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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7.01.26 조회 4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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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인여성; 여성인춤

김수인_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A: 선생님은 행운이셔요. 무용에 이해가 많은 가정환경을 가지셨으니.
B: 정말로 저는 운이 좋다고나 할까. 우리 주인이 나보다 더 열심이니. 만일 우리 집에서 반대한다면 못했죠. 가정과 예술이 양립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C: 남편을 참 잘 만나셨어요.
D: 정말이에요. 집에서 이해 없이는 예술 방면은 더욱 나가보질 못해요.
A: 선생님,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제는 정착해서 집안일을 돌보시겠어요?
B: 앞으로 더 일하고 싶어요. 한 10년! (일동 놀란다) 사실 생각하면 가정은 희생을 하고 있는 셈이죠. 하지만 남자는 뭐, 사십부터라도 넉넉하잖아요. 더구나 문학이라면… 그러니 나는 아직 젊은 동안에는 공부하고 늙어서는 제자들을 가르치겠어요.
(이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것을 전한다)
E: 귀한 시간을 이렇게 장시간 빼앗아 대단히 죄송합니다.



위의 글은 한 여성 무용가(B)와 진행한 인터뷰를 옮긴 것이다. 이 인터뷰는 여성 무용가의 예술활동이 가정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준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이 여성 무용가는 ‘운이 좋다.’ 가정을 희생하고 일하고 있는 것을 남편이 이해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인터뷰는 남편의 전화로 종료되었다. 이 여성 무용가는 누구일까?
인터뷰의 주인공은 우리나라 신 무용계의 월드스타 최승희이다. 위의 글은 《춘추》 1941년 3월호에 실린 것을 현대어로 각색한 것이다. 제 아무리 월드스타라 하더라도 그녀의 활동은 남편의 이해와 허락이라는 조건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최승희의 무용 활동은 무용계 내부의 사제관계나 당대 예술사조 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결혼 전후 가정이라는 맥락 속에서 가능성과 제약을 동시에 부여받았다.



근대 이후 춤추는 여성의 사회적 의미 변화


춤은 여성의 비중이 높은 예술 분야이며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성, 직업, 노동, 그리고 교육은 춤의 의미생성과 밀접하게 관계되어있다. 우리나라 무용사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춤 내부의 미학적, 철학적, 추상적 개념들은 현실에서 고분 분투하는 여성들의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작동한다. 춤이 춤추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다면 그 ‘사람’이라는 것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의미생성 현상들을 살펴보는 것이 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생성 현상들은 각 주체들의 사회적 존재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다. 쉽게 말해보자.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가무 담당자는 기생이었다. 봉건시대 기생의 공식적 지위는 천민으로, 예인이라 할지라도 수청이라는 형태의 성적 봉사가 요구될 수 있었던 사회적 신분이었다. (서지영은 그것을 몸으로 치르는 노역인 신역(身役)이었다고 설명한다.1) 신분제가 폐지되고 난 뒤 기생이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에 힘입어 근대적 예인 집단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기생들은 고아나 수재민을 위한 자선연주회 등 여러 구제 사업을 벌였고, 국채보상운동이나 금연운동 그리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적 인정과 가시성을 높여갔다. 하지만 일제가 문화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기생은 공적 공연보다는 사적 유흥으로 몰리게 되고, 전통 기예에 대한 강화보다는 손님을 접대하고 인사하고 술 따르고 배웅하는 법에 대한 수업이 증강되었다. 일제는 지속적으로 기생을 창녀화한다. 청일전쟁이후 공창제도를 확립한 일제는 조선에도 그 제도를 가져와 기생들을 그 제도에 편입시켰다. 춤추는 사람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42년 경성에 있던 권번들이 삼화권번으로 통합되었지만 이후 활동이 미진해지면서 문을 닫았고, 1946년 과도정부에 의해 공창제도가 폐지되었으며, 1948년 미군정에 의해 기생요리집이 대중음식점으로만 허가되면서 그때까지 남아있던 기생들은 접대부가 되었다. 기생이 창녀화되면서 진공상태가 된 전통춤분야는 한동안 무인상태가 된다. 이후 한국의 무용사에서 전통춤의 대표자로 일컬어지는 한성준, 이매방, 김천흥은 모두 기생제도와 관계는 있었으나 적장 기생은 아니었던 남성들로 이어진다.



