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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국내외 무용 현장에 관한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관점을 소개합니다.

2022.10.11 조회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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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의 문제와 네거티브 움직임의 발화
Choreography as a strategy of exhibition-making:
A Matter of Attention and Utterances of Negative Movements

전시 만들기 전략으로서 안무

[상설기획: 안무론_동시대 안무 개념의 형상들]



전시 만들기 전략으로서 안무
집중의 문제와 네거티브 움직임의 발화
Choreography as a strategy of exhibition-making:
A Matter of Attention and Utterances of Negative Movements



문지윤_큐레이터



안무는 지금 어떻게 정의되고 있고, 정의되어야 할까? 근대적 주체를 세우는 것으로써, 춤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확립하기 위해 ‘쓰기’의 방법론으로 간주되었던 안무는 근대성을 표상하는 춤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안무는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춤을 옮기기 위해, 더 정확하게는 붙잡아두는 것이 불가능한 운동성을 잡아세우기 위해 고안되었으나, 춤의 ‘수행’이 더 이상 단일한 주체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동시대 예술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안무가들이 이 근대적 안무의 개념을 해체하고 확장시키고 있다.
만약 안무가 단일한 ‘쓰인 움직임의 수행’ 이상의 다른/확장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무의 모습들은 이것과 어떻게 이어지는가? 『춤in』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10월부터 12월까지 세 달에 걸쳐 각기 다른 연구자/창작자들의 안무에 대한 글을 ‘이어쓰기’의 방식으로 싣는다. 문지윤, 김재리, 황수현 세 사람의 글이 저마다 다른 관점에서 ‘안무의 형상’을 제시하고, 마지막 12월에는 이들의 목소리를 한자리에 모아 좌담의 형식을 통해 서로 다른 안무의 개념들이 어떻게 중첩되고 틈입하고 있는지 이야기 나눠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안무의 동시대적 형상들이 예술에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나아가 지금의 안무들이 확장할 수 있는 영역을 가늠해보는 것이 이번 기획의 목표다.



① 전시 만들기 전략으로서 안무: 집중의 문제와 네거티브 움직임의 발화_문지윤
② ‘우리’는 안무로 무엇을 할 수 있나?: ‘함께하기’를 회복하기_김재리
③ 명사적 안무에서 동사적 안무로: ‘살아있는 순간’을 조직하기_황수현
④ [좌담] 지금, 안무를 어떻게 감각할 것인가_조형빈



Anne Teresa De Keersmaeker Work/Travail/Arbeid at MoMA. Photograph by Julieta Cervantes, The Museum of Modern Art

전시라는 예술적 경험을 생산하는 기제가 독립된 창작의 영역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비엔날레라는 예술 생산 제도의 부상과 관계가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비엔날레는 글로벌 사우스(the Global South)의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 현대미술 실험의 생산과 수용의 플랫폼으로 기능하였다. 비엔날레에서 큐레이터는 단순히 완성된 작품들을 모아서 전시하는 수동적 관리자의 역할에서 나아가 주변부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중앙무대에 소개하고, 특정한 배열과 배치를 통해 동시대 예술의 시대정신, 나아가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제시하는 저자로서 작동하였다.1


저자로서 큐레이터의 등장은 전시의 전통적인 역할을 변화시켰다. 전시라는 것이 작가의 비밀스러운 스튜디오 안에서 이미 완성된 작품을 수동적으로 디스플레이하는 공간에서, 새로운 예술 생산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실험실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시라는 기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2000대 이후 서양 주요 미술관의 비엔날레화(biennalisation of museums)를 통해 빠르게 제도화되었다. 물론 미술관의 비엔날레화는 밀레니엄을 맞아 본격적으로 가속화된 서양 주요 도시에서 미술관 확장 사업이 도시 재개발 사업과 맞물려 진행되었기에, 기존 미술관들이 비엔날레의 환경과 유사하게 과거 공장이나 산업 단지 속에서 전시를 선보임으로써 거대한 스케일의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것이 가능해진 이유도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미술관들이 기존의 수동적인 저장창고의 역할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새로운 예술 경험을 생산하는 능동적인 전시 생산 플랫폼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로 인해 비엔날레와 미술관이라는 예술적 경험의 생산 기제 사이의 간격이 좁아졌던 것이다.


