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씽킹 씨어터#2: 실패하기 워크숍> ⓒ장혜진&김재리
대퇴직의 시대
2021년 6월 이후, ‘대퇴직(Great Resignation)’이라는 단어가 북미와 유럽의 미디어에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Great Depression)과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로 여겨지는 2007-2008 대불황(Great Recession)의 연장선에 있는 대퇴직이라는 단어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발견되는 매우 특정한 사회 현상—근로 능력이 충분한 사람들의 대규모 직업 이탈—을 가리킨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팬데믹의 여파로 인한 해고가 아닌, 근로 인력 개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사직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2021년 4월에서 6월까지 3개월 동안, 약 1150만명의 미국 노동자가 퇴사를 선택했다. 대퇴직의 움직임은 비단 미국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고 있는데, 일례로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사의 워크랩(WorkLab)이 발간한 2021년 보고서는 전 세계 노동 인구의 약 46%가 코로나 팬데믹 이후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팬데믹의 전 지구적 장기화와 잇따른 대퇴직이라는 맥락 안에서, 2021년 7월 21일 줌(Zoom)을 통해 온라인으로 진행된 장혜진 안무가, 김재리 드라마트루그의 공동기획 <실패하기 워크숍>은 흥미로운 시의적절함을 확보한다. ‘자율적인 실패’를 지향하는 이 수상한 워크숍의 기획자들은, 시작으로부터 1시간 정도 경과한 어색한 시점에, 온라인 화이트보드 위에 다소 두서없이, 그리고 확신 없이 배치된 것처럼 보이는 영상 자료, 사진, 각종 인용구와 메모, 에세이와 논문을 읽고, 보고, 또 흩트려 놓을 것을 참여자들에게 요청했다. 17명의 참여자 중 하나였던 나는 커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파편화된 단서들을 뒤적이던 도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21세기의 첫 10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이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에 빠지고 도처의 경제학자들이 망연자실하며 금융 붕괴를 예측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이때가 분명히 실패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Halberstam, 2011, p.82, 번역 및 강조 장혜진) 만약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적절한 순간이라는 게 있다면, 착취의 대상으로 자연을 바라봐온 인간의 태도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실패'시키고, 그 여파로 전 세계의 절반이 ‘그만두기’를 생각하기에 이른 지금보다 더 적절한 순간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실패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기소개
2021년 7월 21일 오후 2시, 워크숍은 장장 한 시간에 걸친 참석자들의 자기소개로 시작되었다. 장혜진과 김재리는 “가지지 못한 것, 하지 않은 것, 하지 못한 것, 어쩔 수 없이 수동적이게 되었던 순간, 밀려나 버린 순간, 지배하지 못한 것들, 지배하려다가 실패한 것들”을 ‘두서없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소개를 대신할 것을 제안하였다. 줌을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 동반할 수 있는 ‘소통 실패’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려는 듯 첫 번째 참석자가 자신의 목소리가 전달되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말하기를 시작했고, 이후 ‘나의 목소리가 당신에게 들리는가?’라는 물음—의구심— 은 하나의 ‘자기 실패 소개’와 또 다른 자기 실패 소개 사이를 규칙적으로 연결하며 다양한 실패의 유사어들이 교환되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규칙적으로 생활을 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편안하고 무심한 마음을 가지고 싶지만 요동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원사업에 떨어진”, “먹을 것에 대한 욕구를 지배하지 못하는”, “소화력이 약한”, “정상성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는”, “스스로의 언어를 찾지 못한”, “국공립 단체의 스케줄에 어쩔 수 없이 맞춰야 하는”, “거주 권한이 없는”, “적당히 일하지 못하는”, “경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예술가로서 멋이 없는”, “길고, 가느다랗고, 납작한 몸을 가지지 못한”,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대중교통을 통해 이동하는 도중에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하는", “기억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는 기묘한 편안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실패의 감각이 타인으로부터 감추고 싶은 수치심, 혹은 자기연민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과 뒤엉켜있는 것이라면, 심리적인 안전 장치가 충분하지 않은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는 행위는 애초에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워크숍이라는 특정한 공동체는 참여자로 하여금 평상시에는 공공연히 나눌 수 없는 개인의 부정적인 감정 상태를 외부화하고 공론화할 수 있게 하는 힘—소속감—을 분명 부여했다. 하지만 이 한시적 공동체가 소멸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속할 수밖에 없는 더 큰 차원의 공동체—작게는 (공연)예술계, 크게는 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참여자 대부분이 미묘한 사회적 자각 혹은 긴장감—이 특별한 공유의 상황 안으로 전면적으로 뛰어드는 것을 경계하는—을 온전히 내려놓기는 어려워 보였다. 예를 들어 한 참가자는 실패에 대해 “나를 취약하게 하는 것,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것, 내가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다른 참가자들의 자기소개를 듣다 보니 “너무 속을 드러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낯선 이들 앞에서 너무 속을 드러내는 것은 ‘실로’ 위험하기에, 워크숍이 진행되는 3시간 동안 참여자들은 참여와 비참여를 순간순간 저울질하는 곤두세워진 감각을 유지한 채로 편안해졌다, 불편해졌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던 것 같다.
