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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16.10.27 조회 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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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드슨 교회(Judson Church)와 그들의 춤에 대한 비평

조지 잭슨(George Jackson)_무용비평가

지난 2010년에 쓴 다음의 회고 글을 통해 조지 잭슨은 질 존스톤(Jill Johnston)과 알렌 휴즈(Allen Hughes)가 쓴 비평문들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 두 명의 무용 비평가들은 일찍이 지난 1960년대에 저드슨 무용단(Judson Dance Theater)에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이 글에서 잭슨은 질 존스톤(Jill Johnston)이 <빌리지 보이스(the Village Voice)>지에 숨이 차오를 만큼 열정적으로 쓴 글들과 알렌 휴즈(Allen Hughes)가 음악 비평가로 잠깐 활동하던 시기에 엄격한 방식으로 편견 없이 작성하여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지에 게재한 글들을 비교하고 있다. 저드슨 무용단이 50 주년을 맞아 그들이 거쳐 온 역사를 다시금 돌아보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려는 지금, 우리는 저드슨 무용단의 초기 시절에 이들 두 비평가들이 발휘한 호기심과 아울러 이 무용단이 전성기를 달릴 때 그들이 지속적으로 보인 관심으로부터도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잭슨이 쓴 기사는 원래 미국무용평론가협회(Dance Critics Association)가 발행한 뉴스레터에 처음 실렸다. 따라서 이번에 재게재되는 다음 글은 온라인에서는 처음으로 발표되는 것이다.



지난 1960년대 초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에 소재한 저드슨 기념 교회(Judson Memorial Church)에서 “문화적인 것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새로운” 유형의 무용이 탄생했다. 그리고 만약 이들 두 비평가, 즉, 질 존스톤과 알렌 휴즈가 직접 그곳을 찾아가 그들의 무용 공연을 보고 그들의 춤에 대해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그들의 춤은 그쯤에서 사라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자신들이 쓴 비평문(존스톤은 대부분의 글을 주간 대안잡지인 <빌리지 보이스>지에 기고했고, 휴즈의 경우엔 주류 일간지인 <뉴욕 타임즈>에 기고했다)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비록 이들 비평가 각각이 서로 구별되는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통찰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무용과 관련한 언론 매체들 다수는 저드슨 무용단을 거의 무시하거나 처음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어쩌면 이 무용단이 만들어낸 현상이 기존의 카테고리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무용은 아주 현대적인 무용도 아니었고, 일부 발레 전공 무용수들이 참여했음에도 규칙적이거나 클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훈련을 받았든 그렇지 않든,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춤을 출 수 있도록 격려했고,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공연을 무용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비트(Beat) 문학이나 팝 아트 화가들이 매우 활동적으로 벌이는, 계획에 없던 예술적 행위(Happenings)라는 느낌을 받았다. 확실한 근거자료가 부족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 하나는, 사람들이 저드슨 무용단의 춤에 관심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존스톤과 휴즈가 쓴 비평 덕분이었다는 점이다. 그 후, 이들의 춤에 관심을 보이는 청중들은 점점 늘어났다. 예컨대, 1962년에는 누군가 저드슨 무용단이 공연하는 장소에 맨 마지막으로 입장해도 관람하기 좋은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2년 뒤인 1964년에 이르게 되자, 그들의 춤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체 두 비평가가 자신들의 비평에서 이들의 춤에 대해 뭐라고 언급했기에 독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태도를 바꾸게 된 것일까?