결혼과 가정


한성준이 전통춤의 대표자가 된 까닭으로 이병옥은 흥미로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이름난 고수, 즉 근대적 예술개념에 의하면 음악 분야 전문가였는데, 1930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했을 때 무용을 담당하기로 했든 이강선이 연구회 발족 직후 남편의 반대로 연구소 출입을 할 수 없게 되면서 하는 수 없이 한성준이 무용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것이다.2) 이강선의 사례는 기생으로 대표되는 전근대 여성 공연자가 근대 예술 전문가로 전환되던 시기, 결혼과 가정이라는 규준적 책무를 상정하는 현대 한국의 여성성 관념이 춤이라는 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3)
이 점은 한국 현대무용계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박외선과 신무용의 스타 최승희의 경우에서도 관찰된다. 1937년 동아일보에는 “신진무용가 박외선양 결혼. 무용생활 계속은 의문”이라는 기사가 실린다. 문애령은 박외선이 20, 30대를 전업주부로 지내면서 한국 현대무용계에 10여년의 공백기가 생겼다고 진단한다.4) 그녀가 38세에 이화여대 강사로 복귀하는데 예술가의 삶보다는 교육적 행보를 가게 되는 데에도 남편 마해송과의 결혼이 미친 영향이 있다. 《모던 일본》 사장 마해송은 매우 가부장적이며 아내가 공연을 관람하는 바깥출입을 매우 싫어했지만 대학무용교육 연구를 위해 동경에 갔을 때에는 동행하는 외조를 했다는 것이다.5)



줌인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김수인 관련 사진

최승희(2006), 『불꽃: 1911~1969, 세기의 춤꾼』, 서울; 자음과 모음, p.4.


최승희의 활동도 가정과 결혼의 영향을 받은 것이 지대하다. 글머리에 소개한 인터뷰에서 4명의 면담자들은 모두 집과 남편의 이해 없이는 가정과 예술이 양립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최승희가 앞으로 안정해서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10년 동안 더 일하고 싶다고 하자 일동은 모두 놀란다. 이 인터뷰는 남편 안막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옴으로써 종료된다. 이후 최승희가 사회주의자 안막을 따라 월북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들의 사례를 보면 결혼과 가정이 여성 무용가의 활동을 제약하기도 하지만 가능성을 부여하는 측면도 관측된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주효했던 요인들 중 하나로 어린 시절과 결혼 후 가정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자본을 들 수 있다. 박외선과 최승희는 모두 당시 명문 여고를 나올 수 있는 가정환경을 가졌으며, 결혼 후 남편의 경제적, 사회적 자본도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최승희의 경우 오빠 최승일이 문학계 인텔리로 그의 지원이 없었다면 무용을 배우기도 전부터 천재가 될 것이라는 세간의 기대를 모으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근래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무용은 아니지만 클래식음악의 경우 경제적 자본이 높은 집안에서 딸들에게 예술 전공을 시키는 것이 계급재생산의 매커니즘이 된다고 최샛별은 논평한다.6) 스스로의 힘으로 예술이라는 경쟁적 분야에서 전업직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결혼 전,후 가정의 경제적, 사회적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최샛별의 분석은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에서 예술 전공 여성은 스스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보다 ‘성공한 남성의 고상한 취미를 가진 여성’이라는 역할에 국한되어 버릴 가능성이 많다. 무용계에서도 비슷한 얘기들이 들려온다. 부잣집에 시집가서 예쁘게 무용이나 하고 살면 제일 좋다고. 음악에 비해 무용의 경우에는 여성이 결혼을 한다면 임신, 출산, 육아로 인한 공백기 후에 복귀하기가 더욱 힘들다. 무용의 매체인 신체가 직접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과 일을 양립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사회적 자본의 뒷받침이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최승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여성 무용인의 현실