밀레니엄 이후 개관한 서양 주요 미술관이 스스로를 능동적 전시 생산 플랫폼으로 제시하면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현상은 퍼포먼스 프로그램과 춤-전시의 출현이다. 물론 춤과 시각예술의 학제간 협업은 아방가르드 예술 역사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밀레니엄 이후 춤-전시들은 단순히 춤을 전시 공간에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춤을 생산하는 무용제도에서 기술 장치로 작동하였던 안무를 적극적으로 전시-만들기의 전략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이전까지의 아방가르드 역사와 차이를 보인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전시 만들기 전략으로서 안무의 등장이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실험이었다기 보다 예술적 경험 생산에 있어 새로운 저자성이 부여된 큐레이터들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점이다. 2010년 이후 전시 만들기 전략으로서 안무적 실험에 대해 논의할 때 빠질 수 없는 자비에 르 루아(Xavier Le Roy)의 〈회고전(Retrospective)〉은 2012년 바르셀로나 안토니 타피에 재단(Fundació Antoni Tàpies)에서 열렸다. 자비에 르 루아는 1990년대 말부터 시각 예술의 현장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한 농-댄스(non-dance)라 불리던 일련의 제도비판적 현대무용의 실천에 있어서 핵심적 인물이었다. 자신의 전시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며 르 루아는 블랙 박스를 떠나 화이트 큐브에서 벌어진 자신의 안무 실험을 촉발한 것은 큐레이터의 초대라고 밝혔다. 당시 타피에 재단 관장이었던 큐레이터 로렌스 라셀(Laurence Rassel)은 한번도 전시 만들기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르 루아를 초대해 화이트 큐브라는 특정한 시공간적 조건을 새로운 작업 생산의 조건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큐레이터의 저자성은 특정한 시공간적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이전에 전혀 가능하지 않았던 예술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저자로서 큐레이터들은 왜 안무라는 무용 제도의 춤 생산 장치를 전시 만들기의 전략으로 주목했던 것일까?


