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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국내외 무용 현장에 관한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관점을 소개합니다.

2022.12.15 조회 4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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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순간’을 조직하기

명사적 안무에서 동사적 안무로

[상설기획: 안무론_동시대 안무 개념의 형상들]



명사적 안무에서 동사적 안무로
‘살아있는 순간’을 조직하기



황수현_안무가



안무는 지금 어떻게 정의되고 있고, 정의되어야 할까? 근대적 주체를 세우는 것으로써, 춤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확립하기 위해 ‘쓰기’의 방법론으로 간주되었던 안무는 근대성을 표상하는 춤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안무는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춤을 옮기기 위해, 더 정확하게는 붙잡아두는 것이 불가능한 운동성을 잡아세우기 위해 고안되었으나, 춤의 ‘수행’이 더 이상 단일한 주체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동시대 예술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안무가들이 이 근대적 안무의 개념을 해체하고 확장시키고 있다.

만약 안무가 단일한 ‘쓰인 움직임의 수행’ 이상의 다른/확장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무의 모습들은 이것과 어떻게 이어지는가? 『춤in』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10월부터 12월까지 세 달에 걸쳐 각기 다른 연구자/창작자들의 안무에 대한 글을 ‘이어 쓰기’의 방식으로 싣는다. 문지윤, 김재리, 황수현 세 사람의 글이 저마다 다른 관점에서 ‘안무의 형상’을 제시하고, 마지막 12월에는 이들의 목소리를 한자리에 모아 좌담의 형식을 통해 서로 다른 안무의 개념들이 어떻게 중첩되고 틈입하고 있는지 이야기 나눠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안무의 동시대적 형상들이 예술에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나아가 지금의 안무들이 확장할 수 있는 영역을 가늠해보는 것이 이번 기획의 목표다. (기획/책임편집자: 조형빈_춤in 편집위원)



안무론: 동시대 안무 개념의 형상들

① 전시 만들기 전략으로서 안무: 집중의 문제와 네거티브 움직임의 발화_문지윤
② ‘우리’는 안무로 무엇을 할 수 있나?: ‘함께하기’를 회복하기_김재리
③ 명사적 안무에서 동사적 안무로: ‘살아있는 순간’을 조직하기_황수현
④ [좌담] 지금, 안무를 어떻게 감각할 것인가_조형빈



음------〉 안무 황수현 ⓒ박수환


안무의 정체

나는 어느 시점부터 “안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을 멈추었다. 더 정확하게는, 나에게 맞는 안무의 속성을 파악하고 난 후 질문의 방향을 ‘무엇’에서 ‘어떻게’로 바꾸었다. 춤을 공연의 형식으로 탐구하던 시기, 나는 내가 속해 있었던 예술 환경에 대한 질문과 의문이 많았다. 특히 오랜 시간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익숙하게 몸에 배어 있었던 춤을 안무와 구분하는 것이 시급했는데, 춤에 붙어있는 안무적 요소를 무용수로서 경험했기 대문에 내가 안무에 대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무용수로 터득했던 기술들이 안무를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산이 되었지만, 둘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시기에 ‘움직임을 고안하고 구성한다’는 언어적으로 동일한 두 가지 개념을 무용수가 아닌 안무가로서 바라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추상적 개념으로 다가왔던 춤과 안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실제로 경험했던 무용수와 안무가의 역할을 기반으로 차이점을 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비교해 보자면, 안무가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질문을 생성하며 현상이 드러나도록 구조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라면, 무용수는 몸을 통해 던져진 질문에 답을 찾으면서 그것을 드러내는 일에 작업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무용수는 자신이 추고 있는 춤과 몸의 현상에 주목하고, 안무가는 현상으로 드러난 춤과 몸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외부에서 바라보는 역할을 맡는다는 차이가 있었다. 같은 움직임을 고안하고 구성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둘은 생각의 위치와 선택의 방향이 달랐다. 춤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다면 춤과 안무를 구분하는 일이 더 쉬웠을까? 생각의 위치와 선택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는 많은 무용수들이 안무를 시작하면서 겪는 일종의 성장통과도 같았다.