21세기가 되고도 17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우리나라 사회 전반적으로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이 많이 고조되고 있고, 여성들의 사회진출도 많아졌다. 대학을 졸업한 무용 전공생들도 시집이나 잘 가면 된다는 생각보다는 취업 및 사회활동을 하고자 하는 기대가 높아진 것 같다. 이것은 사회에서 주어지는 압박도 있고 본인들 스스로도 바라고 있는 듯하다. 무용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지인들에게 남녀차별이 있냐고 직접 물어보면 거의 못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 작업현장과 가정의 지원에 대해 물어보면 수면 아래에 잠겨있는 여성의 고충들이 감지된다. 결혼, 임신, 육아를 하면 담당해야하는 ‘도리’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것과 나의 사회활동을 같이 한다는 건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가능한 것 같지 않다고. 이 대화를 나눴던 지인 중 한 명은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는 상태였다. 시간을 내서 내 질문에 답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기가 나오고 나면 이만큼 시간 내기도 힘들어.’
육아는 여성의 무용 활동에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7) 무용분야에서는 출산휴가를 받을 수 있는 직장이 극히 드물고 비정규직 레슨 등의 비율이 큰 데, 이럴 때는 레슨 받는 학생의 시간에 맞추어야 할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육아와 병행하기가 매우 힘들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만족스런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기혼 여성으로서 담당해야 하는 가정일, 육아를 “희생”하면서, 혹은 도우미나 베이비시터에게 비용을 지불해가면서, 이런 비경제적인 일을 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게 된다. 김미숙은 이러한 이유로 기혼여성이 노동시장으로 복귀하는 것이 늦어지거나 점점 포기하게 된다고 제시한다.
21세기, 여성이 무용계에서 일하려면 아직도 ‘운이 좋아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발전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는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찬 전망을 하고 싶다. 이를 위해 오늘날의 현실을 냉철하게 진단하는 것이 꼭 필요하겠다.



1) 서지영(2009), “상실과 부재의 시공간: 1930년대 요리점과 기생”, 정신문화연구 32: 167-194.
2) 이병옥(2013), “재인 한성준의 삶과 무용사적 의의”, 『한국 춤의 전개양상』, 송방송 외, 서울: 보고사, 459.
3) Joshua Pilzer, "The Twentieth-Century Disappearance of Kisaeng" in The Courtesan's Arts: Cross-cultural perspectives, Martha Feldman and Bonnie Gordon eds., NY: Oxford University Press, 307.
4) 문애령(2010), “서양무용의 한국 정착기,” 한국무용예술학회 15차 학술발표회 논문집, 14.
5) 김주희, 정의숙(2013). “한국 현대무용 토착화과정에서 박외선의 역할,” 무용예술학연구 41: 35.
6) 최샛별(2002), “상류계층 공고화에 있어서의 상류계층 여성과 문화자본: 한국의 서양고전음악전공여성 사례”, 한국사회학 36: 113-144.
7) 김미숙(2015), “기혼 여성 무용가의 직업적 무용활동에 관한 내러티브 연구”, 한국무용연구 32, 2: 69.




김수인_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김수인은 한국과 프랑스의 궁중용어를 언어 인류학적 시각에서 비교 분석한 논문으로 2011년 템플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 in Dance)를 취득했다. 그녀의 연구는 <무용예술학연구>, <대한무용학회지> 및 Dance Chronicle을 통해 출간되었다. 최근 그녀는 샐리 베인즈의 『춤추는 여성』, 제인 데스몬드 외 『문화연구, 춤의 새로운 이해』, 주디미토마 외 『미디어 시대의 춤』을 공동 번역·출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에서 석사과정 무용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김수인_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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