자기소개라는 지극히 평범한 절차에서 느껴진 미묘한 불편감에 대해 굳이 이렇게 서술하는 것은 개인적 층위의 ‘부정적 감각’을 ‘공유’하는 행위에 수반하는 이러한 감정적 복합성 자체를 <실패하기 워크숍>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성취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여자들이 가져온 부정 감정의 해소를 일차적 목표로 하는 알코올릭 아노니머스(Alcoholics Anonymous)는 이름이 지시하듯 ‘익명성(Anonymous)’을 기본적 조직 원리로 삼는다. 여기서 익명성은, 참석자들이 심리적 안전장치를 가진 상태에서—이 모임의 누구도 사회적 나를 비판할 수 없다—, 공동체의 장점—공감과 지지—을 얻어가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즉, 사회—모임—이면서, 비사회—익명—인 ‘준사회적 공간’은 참석자 개인이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부정 감정을 경감시킴과 동시에 추가적인 부정 감정이 축적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실패하기 워크숍>이 만들어낸 ‘사회적 이름’—진행자는 참석자들에게 원하는 이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공지하기는 하였지만, 그 이유에 대해 특별한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기에 참석자 모두 본인의 실명을 사용했다—의 공간에서, 참석자들은 각자의 실패의 감각을 공유하고 해소하는 동시에, 타인 앞에 노출된 채로 본인의 무력을 상기하는 행위에서 기인할 수 있는 미래형의 사회적 수치감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이중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이 기획자의 의도였던, 아니면 우발적으로 발생한 흐름이었던 간에, 워크숍의 최초 세팅 자체가 참여자에게 소속감(긍정)과 경계(부정)를 오가는 불안한 감정을 느끼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 참여자들이 실패의 감각—그리고 그에 수반하는 양가적 감정—을 경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기획자들의 목표였다면, 그 시도는 성공했다! 핵심은 오히려 이러한 위험한 성취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성취였냐는 점일 것이다.
<언씽킹 씨어터#2: 실패하기 워크숍> ⓒ장혜진&김재리
실패의 윤리
워크숍이 시작하기 일주일 전, 참여자들은 이메일을 통해 양효실의 논문 <타자와 실패의 윤리: 주디스 버틀러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교차로에서>(이하 <타자와 실패의 윤리>)를 전달받았다. 해당 글에서 양효실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윤리적 폭력 비판≫과 존 쿳시(John Maxwell Coetzee)의 소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교차해 읽으며, 두 글이 공유하는 태도를 “실패의 윤리”(양효실, 2014, p.45)로 명명한다. 칸트 이후 전개된 서구의 인식론과 보편성의 윤리는 자율적이고 자기 동일적인 개인의 합리적 판단에 근거해 왔다. 양효실은 주디스 버틀러와 존 쿳시의 글이 공통으로 칸트적 의미의 근대적 자율성—주어인 나(I)—이 내포하는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폭로하고 자율성-폭력성 ‘이후’를 사유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양효실에 따르면, 이들이 이야기하는 실패의 윤리란 “이성이 아닌 감수성을 공통의 토대로 사용하자는 요청”이자, 또한 보편적 이념의 실패 이후 “우리가 겪어야 할 모욕과 슬픔, 침묵을 환대하자는 요청”(Ibid.)에 다름 아니다. 즉, 버틀러와 쿳시에게 있어 모욕과 슬픔을 겪어내는 행위란 비폭력을 향한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자 존재의 취약성을 보듬는 새로운 윤리로 도약할 방법이라는 것이다.
워크숍 당일, 두 기획자는 <타자와 실패의 윤리>가 분석하는 ‘실패의 윤리’와 <실패하기 워크숍>의 프랙티스(Practice)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해 특별히 강변하거나 부연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집요하리만치 비결정적인 태도로 버틀러와 쿳시의 언어를 재현하는 데만 집중했는데, 이는 자아의 동일성을 부정하고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행위에서 새로운 윤리의 가능성을 찾는 <타자와 실패의 윤리>의 논점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경험할 것을 제시하되, 이러한 실천의 적합성에 대해 참여자 스스로가 개인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열어두고자 하는 제스처로 느껴졌다.