두 비평가들 모두 최근에 유명을 달리했는데, 휴즈는 2009년 11월 16일, 향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존스톤의 경우, 지난 2010년 9월 18일에 8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 그들이 비평가와 무용 비평가로서의 경력을 걸어오면서 겪었던 당시 상황을 일부라도 되돌아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수 있다고 본다. 특별히 그들이 저드슨 무용단에 대한 비평가로서 활동했던 것을 중심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존스톤은 저드슨 무용단을 그들의 안에서 지켜보며 비평한 것인 반면, 휴즈의 경우, 밖에서 그들의 무용을 비평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긴 하지만, 필자는 그들의 비평이 가진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실용적인 접근법의 하나로 이러한 주장에 여전히 귀 기울일 생각이다. 내부자적 입장에서 비평하는 사람은 미지의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해당 주제에 대해 그들이 알 수 있도록 객관적인 정보와 설명을 충분히 포함시켜야 하며, 아웃사이더 입장에 있는 비평가는 껍데기뿐인 외관 이상의 무언가를 독자들이 떠올릴 수 있도록 하기위해 충분한 통찰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존스톤과 휴즈는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이들 각자가 지닌 각기 다른 배경과 표현 수단 탓에, 이들은 그들의 무용에 대해 각기 다르게 글을 쓰게 되었다.


줌아웃 무용비평가 조지 잭슨(George Jackson) 관련 사진

Jill Johnston at the Gay Liberation Day rally in New York, 1971. Photo: Fred W. McDarrah/Getty Images.


존스톤은 비평가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비평 활동을 했던 곳은 루이스 호스트(Louis Horst)가 이끌던 <댄스 옵져버(Dance Observer)>지에서였고, 그 다음으로는 <빌리지 보이스>지에서 무용 칼럼니스트로 글을 썼다. 또, 그녀는 가끔 다른 곳에도 글을 기고한 바 있는데, 여기에는 알린 크로체(Arlene Croce)가 이끌던 <발레 리뷰(Ballet Review)>지와 심지어 <뉴욕 타임즈>지도 포함된다. 그녀 스스로가 자신은 1957년~1959년에 처음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가 이후에 그것을 바꾸었다고 했는데, 그녀는 “1965년까지 나는 비평에만 전념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1). 하지만 최초로 관련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녀는 일반적인 종류의 비평가는 아니었다. 이 당시 그녀가 쓴 글들에서는 어떠한 조급함이 느껴지는데, 이로 인해 그녀의 글은 자신이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던 예술작품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분명 작품을 묘사하고 있고, 이따금 그것의 세세한 부분들에까지 열중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마치 자신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음을 입증해야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치 “주님의 기름 부으심 받은(anointed)”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존스톤도 미(beauty, 美)에 민감했다. 그녀는 그러한 미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전했다.(“무대 앞쪽 대각선으로 단숨에 날아오르며, 아일린 패슬로프(Aileen Passloff)는 죽어야 할 것들이 덧없고 한 때 뿐인 일들에 관여하고 있는 그 어떤 평범한 울타리 안으로도 들어가지 않고 있다”) 존스톤은 어떤 특정한 작품보다는 그 작품을 만든 아티스트에 종종 흥미를 가지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그녀는 계속해서 초점을 바꾸어 이 작품 저 작품으로 널뛰기를 하곤 했다. 이렇게 불안하다보니 그녀의 글엔 늘 흥분이 배어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저 너머 궁극적으로 응시하고 있던 것은, 과연 예술이란 것이 어떻게 창조되느냐에 관한 질문이었다. 테크닉이나 스타일보다 과정이야 말로 저드슨 무용을 정의하는 것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 점에서 존스톤은 모든 종류의 무용을 다루는 비평에서 과정을 주요한 토론 주제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특별히 존스톤이 비평한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그녀가 비평한 저드슨 무용단의 무용수들은 매우 광범위하다. 그녀가 비평의 대상으로 다루었던 사람들은 1962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저드슨 교회에서 춤을 추었던 사람들과 저드슨 무용단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이들, 작곡가 로버트 던(Robert Dunn)이 이끌었으며 향후 중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워크숍에 참여했던 이들, 그리고 이들과 협력하거나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2) 또, 그녀는 자신이 저드슨 무용단의 선구자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평했는데, 그러한 이들로는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존 케이지(John Cage)와 폴 테일러(Paul Taylor), 그리고 안나 할프린(Ann(a) Halprin)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분명 저드슨 무용단에 속해 활동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존스톤이 무용과 관련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과거 현대 무용과 발레계의 일부 유명 인사들도 있는데,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과 도리스 험프리(Doris Humphrey),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찰스 와이드먼(Charles Weidman), 호세 리몽(Jos Limn), 쿠르트 요스(Kurt Jooss), 로테 고슬라(Lotte Goslar), 안나 소콜로프(Anna Sokolow), 프레데릭 애쉬톤(Frederick Ashton),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그리고 레오니드 마신(Lonide Massine)이 그들이다. 그녀는 당시에 유명했던 몇몇 안무가들을 다루기도 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예컨대, 노먼 워커(Norman Walker)와 브라이언 맥도널드(Brian Macdonald), 존 버틀러(John Butler), 그리고 리차드 쿠크(Richard Kuch)가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인물들 가운데 존스톤이 가장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은 몇 명 되지 않았는데, 저드슨 무용단의 무용수이자 안무가이기도 한 이본느 라이너(Yvonne Rainer)와 스티브 팩스톤(Steve Paxton),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그리고 루신다 차일즈(Lucinda Childs)가 바로 그들이다. 또한 여기에는 커닝햄(Cunningham)/케이지(Cage)와 그레이엄(Graham)도 포함된다. 존스톤이 그레이엄을 비평하는 글을 쓰며 사용한 단어 수는 아마 다른 어떤 무용수들보다 많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그레이엄을 과거 시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생각했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그녀가 존스톤의 글에서 계속해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여성으로서의 그레이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존스톤의 말에 따르면, 1965년에 그녀의 글쓰기가 변화했다. 그녀는 이러한 변화를 두고 한 명의 비평가로서 그녀가 쓰는 글은 물론이고, 일개 평범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삶에도 “대화재(conflagration)”가 발생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게 “정신병 환자(mental case)"화하면서, 그녀는 그 점을 유리하게 이용해 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는데, 특별히 비평이 수행하는 “탁상공론적”이고 “정치적인” 역할에 대해 그러했다.

