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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2.23 조회 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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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가 신체에 남긴 통제와 한계, 흔적 찾기

김주희_무용이론가, 성균관대학교 하이브리드미래문화 연구소 연구원

매일 여러 뉴스로 떠들썩하다. 그중 눈길 가는 기사는 상하이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주역으로 초청된 국립발레무용단 수석무용수 김지영의 공연이 무산됐다는 소식이다.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아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국가 간의 정치적 갈등이 순수 예술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1) 성악가 조수미,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중국 공연도 줄줄이 무산되면서 양국의 문화예술 교류가 통제되고, 예술가의 순수한 동기가 한계지어진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무용수가 활동하는 데 있어 정치적 논의 안에서 통제받고 한계를 경험하게 되기도 하지만 이미 무용수들은 작은 통제와 한계 넘기를 계속 해왔다. 물론 그 통제와 한계를 불편함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인식하지도 못한 체 당연하듯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18세 무용학과 지망생 K양과 친구 Y양의 평범한 대화를 통해 통제와 한계 경험이 신체에 미시적으로 내재해 있음을 근대문화사적 시각에서 되짚어 보고자 한다.



서양식 극장의 보급


Y양: “공연 있다며?”
K양: “어. 그런데 살 때문에 고민이야. 지금도 빵이랑 파스타가 먹고 싶은데 참고 있어. 우선은 굶어서 빼고 나중에 다 먹어야지.”
Y군: “왜 살을 빼야 하는데?
K양: “무대에서 예뻐 보이려면 얼굴도 작고, 팔다리도 가늘고 길어 보여야 하거든.”
Y군: “그러다가 건강 상하겠다.”
K양: “괜찮아. 비타민 챙겨 먹고 있어.”



K양은 콩쿠르를 참가하는 데 있어 왜 신체관리를 할까? 땀을 흘리며 정구(테니스)를 하는 선교사의 모습을 본 고종황제가 “저렇게 힘든 일은 하인을 시키지 왜 직접하고 있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구한말 시절 땀을 흘리는 행위가 노동 외에 신체건강을 위해 필요하다는 개념이 아직 일반화되지 못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무용에 있어 본격적인 신체에 대한 관리 인식은 이와 비슷한 시기인 서양식 극장의 보급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서구식 극장으로 1908년에 세워진 원각사(圓覺社)가 지어진 이후 단성사(團成社)와 남성사(南成社), 경성공회당(京城公會堂) 등의 서양식 무대에서 신무용이 공연되기 시작했고, 1973년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개관되면서 본격적인 무대 무용공연이 제작되었다. 1980년대 들어 대극장 무대 외에도 공간사랑(空間舍廊) 같은 소극장 공연이 활성화되면서 춤은 당연히 극장 무대를 중심으로 공연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정면식 액자 형태의 서양식 극장 무대구조가 무용수의 몸을 보다 집중적으로 응시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즉 관객과 공연자가 어우러지며 하나 되는 마당식의 극장에 비해 서양식 극장의 경우 무대와 객석이 분리됨으로 인해 관객은 무대를 집중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된다. 객석의 일방적인 시선 방향은 같은 무대 안에서 더욱 잘 보이는 무대 공간에 따라 구분되고, 잘 보이는 무대 공간은 무용수의 실력에 따라 배치되는 구성이 되었다. 이러한 극장구조의 보급은 무대에서 보다 아름다운 몸이 드러날 수 있도록 K양을 관리하게 한 것이다.



그녀의 음식 취향


다음으로 그녀의 음식 취향을 살펴보자. 원래 취향이라는 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체화되는 것인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서양 음식은 더는 특별한 날에 먹는 신기한 음식이 아닐 만큼 보편화 되어있다. 서양 음식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은 개화기 이후 외교관이나 외국 상인을 위해 생긴 음식점, 숙박시설과 같은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부터이다. 1888년 인천항에 들어선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 삽화가 실린 미국의 잡지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를 보면 영문식 간판에 "FRESH BREAD & MEAT(신선한 빵과 고기)"라고 적힌 글을 확인할 수 있다.2) 이후 1902년 서울 정동에 위치했던 손탁호텔이 불란서 요리를 소개하고, 1914년에 서울 중구의 조선호텔이 뷔페형식의 식사를 선보였다. 이후 서양식 식당은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1925년 경성역(서울역)에 그릴(grill)이라는 전문 경양식 식당이 생겨나면서 대중들이 더 쉽고 익숙하게 서양 식단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3) 이 외에도 식민시대에 일본을 통해 료리집(음식점), 끽다방(다방), 카페(Cafe) 등이 유입되면서 치즈, 소시지, 커피, 위스키, 와인, 코냑 등과 같은 다양한 서양식 음식이 자연스럽게 정착되었다.4)