큐레이터 저자성의 특징은 큐레이터의 작동 방식이 직접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을 반영한다는 점에 있다. 현장의 제도적 조건을 민감하게 분석하는 미술사학자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은 “Dance in Museum(미술관에서 춤)”이라는 논문에서 현재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의 관장인 알렉스 파커슨(Alex Farquharson)의 코멘트를 인용하면서, 밀레니엄 미술관에서 퍼포먼스 혹은 춤 관련 프로그램이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은 특별히 동시대 예술의 시대정신(artistic zeitgeist)을 반영하였기보다, 미술관 기금 모금 캠페인의 성취이자 기회주의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2 특히 영국의 경우 2000년대 이후 미술관에 대한 공적 지원이 축소되고 미술관 운영이 사기업의 기부 활동에 의존하게 되면서 미술관은 기업들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고, 미술관 스스로가 제시한 해결책은 스스로를 모두를 위한 엔터테인먼트 공간이자 이벤트 생산 플랫폼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2000년대 오픈한 테이트 모던(Tate Modern)의 터바인홀(Turbine Hall) 프로젝트와 더 탱크(The Tanks) 프로그램들은 이벤트 생산 공간으로서 미술관의 주요 성공 사례이다. 다시 말해 서양 주요 미술관의 비엔날레화는 미술관의 대형화와 기업화를 촉진하였던 것이다. 비숍이 “Black Box, White Cube, Gray Zone: Dance Exhibitions and Audience Attention(블랙 박스, 화이트 큐브, 그레이 존: 춤 전시와 관람객의 집중)”에서 지적하듯, 이러한 환경 속에서 퍼포먼스 혹은 춤 관련 프로그램은 ‘집중’이라는 한정된 희소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마케팅 전략이었다. 소셜 미디어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혼합현실에서 우리가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점차 떨어지고 있다. 기존의 전시가 고정된 구성이 전시 기간 내내 지속되는 것이라면, 퍼포먼스 혹은 춤 프로그램은 공연의 일시성으로 인해 관람객들의 집중도가 높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2007년 애플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각종 소셜미디어가 주요 마케팅의 장으로 등장하면서 미술관에서 퍼포먼스 프로그램은 미술관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노출시키고 소셜 미디어 장에서 반복적으로 미술관의 브랜딩을 강화시키는 주요 마케팅 전략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퍼포먼스 프로그램과 춤-전시가 밀레니엄 미술관에서 주요 프로그램으로 안착하면서 안무가들은 전시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초대되었다. 앞서 언급한 르 루아의 〈회고전〉은 무용 제도의 기술이었던 안무가 어떻게 화이트 큐브라는 특정한 시공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비평(critique)의 역할을 수행했는지 잘 보여준다. 르 루아는 전시의 제목부터 ‘회고전‘이라고 칭함으로써, 자신의 안무 작업을 전시를 구성하는 특정한 구조를 재배열하는 것으로 제시하였다. 안무는 예술가에게 주어진 제도적 조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전략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사실 비평으로서 안무는 르 루아가 블랙 박스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를 화이트 큐브에 적용함으로써 안무를 전시-만들기의 조건들을 드러내는 전략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화이트 큐브라는 서양 근대에서 형성된 전시 작동 방식은 몸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무대에 대해 일방적인 집중이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어 관람객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블랙 박스에 비해, 화이트 큐브는 관람객들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다층적인 집중이 허락된 공간이다. 또한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전시는 적어도 7시간에서 많게는 9시간까지 이루어지고, 관람객들은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자유롭게 공간을 드나들 수 있기에 블랙 박스가 전제하는 단시간의 고도의 집중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다고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몸이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다. 이곳에서 한 관람객의 움직임은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다른 관람객의 움직임과 동선에 영향을 미치고, 모두가 서로를 인지하지 않는 듯 하지만 서로의 움직임에 대해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분명히 작동하지만 모두가 인지하지 않기로 약속한 몸과 불멸의 시간을 부여받은 듯한 예술 작품이 발생시키는 시공간적 조건은 회고전이라는 전시의 특정한 유형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한 작가의 작품의 역사를 하나의 시공간 속에 공존 시키고자 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을 실현시키는 회고전이라는 전시 생산 구조가 특정한 시공간적 조건을 드러내는 르 루아의 비평적 안무로 인해 투명해졌던 것이다.