20세기를 거치며 무용에서 일어난 변화 가운데 하나는, 무용의 정의를 둘러싼 다양한 사상들이 급속하게 확산된 것이었는데, 이로써 이전에는 무용이라고 간주되지 않던 동작들이 지금은 무용으로 인정받았다. 평범한 행동과 게임, 그리고 각종 신체적 활동들을 자신의 무용에 끌어들인 저드슨 무용단은 위에서 언급한 확산의 아주 적절한 예였다. 필자는 존스톤이 일으킨 변화가 삶의 모든 측면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무용의 정의를 밀어붙였다고 생각한다. <빌리지 보이스>지는 존스톤에게 “대화재”가 난 이후에도 그녀가 쓴 글들을 계속 게재했다.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극단적인 의식의 흐름이었다.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의 대안적인 목소리로서 해당 잡지는 자신들이 그녀의 글들에 대해 관용을 베풀고 그녀가 벌이는 실험을 지지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들로부터 항의가 제기된 바람에 해당 신문은 좀 더 객관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구문론적인(syntactic,構文論) 무용 비평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다른 필자들을 불러들였으나, 존스톤은 “1세대” 저드슨 무용단은 물론이고, 심지어 “2 세대”를 지나쳐 1970년대의 한복판에 이를 때까지, 그리고 그녀 스스로 연이어 다른 관심사로 이동해갈 때까지 <빌리지 보이스>지에 계속해서 “무용” 칼럼들을 썼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선사했던 것은, 지금 막 탄생하고 있던 무용이 제공하는 느낌이었다. 이 때문에 지금도 그녀의 글을 읽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줌아웃 무용비평가 조지 잭슨(George Jackson) 관련 사진

Ray Johnson helping Andy Warhol film Jill Johnston Dancing at the Factory, 1964. Photo: Billy Name.