‘안무’가 제일 먼저 나에게 한 일은 무대 위에서 춤추기를 의심하게 한 것이었다. ‘춤추기는 무엇을 하는 일인가?’ ‘춤추기와 춤보기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춤 공연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추기’와 ‘보기’ 사이에 나를 위치시켰다. 공연 현장에는 ‘추기’를 준비한 무용수의 몸과 ‘보기’를 장착하고 온 관객의 몸이 상존하는데, 대체로 보여주는 것에 대한 안무는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만 보는 방식에 대한 안무는 쉽게 간과되는 것 같았다. 특히 춤을 출 때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관객에게 잘 전달되지 않아 춤추는 사람과 관객 사이의 감각적 괴리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여주기 위한 춤은 실제와 같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의 위치 이동은 나에게 ‘오늘날 춤 공연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춤 공연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대한 답을 춤의 표현이 아닌 신체 경험의 잠재성에서 찾도록 나를 이끌었다. 나에게 있어 춤이라는 매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매력은, 춤은 그것을 추는 과정 안에서 감각적, 감정적, 인지적 차원의 경험들을 즉각적으로 일으키고 이것들을 통해 내가 모르던 세계를 아는 영역으로 확장 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춤을 ‘보는’ 행위는 춤에서 발생된 것들을 몸 전체로 느끼는 경험이 아니라 시각적 차원의 경험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신체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춤보기를 위한 안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는’ 행위와 춤에 대한 관계성의 실험은 작업으로 나타났다. 2014년에 초연한 나의 작업 〈저장된 실제〉는 ‘춤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보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공간 구조와 시간 그리고 관객의 보는 행위를 통해 풀어낸 작업이다. 이 작업은 영상 매체와 공연을 대조의 방식을 통해 신체 경험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도록 구성했다. 세 개의 분리된 공간에서 각각의 공연을 관람한 관객은 현장에서 움직임을 통해 발생하는 감각적, 운동적, 감정적인 현상을 직접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관객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 편의 영상을 핸드폰으로 전달받는데, 전달된 영상은 공연에서 본 이미지들이 새롭게 조합되어 만들어진 필름이다. 공연을 현장에서 실감한 관객이 현장을 벗어난 장소에서 영상을 봄으로써 공연의 감각을 되살리기를 바랐고, 감각과 상상이 뒤엉켜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한 개인의 허구가 작동되도록 구성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안무를 정의 내리고 개념화하는 일이 때로 창작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했다. 마치 숨 쉬듯 몸에 자연스럽게 붙어있었던 춤의 행위들을 창작 과정에서 하나씩 떼어서 규정하려는 순간, 다양한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변해버리는 안무의 특성을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개념이 하나씩 갱신되거나 정의가 첨가되면서 안무는 모든 것에 이름 붙일 수 있는 전지전능한 무엇이 되었고, 결국 안무가 무엇인지 묻는 일은 무의미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안무는 나에게 현상을 드러내는 장치이자 사람을 다루는 태도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무대 위에서 무엇을 구현하기 위한 작동 방법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이처럼 안무의 정체에 대한 질문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안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안무의 방법론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저장된 실제〉 안무 황수현, 트레일러 영상 캡쳐


안무의 실체

춤은 고정하기 어려운 매체다. 특히 내가 주목하고 있는 ‘몸으로 춤을 추는 행위’를 고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같은 작품이라도 매 공연마다, 춤을 운영하는 무용수의 상태에 따라 춤의 의미가 다르게 작동한다. 불안정한 상태를 고정하기 위해 무용수가 연습을 많이 하면 할수록 춤의 감각과 상황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러면서 춤은 오히려 초반에 찾았던 ‘그것’과 다른 것으로 변질되기까지 한다.


고정하기 어려운 이러한 춤의 특성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택한 안무 방법은 고정된 형태를 명사적으로 표현하는 춤이 아니라 운영 방법에 따라 상태가 변하는, 다시 말해 동사가 구현되는 안무의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슬픔을 춤으로 표현한다고 했을 때, 가장 직관적으로는 슬픔에 대한 이미지나 슬픔에 대한 움직임의 방향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슬픔을 ‘구현’하는 것은 슬픔을 그 현장에서 발생시키는 것이다. 춤의 형태로써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가 발생되는 상태로 전달되는 것을 의미하고, 결국 그것은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구현은, 그것이 실제로 작동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 작업은 관객의 움직임은 물론, 무용수의 상태로 인해 형성되는 현장의 온도, 떨림, 에너지와 같이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발생하는 매질들까지도 내용으로 포함한다. 퍼포머의 행위를 통해 조성된 현장의 분위기까지 안무의 영역이 된다. 명사는 고정적이고 시각적이며 일종의 이미지에 가깝지만, 동사는 가변적이고 잠재적이다. 여기서는 명사가 아닌 동사적 과정 자체가 춤의 본질이며, 그 불완전성 혹은 가변성이 오히려 춤의 잠재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2016년에 내가 만들었던 〈I want to cry but I’m not sad〉는 눈물을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감각과 상상의 영역에서 찾아내어 눈물 흘리기를 구현하는 작업이었다. 그 당시 나는 다른 사람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면, 실제 나의 감정은 슬프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즉각적으로 눈물을 흘리곤 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반응적으로 흐르는 나의 눈물을 관찰하면서, 이것이 나의 실제 감정의 산물이라기보다 몸에 저장된 감각과 연관된 감정의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I want to cry but I’m not sad〉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신체와 감정, 그리고 감각의 연관성을 찾아보고자 실험했던 작업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행위에 주목한 이 작업은 2015년 인도 아따깔라리 레지던시에서 솔로 작업으로 시작하여, 2016년 더 발전시킨 버전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7명의 무용수를 통해 선보이게 되었다. 이 작업은 울어 본 몸의 경험을 추적하여 ‘몸에 저장된 감각과 상상만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이때 무용수들에게 상상의 영역은 슬픈 생각이나 허구적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신체 내부의 감각들을 인지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슬픈 경험을 떠올려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호흡 패턴, 표정, 개개인의 상태에 따라 필요한 움직임들을 개별적으로 다루었는데, 들숨과 날숨의 크기와 속도에 따른 호흡법과 얼굴 근육을 결합해서 사용하자 코끝이 찡해지는 상태가 유발되었다. 갑자기 들어오는 생각이나 판단에 집중하는 대신 신체에서 느껴지는 느낌에 집중하도록 무용수들에게 제안했는데, 이것은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성공했다.


