 이미 완성된 전시 안에 삽입되어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용을 종종 보는데요. 이것을 콜라보레이션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협업이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지 의문을 갖게 돼요. 협업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익숙해지고, 방식이 일반적이 된 것은 제도 때문일지, 혹은 새로운 것을 원하는 관객의 요구 때문일까요? 분명히 그 어딘가에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있을텐데요.

김재리: 기계적인 평등을 맞추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창작자들 사이에서 오는 긴장들, 서로 눈치 보느라고 제대로 협업하지 못하는 것 말고, 제대로된 협업을 지향하면서 만날 수 있는 작업자들이 모이는 게 중요하고요. 협업이 내 것을 주고 필요한 것을 받는 물물교환이나 작업의 할당량을 채우는 방식의 노동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협업을 하더라도 작가로서 신념이나 욕망을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상태까지도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을 때, 파트너와 소통도 잘 이루어질 수 있고요.

이세승: 예술이라는 것에 실천적인 요구가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제야 조금은 한국의 공연계에서 담론들이 근대, 모더니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 같고요. 몇몇 강의를 들어보면 기승전박정희로 끝나는 일이 많더라고요. 그렇다는 것은 그 시대에 대한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다는 뜻 같아요. 담론은 충분하니, 이제 실천을 요구하는 시대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실천들이 단 시간 안에 결과를 요구하게 될 때, 특히나 예술에 대해서는 강압에 가까운 요구가 일어나는 것 같아요. 예술 창작에 대해서 만만하게 바라보는 태도가 원인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천재가 예술 작품의 주체라는 근대적 환상에서 온 것이겠죠. 알파고가 등장하자마자, 4차 혁명 이야기를 하면서, 로봇 등을 바로 예술과 접합 시켜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빨리 결과를 보여달라고 하잖아요. 위험한 요구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지원제도도 참 빨리 변해요. 2~3년마다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작업자로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협업에 대한 요구도 어쩌면 그런 쪽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싶어요.

금배섭: 제 입장에서는 이미 협업을 하고 있는데, 더 해보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생각해보면, 예술가들은 이미 협업을 하고 있었어요. 그것에 협업이라던가, 콜라보레이션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 것뿐이죠. 보다 협업을 적극적으로 요구받은 뒤에 작품들이 더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는 모르겠어요.

김재리: 그렇지만,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어요. 60~70년대에 우리가 쟁취해야할 이념이 분명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적이 누군지, 무엇인지 단정하기 사회에요. 유례없는 일도 많이 일어나고요. 누구도 위기를 혼자 감지할 수 없어요. 개인이 시대를 정의 내리고, 시대의 목표를 정할 수 없는 세상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공동의 상상력, 공동의 작업이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방법적인 부분에서 협업이 이미 과거부터 존재했다 하더라도, 협업이라는 단어, 개념이 제시되고 그 방법론을 탐구하기 이전에는 이에 대해서 오늘과 같은 토론의 장도 없었을 거고요.

금배섭: 맞아요. 용어가 생김으로 인해, 새로운 사유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설명 안 되는 것이 눈에 더 들어오기도 하고.

허영균: 말씀을 듣다보니, 예술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달라진 것도 ‘협업’이라는 방식과 개념이 일반화된 하나의 이유가 된 것 같기도 해요.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를 촉발시키는 것으로서의 예술이 요청되기 때문에, 단일한 표현 매체로서는 우리의 사고를 확장하거나 이야기 거리를 찾아내는 것에 한계를 느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공연을 보고나서 너무 어려워서 머리가 아팠다고 하는 관객도 있지만, 공연을 통해 새로운 지점을 인식하고 사고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또 그럴 필요를 원하는 관객도 많으니까요. 그런 방식으로서 협업이 계속해서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재리: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무용을 무용하는 사람들끼리 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예술 전반적인 관점으로 확장, 공론화 시켜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되느냐의 차이가 있어요. 그랬을 때, 무용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곧 콜래보레이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바깥에서 재발견하는 무용


허영균: 마지막 질문 드릴게요. 다른 장르와의 만남과 충돌을 통해 발견되는 ‘무용’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요? 무용 밖에서 바라보고, 발견하는 무용에 대한 안무가 분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김재리: 다른 맥락을 만났을 때, 춤이 이런 기능을 하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데요. 무용 공연의 맥락에서 안무를 생각했을 때와 달리, 다른 창작자, 다른 장르와의 관계 속에서 춤을 다시 보는 계기가 생기는 것 같아요. 예술 작업 속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가 춤을 바라보는 태도를 발견했을 때, 춤의 새로운 가능성이나 다른 측면들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남화연 작가와 <역사로 쓰는 몸>이라는 전시를 함께 했을 때, 춤이라는 것이 감각적으로 발현한다는 지점에서 매력을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훨씬 더 본능적인 매체라 느끼는 거죠. 이럴 때보면 춤이라는 것이 개념 작업자들에게 환기가 되는, 혁명적인 요소가 되는 듯해요.