무능하게 말하기 프렉티스
긴 자기소개가 끝나고 이어서 진행된 ‘무능하게 말하기 프랙티스’ 시간에는 <타자와 실패의 윤리>에 등장하는 문구들을 참조한 다음의 스코어가 제안되었다; “일관된 서사로 말하지 않기, 무능하게 말하기, 실패를 환대하며 말하기, 자기 의심—침묵—고통— 슬픔을 보유한 말하기, 수동적으로 말하기, 비서처럼 말하기”. 참여자들은 젠 로젠블릿(Jen Rosenblit)의 <I’m Gonna Need Another One(또 다른 것이 필요할거야)>(2018)과 윌리엄 포펠(William Pope.L)의 <Crawl(기어가기)>(1977~2001)을 보고 느낀 감상을 스코어에 따라 말하기를 요청받았다. 자기 확신이나 관점을 배제한 채 특정한 예술작품을 분석하는 일은 단순한 어색함을 넘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스코어에 뒤따른 참여자들의 말들은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점이 되어 공간 여기저기를 떠다니는 듯했다. 이러한 ‘불가능성’의 감각은 기획자들의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무엇이든 가능하다’에 다름 아닌—와 함께 증폭되어 자기소개 시간 이후부터 계속해서 공간을 지배해온 불안의 감정을 배가시켰다. ‘무능한 말하기’는 분명 자아를 ‘불쾌’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러한 자학적 태도가 환대받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역설적인 ‘성취’의 감각은 버틀러와 쿳시가 애써 해체하려고 했던 자율적 주체성을 도리어 강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능하게 말하기 프랙티스’에 드리운 이 모순의 그림자의 스코어로 인용된 버틀러와 쿳시의 글에서 이미 발견된다. 버틀러와 쿳시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윤리는 근대의 자율적 주체를 비판하고 해체하고자 하는 목표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부정성’의 ‘순결함’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삶의 “일차적 수동성을 긍정하고”(Ibid., p.50), “자아의 지배력에 집요하게 도전하며”(Ibid., p.48), “타자와의 관계에서 기꺼이 훼손당하려는”(Ibid., p.55) 태도는 애초에 근대적 자율성이 지정한 나/타자, 자율성/수동성, 동일성/분열성 이분법을 받아들인 이후에만 가능하다. 자아의 지배력이 강하다고 믿는 사람만이 자아의 지배력에 도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로, <타자와 실패의 윤리>가 다루는 실패의 윤리는 근대적 자아를 갖춘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근대종속적 탈근대의 윤리인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타자 지향적인 감수성이 그녀를 둘러싼 대다수의 주변인에게 기묘하게도 자기중심적인 자기파괴로 여겨지는 대목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실패하기 워크숍>은 참여자들에게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되어보기를 제안하는 워크숍에 다름 아니었기에, 그 결과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존재만큼이나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다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와, 전 세계의 절반이 ‘그만두기’를 생각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실패를 수행해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세계 전체가 분열하는 시점에서 세계와 함께 분열하는 주체는, 세계에 저항한다기보다 세계 자체를 반영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를 저항을 위한 부정성의 전략이 아니라 현실의 존재 조건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관점의 전환일 것이다. 결론을 내리기를 끝끝내 거부하고 참여자들을 양가적 감정의 혼란 상황에 내버려 둔 <실패하기 워크숍>이 참여자들에게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결과적으로 이끌어냈는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이러한 이유로 <실패하기 워크숍>은 미래지향적인 사변이라기보다는 철저히 현재에 입각한, 현재를 바라보게 하는 연습으로 느껴졌다. 만약 우리가 현재를 실패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런데도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것을 침착하게 관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태껏 실패라고 불러온 수많은 것들을 삶의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두 기획자는 다음의 문단을 낭독하는 것으로 워크숍을 마쳤다; “실패를 실천한다는 개념은 아마도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멍청함을 발견하고, 성취도가 낮고, 부족해지고, 주위가 산만해지고, 우회하고, 한계를 찾고, 길을 잃고, 길을 잊어버리고, 숙달을 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벤야민이 이야기했듯이 승자를 공감하는 것은 통치자들에게 변함없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모든 패배자는 그들보다 먼저 패배한 사람들의 상속자이다.”
참고 문헌
- 양효실. (2014). 「타자와 실패의 윤리: 주디스 버틀러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교차로에서」. 『시대와 철학』 제 25권 4호(통권 69호).
- Finn, Emily. (2012). “The Advantage of Ambiguity”. MIT News. Jan 19, 2012.
http://news.mit.edu/2012/ambiguity-in-language-0119
- Halberstam, Jack. (2011). “The Queer Art of Failure”. The Queer Art of Failure. Duke University Press. 87-122.
- Hsu, Ming., Bhatt, Meghana., Adolphs, Ralph., Tranel, Daniel., Camerer, Collin F. (2005). “Neural Systems Responding to Degrees of Uncertainty in Human Decision-making”. Science. Vol 310., Issue 5754.
- Kane, Phillip. (2021). “The Great Resignation Is Here, and It's Real”. Inc. Aug 26, 2021.
https://www.inc.com/phillip-kane/the-great-resignation-is-here-its-real.html
- Mueller, Jennifer S., Melwani, Shimul., Concalo, Jack A. (2011). “The Bias Against Creativity: Why People Desire but Reject Creative Ideas”. Cornell University Digital Commons.
http://digitalcommons.ilr.cornell.edu
- Morgan, Kate. (2021). “The Great Resignation: How employers drove workers to quit”. BBC News. Jul 2, 2021.
https://www.bbc.com/worklife/article/20210629-the-great-resignation-how-employers-drove-workers-to-quit
- WorkLab. (2021). The Work Trend Index 2021. Microsoft.
https://www.microsoft.com/en-us/worklab/work-trend-index/hybrid-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