존스톤은 때때로 동료 비평가들도 언급했는데, 그렇게 언급된 무용 비평가들로는 에드윈 덴비(Edwin Denby)와 월터 소렐(Walter Sorell), 아서 미첼(Arthur Michel), 루이스 호스트(Louis Horst), 그리고 클라이브 바른스(Clive Barnes)가 있다. 그녀는 바른스와 논쟁하는 것을 즐겼으며, 덴비(Denby)와 대화하는 것도 좋아했다. 예술 비평가인 진 스웬슨(Gene Swenson)은 교묘하게도 존스톤이 쓴 글에서 피해나갔다. 1960년대 초기에 존스톤과 필자는 이따금 공연의 중간 휴식 시간 때 고개로 인사하곤 했다. 우리에게는 서로 아는 지인들뿐만 아니라, 친구로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 대한 한 소문으로 인해 우리들의 친구 한 명이 중재에 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당시 돌았던 소문의 내용은 우리가 저드슨 무용단에 대해 썼던 비평들이 실은 대필된 것이며, 대필해 준 사람은 동일한 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내 짐작에 그는 우리보다 약 10년 정도는 더 젊은 20대였고, 언변도 좋았으며, 미남에다가, 뉴욕 시내 무용계에서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이따금 그는 잡담을 나누러 공연을 보고 있던 나를 찾아오곤 했는데, 우리가 보고 있었던 무용에 대해 그가 논평한 것들은 일리가 있었고, 이를 통해 그가 무용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그가 어느 때고 무용에 대해 글을 써 볼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때 그는 이미 그런 글을 썼지만, 다른 비평가의 이름으로 게재중이라고 답했다. 내게는 그의 답변이 이상하게 들렸지만, 그는 그 이상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그에게 그가 쓴 글의 샘플을 필자에게 보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아마도 필자가 그 사람 본인의 이름으로 그의 글을 게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당시에 일부 유럽의 무용 관련 출판물들은 뉴욕 무용을 다뤄줄 통신원들을 물색 중이었던지라 마침 필자에게도 접촉해왔지만, 필자는 이미 로이스 호스트가 발행하던 잡지와 영국에서 발간하는 <발레 투데이(Ballet Today)>에도 글을 기고하고 있었던 터라, 다른 누군가를 필자 대신 추천하면 좋을 것 같았다. 필자의 제안에 그 박식한 젊은 남자는 내 주소를 받아갔고, 조만간 그가 쓴 글 가운데 일부를 내게 보내겠다고 말했다. 필자는 시즌 내내 시내에서 열린 공연들에서 그를 계속해서 봤고, 한번은 그가 자신이 대필해주는 사람이 질 존스톤이라고 언급했다.