줌인 무용이론가, 성균관대학교 하이브리드미래문화 연구소 연구원 김주희 관련 사진

소래섭(2009).『백석의 맛』,서울:프로네시스


K양이 건강을 위해 보조식품을 섭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영양에 대한 이해가 이미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1934년 4월 1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도회남녀와 비타민 ABC>이라는 만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신체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체가 관리되었다.5) 특히 글에서 남, 녀의 대화 속에 언급되는 ‘비타민A. B, C, D, E, F가 있는 산나물’, ‘쌀밥을 못 먹고, 쇠고기를 못 먹어도 비타민을 먹어야 오래 살지’와 같은 말을 통해 세분된 영양소에 대한 지식과 그 영양소가 갖는 효과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K양의 고민 안에 투영된 서구식의 공간과 식습관, 건강 관리방식은 근대 이후 서서히 개인의 인식과 취향으로 스며들었고, 이에 대한 정보는 곧 스스로의 신체를 통제, 관리하는 인식 행위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미디어에 투사된 신체와 미의 기준


K양은 살 때문에 고민이라고 한다. 물론 비대한 육체가 자유로운 동작 수행에 불편함을 주기도 하겠지만 K양뿐 아니라 오늘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름다운 몸을 위한 다이어트는 사회적 관심사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요인은 근대화 시대의 미디어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미인상은 달덩이 같은 얼굴에 작고 아담한 체격이었는데, 이러한 미인의 기준은 일본을 통해 들어 온 ‘모던 걸’의 신체 이미지를 담은 영사기, 신문광고, 잡지 등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 변화하게 된다. 모던 걸은 최첨단 유행을 선도하는 신여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서구의 신체관리와 매너, 운동, 여가 등을 통해 적극적인 신체활동을 경험하는 여성이었다.
당시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신장기(다리를 길게 만들어 주는 기계) 광고에는 <모던 걸 여러분에게 추천하는 신장기-단발 양장도 닭과 같은 모습은 꼴불견이다>라고 쓰여 있어 단발과 양장으로 상징되던 모던 걸에게 어울리는 다리가 짧고 두꺼운 닭 다리가 아닌 얇고 긴 다리라는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6) 한국적 신체 미의 기준이 서구신체 미학으로 변모되는 과정은 파인 김동환이 발행한 대중잡지 《삼천리(三千里)》 창간호 표지 여성과 이후 발행된 잡지의 표지를 장식한 여성의 모습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줌인 무용이론가, 성균관대학교 하이브리드미래문화 연구소 연구원 김주희 관련 사진



이와 같이 날씬한 몸에 대한 관심은 근대화 이후 여성들의 오랜 고민거리였으며, 1950년대 중반 이후 서양 영화의 인기와 1953년도에 최초로 생긴 미인 대회, 1970년대 각 가정에 보급된 TV로 인해 우리의 인식 속에서 서구적 체형과 모습은 당연한 미의 기준으로 박제화 됐다. 미디어가 표상하는 미의 기준을 의식하지도 못한 체 우리의 신체미는 그 한계 기준에 맞춰 조절하고, 규격화되어 온 것이다.



1) 신완순(2017.2.8.). “조수미·백건우 이어 발레리나 김지영까지…중국 공연 '취소”,《TV조선》,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08/2017020890189.html(2017.2.9.).
2) 조우성(2015.3.9.). “커피1885년 이미 인천 대불호텔서 커피 마셔”.《인천일보》
http://www.incheonilbo.com/?mod=news&act=articleView&idxno=559935(2017.2.9.).
3) 김주희·김종규(2014). <시선과 몸짓: 한국 개화기 문화변화에 따른 혼종화된 몸 담론>, p.136.
4) 김주희(2012). <식민지시대 ‘카페’에서 이루어진 춤에 대한 문화적 맥락 고찰>, p.20.
5) 소래섭(2009).《백석의 맛》,서울:프로네시스,pp.60-61; 김주희·김종규(2014). p.137.
6) 미리엄 실버버그(2014).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 강진석·강현정·서미석 역, 서울: 현실문화; 김주희·김종규(2014). p.138.




김주희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신체행위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무용 이론가이다. 성균관대학교 하이브리드미래문화 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성균관대학교와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신체’가 배치되는 다양한 ‘공간’을 다시보고 이해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김주희_무용이론가, 성균관대학교 하이브리드미래문화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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