여기서 내가 취한 안무는 ‘눈물 흘리기’라는 고정되기 어려운 동사를 몸의 감각을 운영하는 방법을 터득해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 그리고 많은 연습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이라는 불규칙한 공연 상황과 충돌하면서 눈물 흘리기를 수행하려는 무용수의 의지, 즉 동사적 상태를 만드는 것이었다. 고정된 객석이 있는 극장과 달리 관객들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미술관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무용수의 상태와 우는 소리로 인해 발생한 현장의 분위기는 관객의 동선을 변화무쌍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창작자가 통제 가능한 영역을 넘어서서 발생하는 유동적 차원의 영역을 작업 안에 수용되도록 안무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현장의 동사적 측면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I want to cry but i'm not sad〉 안무 황수현 ⓒ엽태준


안무의 가능성

내가 안무를 통해 몸에 붙들린 것들을 꺼냄으로써 끊임없이 신체적 경험의 잠재성을 드러내고 펼치고자 했던 것은, 그것을 통해 춤과 공연이 일종의 사회적 실천의 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연 안에는 다양한 기호와 이야기들이 담기게 마련이고, 모든 종류의 공연에는 반드시 사회적인 것(social things)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춤이 공연-장(극장이 아닌 곳들을 포함한) 안에서 예술로서 먼저 경험되기를 바라는데, 우리가 공연을 즉물적으로 ‘우선’ 감각하는 것은 바로 공연-장 안에서 일어나는 미학적 경험의 순간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경험이 공연-장 안의 신체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 몸’ 안에 쌓여야만 이것이 공연-장 바깥으로 나가 사회와 마주치고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변화는 거대한 구조를 조직해 세상을 휘어잡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개개인의 경험이 축적된 몸이 만들어내는 균열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안무의 영역을 구성하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사회적 실천의 장으로서의 공연을 만들어내기 위해 공연이 바라보는 방향을 더 낮은 곳으로 돌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방법론으로서 신체적 경험을 어떻게 축적할/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나는 줄곧, 여러 가지 주제들을 다루어 오면서 ‘지금 주목되지 않는 것’들을 보고자 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작업을 해왔다. 꼭 소수자성이나 퀴어함을 주제로서 전면에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힘이 위약해지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공연의 맥락에 녹여내는 방법을 찾았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신작 역시도 동시대 예술의 지형 안에서 집단무가 약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고민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했다.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공연들이 소수의 관객을 받는 것으로 전환되면서 공연을 보는 것 자체가 정보에 익숙하고 빠른 사람들이 가지는 일종의 특권처럼 여겨졌고, 나는 이 부분에 질문이 생겼다. 많은 인원이 모여 공연을 하는 것 그리고 대극장에서 공연을 보는 것이 오히려 도외시되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미래에 사라질 수도 있는 공연 형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따라서 ‘다수’와 ‘규모’가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게 된 지금 그 안에서 발견해 내고 끌어낼 수 있는 잠재성은 무엇일지 탐구해 보는 것을 이번 작업의 목표로 삼고 있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예술에는 주목하는 것을 결정하는 힘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힘에 의해 미학적이지 않은 것들을 미학이 권위로 나누는 과정을 ‘감성의 분할’이라고 이야기했다. ‘감성’은 ‘분할’됨으로써 우리의 감각은 관리되고, 어떤 특정의 감각들이 소통 가능성의 영역을 더 넓게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 높고 강한 힘으로 형상화되는 안무들은 반대편에 존재하는 ‘주목되지 않음’들을 허공으로 날려보낸다. 예술이 ‘분할’의 정치를 떠나 사회적 실천의 가능성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결국 더 낮은 것들을 돌아보고 또 그것을 어떻게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연을 흔히 시각으로서 체험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 춤을 구성하고 그것을 감각하는 데에는 신체를 비롯한 더 많은 감각들이 동원된다. 나는 공연-장 안에 존재하지만 미세하므로, 또 잘 언급되지 않거나 언어화되기 어려우므로 놓쳐버리는 지점들, 그 감각의 순간들을 포착해서 극대화하고자 한다. 특히나 오랜 시간 남성적인 것으로 발현되어왔던 운동성, 그 힘의 크기에 계속해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몸을 가진 자로서 ‘이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힘을 가진 몸들은 어떻게 ‘힘의 균형’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안무 황수현 ⓒ이관헌