그 후 화가이자 바이러스 학자이기도 한 프랭크 릴리(Frank Lilly)가 한 디너파티에 필자를 초대했을 때도 필자는 여전히 그 젊은이의 비평 글 샘플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프랭크는 필자가 초대될 파티는 규모가 작을 텐데, 그 이유는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이 서로 안면도 트고 얘기도 나눴으면 하는 바람에서라고 말했다. 실제로도 그 파티엔 딱 우리 네 명만 왔다. 즉, 질 존스톤과 첼리스트인 샬롯 무어만(Charlotte Moorman), 프랭크 그리고 나. 질은 때때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처럼 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따듯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했으며, 남의 말도 잘 경청했다. 필자는 본인이 편집자로서 루이스 호스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필자가 저드슨 무용단에 대해 썼던 글에 대해 그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던 일, 그리고 그가 그 글을 싣기를 거부한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파티가 끝나갈 때쯤엔 질과 같이 있는 것이 충분히 편해졌다고 느껴져서, 질에게 그녀를 위해 대필해주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질문에 너무 놀라워하며, 필자가 자신에게 말한 것이 바로 정확히 그녀가 필자에 관해 들었던 소문과 동일하며, 이것과 연루된 사람은 동일한 한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우리를 파티에 초대했던 호스트인 프랭크가 둘 사이의 이야기에 끼어들어 우리 둘을 둘러싸고 그런 소문이 돌고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런 소문에 서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고, 우리를 대신해 글을 쓴다는 “대필자(ghost)”가 과연 누굴까 이런 저런 추측을 하며 파티를 끝냈다. 그 뒤에, 우리는 그 젊은이에 관해 더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더 나아가, 그는 해당 공연 시즌 이후에 무용계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알렌 휴즈는 음악을 전공했고, 합창단의 지휘자와 오르간 연주자로 공연도 하다가 비평으로 전향했다. 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저널리즘적 비평가가 됐는데, <뉴욕 타임즈>지에서 무용 비평가로서 짧지만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기간 전후에 걸쳐 음악에 대해 글을 썼다. 애초에 그는 <뮤지컬 아메리카(Musical America)>에서 일했지만, 파리로 이주해서는 독립적인 작가가 됐으며, 그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 헤럴드 트리뷴(the New York Herald-Tribune)>지의 음악 담당 부서에 합류했다. 1960년대에 <뉴욕 타임즈>지는 작곡가이자 비평가이기도 한 버질 톰슨(Virgil Thomson)의 추천을 받아들여 음악 부서에 그를 고용했는데, 당시 <뉴욕 헤럴드 헤럴드 트리뷴>지에는 마침 버질 톰슨의 동료가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1961년 여름, 그러니까 오랫동안 <타임즈>지에서 무용 비평가로 글을 써 왔던 존 마틴(John Martin)의 활약이 저물어 가고 있을 때, 휴즈도 <뉴욕 타임즈>지에 무용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1961년 6월 30일부터 1962년 11월까지 약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동 신문에서 무용 부문을 담당했던 것이다. 물론 <뉴욕 타임즈>지가 1962년 7월 4일, 해당 주에 마틴이 <뉴욕 타임즈>지의 공식 무용 담당 비평가에서 은퇴하고 이를 휴즈가 대신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1962년 가을에 뉴욕 시립 발레단(New York City Ballet)이 러시아를 방문한 소식을 <뉴욕 타임즈>지에 전했고, 휴즈도 1963년 초까지 계속해서 음악에 대해 글을 썼다. 그 후, 휴즈는 이번에는 그의 뒤를 이어 클라이브 바른스(Clive Barnes)가 무용 비평을 대신하게 되는 1965년 9월11일까지 거의 전적으로 혼자서 무용 관련 기사를 썼다.


줌아웃 무용비평가 조지 잭슨(George Jackson) 관련 사진

Left: Allen Hughes in the 1960s. Courtesy of the New York Times. Right: Judson Memorial Church, 1955. Courtesy of Judson Memorial Church.


<뉴욕 타임즈>지에서 무용 관련 비평 글을 집중적으로 쓰기에 앞서, 휴즈는-비록 절대 무용에 문외한은 아니었지만(3)-자기 자신을 업데이트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많이 무용 공연을 보러 다녔다. 그가 이런 식으로 무용 공연을 얼마나 오랫동안 보러 다녔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몇 달을 그랬다. 더 나아가, 그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기로 하고선, 가능한 한 다양한 무용들을 많이 샘플링하려 했다. 즉, 해당 공연의 평판이 좋든, 나쁘던, 프로들이 하는 것이든 아마추어가 하는 것이든 가리지 않은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휴즈가 우연히 저드슨 무용단과 조우하게 되었다. 휴즈는 예외적일 정도로 계속해서 모든 종류의 공연들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뉴욕 타임즈>지의 무용 비평가로 임명되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편집자들은 휴즈의 이런 방침을 지지했는데, 이는 전임 편집자들의 경우, 그들이 가진 시야가 너무 협소해서 그동안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존 마틴은 말년에 눈에 뜨이지 않는 공연 장소를 찾아가거나, 주류에 속하지 않는 무용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을 꺼려했는데, 바로 이런 그의 태도 때문에 <뉴욕 타임즈>지가 그를 은퇴시킨 것이었다.

