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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2.23 조회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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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의 권력 메커니즘과 민주주의

이기라_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1.
어떤 특별한 대학원이 있었다. 경기도 숲속에 위치한 이 작은 학교에서 모든 학생은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해야 한다. 이 학교에는 모든 학생이 따라야 하는 몇 가지 의무사항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모닝 세리모니’라고 부르는 좀 특이한 프로그램이 있다. 학생들은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하여 기숙사 뒤편에 있는 명상관에 모여 명상을 하고, 본관 앞 광장에서 간단한 조회를 한 후 체조와 조깅을 한다. 학교는 머리만 키우는 공부가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 건강하게 단련한다는 학원장의 교육철학이 담겨 있다며 이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규칙이 있다는 것은 외부에 잘 알리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은 대부분 입학하고 나서야 이 제도의 존재를 알게 된다.
필자가 이 대학원에서 기숙사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선배들은 다음과 같이 모닝 세리모니를 옹호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명상하고 운동하니 머리가 맑아지고 건강에 좋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해준다,” “그런 규율이 없다면 생활이 방만해질 것이다” 등. 그들은 대부분 전액 장학금과 훌륭한 교육환경을 제공해준 학원장에 대해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이 모닝 세리모니를 강요하는 학교에 대해 처음부터 불만이 없었던 줄 알았다. 그러나 함께 입학한 동기들을 보면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기들은 대부분 필자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강제된 규율에 힘들어하고 불만스러워 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고등학생도 아니고 이미 4년 이상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경험한 성인들에게 그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동기들은 입학 이후 첫 한 학기 동안 이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 각자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전액 장학금에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차피 아침에 일어나서 잠깐 하면 되고 나머지 생활은 대체로 자유롭잖아” 등. 한 두 학기가 지나자 그들 중 다수는 필자가 첫 학기 때 만났던 선배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적극적 옹호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 패턴은 후배들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처음에는 대부분 동의하지 않았지만, 규율을 통해 지속적으로 행동이 강제되면서 나중에는 적극적인 옹호자가 됐던 것이다. 첫 학기에 만났던 선배들도 비슷한 궤적을 겪었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 경험은 당시 ‘자발적 복종과 권력의 메커니즘’이라는 화두를 고민하던 필자에게 같은 주제로 박사 논문까지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2.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은 일찍이 행위가 의식에 작용하는 영향력을 간파했다. 그는 <팡세>에서 믿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모든 것을 이미 믿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하라. 성수를 받고 미사를 올려라. 그럼 저절로 믿게 되고 더 유순해질 것이다.” 효과적인 권력은 의식에 작용하기보다 행동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우리 몸에 작용한다. 특히 그 통제가 단순한 억압이 아니라 적극적인 돌봄의 외양을 띤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현대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근대 권력이 개인들을 하나씩 세심하게 돌보고 길들임으로써 전체로서 자신의 힘을 증대시켜왔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억압이나 감금, 배제가 아니라 적극적인 관리와 육성, 돌봄이 근대 권력의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 양치기 목자의 이미지를 빗대어 근대 통치 권력에 ‘사목권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권력은 의식보다 먼저 행동을 통제함으로써 몸에 기입된다. 이제 의식이 해야 할 일은 그 행동을 ‘합리화(rationalization)’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식과 행동의 불일치로 인해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리는 ‘인지 부조화’라고 부르는 이러한 상태를 피하려고 한다. 누군가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해서 명상과 조회를 해야 하는데, 왜 그런 행위를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그 필요성에 동의할 수 없다면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 행위와 의식의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그 학생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대체로 세 가지이다. 학교를 떠나는 것(도피), 개기거나 뺀질거리는 것(적극적 또는 소극적 저항),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합리화). 첫 번째는 체제에 순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까지 포기해야 하며 두 번째는 제재와 처벌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므로, 두 가지 선택지 모두 자신의 강한 신념이 있어야만 채택될 수 있다. 그래서 차라리 생각을 바꾸어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믿는 편이 인지 부조화를 피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이 합리화 과정에서 그의 의식은 자신의 행위를 통제하고 있는 규율(모닝 세리모니)를 정당화하는 이념(학원장의 교육철학)에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y)’을 갖는다. 선택적 친화성이란 어떤 사람이 여러 이념 중에서 특정한 이념을 왜 더 잘 받아들이게 되는지 설명하기 위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게 빌려온 개념이다. 어떤 규율에 복종하는 자신의 행위를 가장 잘 합리화할 수는 이념은 바로 그 규율을 정당화하는 이념이다. 그래서 애초에 이사장의 교육철학을 몰랐거나 동의하지 않았던 학생들도 매일 모닝 세리모니를 행함으로써 학원장의 교육철학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필자는 대학에서 인문교양 및 시민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 협력과 연대의 가치를 알려주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몇 년간 대학생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이전 세대보다 협력에는 상당히 미숙한 반면 경쟁에 관련된 감각은 매우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은 서로 ‘나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을 나댄다고 보는 시각 때문에 서로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는 경계심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학생이 수업시간에 질문하지 못하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 ‘개인적으로’ 찾아온다. ‘김영란법’이 시행되자마자 다른 학생이 교수에게 캔 커피를 준 것을 신고한 한 대학생의 에피소드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쟁의식은 차별의식으로도 이어진다. 젊은 사회학자 오찬호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을 통해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청년들의 차별적 의식을 읽어냈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머리로 배워서 알고 있으면서도, 용산 철거민들의 요구는 과도한 것이며,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은 ‘날로 먹으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20대는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경쟁질서와 그로 인한 차별의 적극적인 옹호자가 되었을까?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자신이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지 몸으로 감지한다. 남들보다 우위에 서지 않으면 ‘루저’가 되어 ‘지질하게’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그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현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쟁적 감각을 부단히 발달시켜 ‘경쟁 기계’가 될 수밖에 없으며,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노오력’ 해야 한다.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경쟁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런 관념에 동의하기 이전에,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오랜 기간 몸으로, 행동으로 체득한 결과인 것이다. 반면에 그들에게 민주주의나 인권은 교과서 안에 있는 죽은 지식이자 시험문제의 모범 답안일 뿐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협력과 연대를 확대하고자 한다면, 그 역시 머리로만 배우는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으로, 감각으로 체득되어야 할 무엇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교육현장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삶에서도 몸으로 체험되고 행해져야 한다. 그래서 파스칼의 조언은 오늘날 주말마다 광장 민주주의가 실험되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할지도 모른다. “광장에 나가보라. 다른 사람들처럼 구호를 따라 하며 행진해보라.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느껴보라. 그러면 저절로 민주주의와 연대의 가능성과 가치를 믿게 될 것이다.”




이기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프랑스 파리소르본대학에서 사회과학 및 인식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에 누구보다 저항적이었던 대학생들이 90년대 중반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권력의 메커니즘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지은 책으로는 『공존의 기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이 있으며, 연구논문으로 「에티엔 드 라보에시와 자발적 예속의 문제」, 「막스 베버 이론에서 지배의 이중성」 등이 있다.


이기라_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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