동시대 예술 안에서 감정을 예술의 소재로 삼는 것은 지루하거나 예술을 퇴보시키는 일로 간주되어 온 역사가 있다. ‘우는 행위’라는 성인의 감정의 표출은 치욕스러운 행위로, 공공의 장소에서 타인 앞에서 벌여서는 안 되는 종류의 행위였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원인이 되는 사건이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몸이 아주 위약해지는 순간들을 만들어냈고, 나는 이것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2019년 작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의 경우도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점점 사라지면서 ‘공감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소수자가 되어 가는 사회에서, 이 조건들을 어떻게 행위로서 실천적으로 마련하고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작업이다. 공감은 단순히 머리나 감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신체로서 그것을 감각하고 타인의 몸을 알아가는 것이 공감의 정체를 들여다보는 데에 핵심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던 사회적 실천의 장으로써의 예술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했던 것 같다. 이 작품에서 관객의 감정은 일종의 안무 방법론으로 작품 안에 깊숙이 들어왔고, 이 안에서 우리의 신체 경험이 타인들과 연결되어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자 했다. 공연을 본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연결의 경험들이 몸 안에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이 일종의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019년에 초연한 〈검정감각〉도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었던 작업이다. 40분의 공연 시간 내내 무용수들은 눈을 감고 움직이며 서로의 목소리를 이용해 공간과 서로의 위치를 파악한다. 시각이 차단된 몸은 위약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 공연에서 몸이 약해지는 순간 드러나는 것이 ‘돌봄(care)’이다. 무용수들이 어둠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책임지는 돌봄의 태도는 이 공연을 이끌어가는 주된 안무다. 나는 이 과정에서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 ‘돌봄’이라는 사회적 감정을 작품 안에서 발생시키고 싶었다. 눈을 뜨고 춤을 출 때에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상황이 눈을 감는 순간 나의 몸을 보호하기에도 급급한 위험한 상황으로 바뀌어 버린다. 여기에서 같은 공간 안에 들어와 있는 타인은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참조점이자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무용수들은 손의 감각으로 파트너를 찾아 이동하거나, 발의 감각을 이용해 관객에게 다가간다. 서로를 ‘돌보며’ 생기는 무용수들의 미세한 감각은 긴장과 안도를 오간다. 이 ‘불안정한’ 공연 안에서 관객은 무용수들의 감각을 신체적으로 공감하며, 나는 이 ‘불안정함’과 ‘돌봄’이 관객의 몸 안에 전이되어 담기기를 바랐다.


나에게 있어 ‘안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고 안무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질문이 창작의 과정에서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어떻게 동사적 차원의 행위로 만들어지는지, 또 어떤 구현의 문제들을 발생시키는지가 중요하다. 그러한 동사적 행위들이 일어날 때 안무에는 실제적 차원의 매질이 작동하게 된다. 매질은 무대 위에서뿐만 아니라 공연-장 전체의 분위기와 객석의 온도, 관객의 태도를 포괄하는 총체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 ‘동사’를 구현하는 안무의 방법론은 창작자의 태도와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창작자의 태도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그대로 반영되며, 이것은 곧 작품이 어떻게 삶의 차원으로 이어지는지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예술이 사회적 실천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창작자가 안무와 작품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는지를 고민하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위약함을 돌보는 몸을 어떻게 감각하고 관객의 몸 안에 잠재시킬 수 있는지, 안무를 닫힌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열린 ‘동사’로 바라볼 수 있는지 그 태도를 고민하고 훈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안무의 가능성이다.


〈검정감각 360〉 안무 황수현 ⓒAiden Hwang
  1. 1)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 오윤성(역). 서울: 도서출판 b. 2008.
황수현_안무가 황수현은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다. 퍼포밍과 관람 사이에서 작동하는 감각-감정-신체의 관계에 주목하며 그 사이의 새로운 감각 또는 낯선 신체 경험의 잠재성을 탐구한다. 최근 ‘공연예술에서 신체를 매개로 하는 작업은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미래의 감각-감정-신체에 관해 탐구하고 있다. 안무작으로는 〈저장된 실제〉(2014), 〈I want to cry, but I'm not sad〉(2016), 〈우는 감각〉(2018),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2019), 〈검정감각〉(2019), 〈음------〉(2020)등이 있다.
hwang.soohyun@gmail.com
황수현_안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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