우리는 휴즈가 초창기에 무용 공연을 두루 보러 다니던 시절에, 따로 공연을 관람하고 맨해튼으로 돌아가던 길에 만났다. 우리는 브루클린 대학에서 출발한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마침 그곳에서 자닌 샤라(Janine Charrat)가 이끄는 소규모 프랑스 발레단이 공연을 했었다. 여러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우리가 탄 지하철 칸에는 우리 둘 만이 유일한 승객이었고, 우리 둘 다 해당 공연 프로그램을 쥐고 있었던 지라, 서로 쉽게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가 탄 열차가 브루클린 지역을 떠났을 때쯤엔, 이후에도 만나서 서로 얘기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 알렌이 <뉴욕 타임즈>지의 무용 비평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댄스 매거진>지의 편집자인 리디아 조엘(Lydia Joel)이 자신을 무용계가 반기도록 만들어 준 바로 그 파티에 필자도 초대되도록 손을 써주었다. 그 파티에는 선배 비평가들 대다수가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들 가운데는 신망이 두터운 칼 반 벡텐(Carl Van Vechten)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연로했던 지라 그 때쯤엔 이미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필자는 그 파티에서 처음으로 에드윈 덴비(Edwin Denby)와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렸다. 반면에 마틴은 우리와 거리를 두었던 것 같다. 알렌은 나를 데리고 저드슨 무용단의 공연을 보러 다녔다. 당시에 필자는 마침 저드슨 교회 인근에 살고 있었던 관계로, 계속해서 혼자 저드슨 무용단의 공연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공개 리허설이나 관련된 이벤트들도 보러갔다. 그 때는 1962년/1963년 시즌이었는데, <뉴욕 타임즈>지가 자신에게 맡긴 일들과 진지하게 씨름하면서, 휴즈는 미국에서 무용과 관련해 글을 쓰는 사람들 가운데 제일 잘 나가는 개인에게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어 하기도 했다. 그는 <뉴욕 타임즈>지가 어떤 공연이 좋고 나쁜지에 대해 신문의 비평가들이 공표하는 설교 연단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기보다는, 꽤 전통적인 취향을 가진 미국의 무용 공연 관람객들 사이에서 주류를 이루는 공연들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관점을 제공하고, 새롭지만 그동안 도외시 되어 온 공연들에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고자 했다. 무용 공연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설명(“직선과 직각을 이루는 경향이 있는 안무”)을 하고 나서(4),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자신이 최종 판단에 도달하는 대신, 해당 공연의 장단점을 효과적으로 양립시키는 편을 선호했다. 따라서 모리스 베자르(Maurice Bjart)가 만든 한 발레 작품(5)에 대해 그가 했던 언급(“이 어떤 것들에도 성기거나(wispy) 아름다거나 섬세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여백이 있었으며, 단순했고, 복잡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리 흥미롭지 않았을 때도 말이다”)은 별난 것이 아니었으며, 그는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과 폴 테일러(Paul Taylor)가 만든 일부 현대 무용 작품들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하게 애매한 태도를 보인 바 있다.


줌아웃 무용비평가 조지 잭슨(George Jackson) 관련 사진

Yvonne Rainer and Steve Paxton, Word Words, Judson Memorial Church, January 29, 1963. Photo: Henry Genn.