무용 제도를 구성하는 조건들의 재배열과 재배치를 실행하는 비평적 안무는 1990년대 말 시각 예술에서 주목한 일련의 안무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르 루아의 비평적 안무가 회고전이라는 전시 생산 기제의 구조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다면,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의 비평적 안무는 전시라는 예술적 경험을 생산하는 기제에 반응하며 감각 경험의 확장을 시도하였다. 르 루아의 경우처럼 케이르스마커의 Work/Travail/Arbeid(작업/작업/작업)이라는 제목의 전시는 브뤼셀 바일(WEILS)의 당시 큐레이터 엘레나 필리포빅(Elena Filipovic)의 초대에 의해 시작되었다. 필리포빅은 블랙 박스에서의 공연으로 기획된 케이르스마커의 〈볼텍스 템포럼(Vortex Temporum)〉이란 공연을 화이트 큐브에서 전시로 재구성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상연되고 끝이 있는 블랙 박스에서의 공연에 비해 하루 7시간에서 9시간가량의 상대적으로 긴 지속 기간을 전제하는 화이트 큐브에서 전시로써 제시된다는 것은 관람객의 동선을 완전히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무용수들은 블랙 박스 공간이 보장하던 관람객과의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포기해야 했고, 블랙 박스 안에서 한 방향으로 집중되었던 관람객의 시선이 분산되는 것 역시도 감내해야 했다. 물론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눈앞에서 움직이는 무용수들을 배려하느라 스스로를 한 방향에 고정시켜 자발적으로 블랙 박스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전시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던 관람객에 의해, 혹은 전시장에서 돌발적으로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에 의해 무용수들의 동선과 위치는 계속해서 조정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무용수들의 움직임의 조정은 역설적으로 전시장에서 생산된 네거티브(negative) 움직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네거티브 움직임이란 부정적인 움직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네거티브 필름에서와 같이 무용수의 움직임과 맺고 있는 전도적(reversal)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구체적 의도에 의해 생산되고,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파지티브(positive) 움직임이라고 표현한다면, 화이트 큐브 맥락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조정하는 관람객의 움직임을 네거티브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랙 박스가 파지티브 움직임을 강조하고 재현하는 프레임을 제공하였다면, 화이트 큐브에서 케이르스마커의 비평적 안무는 네거티브 움직임을 느낄 수 있게 함으로써 움직임에 대한 감각 경험의 폭을 확장시켰다. 화이트 큐브에서 무시되었던 관람객의 움직임이 케이르스마커의 안무적 개입으로 인해 감각의 대상이 됨으로써, 전시라는 예술적 경험이 나의 몸을 넘어 타인의 움직임에 의해 발생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케이르스마커의 비평적 안무는 전시라는 예술적 경험 생산에 있어 수동적인 구경꾼에 머물렸던 관람객들의 신체의 움직임을 결과적으로 감각하게 함으로써, 무용수들의 파지티브 움직임이 보다 복합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되는 것임을 인지할 수 있게 했다. 나아가 무용수들의 파지티브 움직임은 서로의 네거티브 움직임과 상호작용하는 것이었다.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되며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가이드하기 위해 전시장 바닥에 그려진 서클들은 이전에 이 자리에서 춤췄던 몸들의 흔적으로서 무용수들 사이에 발생하는 네거티브 움직임의 존재를 물리적으로 드러냈다. 이 네거티브 움직임의 발화의 효과가 보는 것에 치중했던 전시라는 예술적 경험의 폭을 확장시키고, 전시를 타인의 몸을 인지하는 감각적 경험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전시-만들기 전략으로서 안무는 네거티브 움직임을 발생시킨다. 전시장은 이미 관람객의 움직임을 포함하고 있기에 블랙 박스에서 파지티브 움직임에 치중하던 안무는 전시장에서 몸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에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안무적 개입으로 인해 발화되는 네거티브 움직임은 무용수들의 파지티브 움직임에 복합적인 층위를 부여하고, 관람객들을 단순히 보는 역할에서 움직임의 생산자로 변화시켰다.


  1. 1) 큐레이터의 매개자로서의 저자성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문지윤, “매개자의 저자성”, 서울문화재단 서울무용센터 웹진『춤in』
    http://choomin.sfac.or.kr/zoom/zoom_view.asp?type=VW&zom_idx=759&div=01
  2. 2) Claire Bishop, “Dance in Museum”, Dance Research Journal, 46/3/Dec 2014, p.67.
  3. 3) Claire Bishop, “Black Box, White Cube, Grey Zone: Dance Exhibitions and Audience Attention”, The Drama Review, Volume 62, Number 2, Summer 2018, pp. 22-42.
  4. 4) 케이르스마커는 다양한 서클 구조의 합을 통해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배열하고 배치하였는데, 이러한 구조를 무용수들로 하여금 전시장 바닥에 직접 그리도록 하였다.
문지윤_큐레이터 문지윤은 큐레이터이자 확장된 현대예술의 실천을 연구하는 이론가이다.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큐레이터학을 전공하였다.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 제출한 박사 논문 “Choreo-graphy: The Deinstitutionalisation of the Body and the Event of Writing”에서 동시대 예술가들이 코레오그래피라는 춤추는 몸을 쓰는 기술을 어떻게 전시 만들기라는 시각예술생산 기제를 해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작동시켰는지 분석하였다. 공공예술, 건축, 퍼포먼스 프로그램 등 확대된 예술의 영토에서 일해 왔으며 아트선재센터, 백남준아트센터,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일했으며 영국 리버풀 비엔날레에서 프로그램 총책임자를 역임했다. 현재 가천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국민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주요 역서로는 안드레 레페키(Andre Lepecki)의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Exhausting Dance)』가 있다.
moonjeyun@gmail.com
문지윤_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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