이세승: 여러 협업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춤의 유효성에 대한 다른 생각이었어요. 저 스스로 작업을 할 때, 춤을 유효하게 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으로 추기, 즐거움, 쾌라는 춤의 기능을 지양하는 것 같거든요. 반면, 협업을 통해 춤을 만나게 되면, 즐거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돼요. 다른 사람들이 바라볼 때, 춤은 즐거운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요. 신기한 경험이라고 해야할까요? 웃픈 일이라 해야할까요? 학교에서 안무를 배우면서 교육받아온 것들, 작업자로서는 깨고, 벗어나려고 싸우는 것들이 오히려 유효하더라고요. 교육받은 춤에 대해 긍정할 수 있는 경험이었어요.

김재리: 개인 안무작업에서도 교육받은 것이 도움이 되나요?

이세승: 그때는 오히려 교육받은 것과 싸우는 과정이에요. 반대죠. 또 한가지 협업의 경험으로 다가온 생각이 춤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텍스트로 작용되는, 감각의 차이에요. 아이돌 댄스처럼 똑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윤아의 춤과 제시카의 춤, 티파니의 춤이 다른 것처럼, 내 눈에는 구태의연한 시퀀스라도 그것을 수행하는 중인 당사자의 입장에선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내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관습적 춤동작이 자연스러운 유기적 움직임이 되고 이후에 개념적 무용이 된다는 식의 변증법으로 위장한 함정에 빠지면 안 되겠어요.

김재리: 동감해요. 가치판단을 해선 안 되는 것 같아요. 가치판단이 선행되면 이미 이상적인 협업은 어려운 것 같아요. 안무적인 사고 안에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저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도 안무적인 안경을 끼고 볼 때가 있거든요. 나만의 이해 방식인거죠. 이것을 타장르와 작업할 때도 적용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정확히 말하면 장르의 콜라보레이션이 아니라, 사고의 콜라보레이션이요.

금배섭: 서사의 유무와 관계없이, 무용은 어찌되었던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예술이에요. 감각으로 느끼는 장르가 무용 같고요. 이매방 선생님이 춤을 추시는 걸 보면, 연로하셔서 박자가 틀릴 떄도 있지만, 살풀이 손동작 하나에도 머리가 아니라 몸, 마음으로 다가오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허영균: 오늘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안무적 사고’라는 표현이었어요. 가시적인 협업의 결과물이 아니라 ‘안무적 사고’의 발현 유무, 적용 정도에 따라 협업했다 이해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파트 혹은 파트너로서의 안무, 무용에 관해 생각하면서, 외부로부터 바라보는 무용을 발견하는 새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장시간 귀한 말씀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재리 국립현대무용단의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했으며(2014-2015),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에서 안무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한국연구재단에서 박사후 연구원, 신진연구자, 시간강사 지원 등의 분야에 선정되었다. 안무가 및 시각예술 분야의 예술가들과 드라마투르지컬 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컨템퍼러리 댄스에 관해 몇몇 잡지에 기고하고 있다.

금배섭 체육학과 졸업 후 다시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춤판야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의 전통적 요소, 정서들을 접목시켜 형식과 내용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작품을 만들고자 한다. 발신자 정보 없는 전화가 올 때면 늘 ‘공연 관련된 전화인가?’ 하고 기대하며 전화를 받는다.

이세승 연출가, 안무가, 퍼포머로 활동하고 있다. 집단 <쌍방>의 공동대표이며 <사계절 연극제>에 참여하고 있다. 공연이라는 형식을 점유하는 몸과 움직임의 당대적 풀이가 작업의 주된 관심사이다. 주요작으로는 “Tobeandnottobe”(2017), “먹지도 말라”(2016), “삼인무 교육부”(2015 공동안무)가 있다.

허영균 문학과 공연예술학을 전공했다. 예술·공연예술출판사 1도씨를 운영하며, 작가 혹은 드라마투르그로서 창작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웹진 <춤:in>의 편집부로, 기획과 편집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글. 김재리 진행 및 정리. 허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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