하지만 전통적인 무용 비평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그의 방식은 지나치게 불확실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표면상 건조하게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익살맞은 유머들은 종종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휴즈는 때때로 (예컨대, 키로프(Kirov)의 <백조의 호수>와 볼쇼이의 <백조의 호수>를 비교하면서) 공연을 “어떻게” 할 것인지, 다시 말해, 무용의 질적 수준 등등에 대해서 논하기도 했다.(6) 드물지만, 그가 그것이 진심으로 좋은 공연이라고 보장했던 유일한 경우는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이 <아폴로(Apollo)>를 공연했을 때였는데, 당시에 그는 그 공연에 대해 비평하면서 이전과 같이 장단점으로 나누지 않은 채 열정을 다해 설득력 있게 자신의 호감을 드러내는 태도를 보였다.(7) 그 발레곡을 만든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가 80세 생일을 맞게 되었을 때, 휴즈는 미묘하게 두운(alliterative)을 맞춘 스타일로 글을 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시(poem)”나 “침착함(poise)”, “칭찬(praise)”, “연기(play)”같은 용어나 기타 자극적인(pungent) 어휘들을 사용했다. 그는 이 발레가 보여준 덜한 것이 더 좋다(less-is-more)는 식의 접근법과 이 공연에 사용된 음악 구조, 평범한 동작들이 어떻게 클래식한 것과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미국 무용수들의 질적인 수준에 대해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아폴로>와 <아곤(Agon)>이 미국만의 발레 스타일로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예측(그것은 “예상치 못한 빙식으로 시작됐다가 멈췄다”)하기도 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일은 아직 충분히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테일러가 만든 <오레올(Aureole)>의 초연을 본 휴즈는 그 공연을 “맨발의 천사들(barefoot angels)”이 춤추는 “하얀 발레(white ballet)”라고 불렀다(8). 그는 비엔나의 스페인 승마 학교(Vienna's Spanish Riding School)에 내재해있는 고전주의와 기수와 리피자너 종마(Lipizzaner stallions) 사이에 존재하는 감지하기 힘든 파트너링(partnering)을 포착하기도 했다.(9) 그리고 그가 내린 평가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볼 때에, 독자들은 내면적 갈등을 겪는 환자가 정신과 의사를 앞에 두고 하는 자유 연상(free-associating)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음악 비평가가 무용을 다루는 것과 함께 그러한 비평이 다루고 있는 작품들의 광범위한 범위, 그리고 휴즈의 비평 가운데 많은 것들이 보여준 보고(reportorial) 스타일에 대해 처음부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독자들은 이에 대해 불평을 제기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공개해야 한다는 그의 방침에 의거해서, 휴즈는 자신이 쓴 무용 비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 편지들은 모두 다 그대로 <뉴욕 타임즈>지에 게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이런 불평들 가운데 일부를 놀리는 차원에서 필자가 현대 무용은 미국이 발명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대해 과장이 섞인 반박 글을 써서 그의 자택 주소로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내 편지를 <뉴욕 타임즈>지 사무실로 들고 가서는 해당 신문에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게재해버렸다. 비록 이로 인해 그는 또다시 칭찬을 받긴 했지만, 자신의 비평에 대해 독자들이 쓴 위와 같은 감사 편지들을 다시는 받지는 못했다.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은 소위 “생각(think)”이라는 기사들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선데이(the Sunday)>라는 신문(10)에 게재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무용의 사회학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무용을 보는 청중들과 미디어, 그리고 관련 인프라(그에 관해 쓰는 글까지 포함) 같은 주제들을 탐구했다.


줌아웃 무용비평가 조지 잭슨(George Jackson) 관련 사진

Trisha Brown, Homemade, Judson Memorial Church March 29, 1966. Photo: Peter Moore. ⓒ2012 Tang Teaching Museum.


하지만 휴즈가 사용한 사실 중심의 보고 스타일 기사는 저드슨 무용단을 비평하는데 있어서는 잘 어울렸다. 주디스 던(Judith Dunn)의 <아카풀코(Acapulco)>는 15분짜리 공연으로, “한 여성이 의자에 앉아있는 한 소녀의 머리를 빗어주려 그 곳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가능한 가장 느린 슬로우 모션으로 이뤄진다”라거나, “프레드 헤코(Fred Herko)가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휙 하고 나타났다. 그는 검은 색 타이츠(tights)와 정면에 저드슨(Judson)이라는 문구가 박힌 노랑과 파랑 무늬 저지(jersey)를 입었고, 한쪽 발엔 그의 이동 수단인 롤러스케이트를 달고 있는 검은 색 신발을 신었다. 다른 쪽 발은 맨발이었다.”고 썼다. 더 나아가, 휴즈는 그런 장면들이 만약 “분석되기 보다는 운동 중인 그림으로 그려졌다면, 팝 아트로서의 자격이 있었을 것”이며, 그런 장면들이 최고의 경지에 이를 경우, “일상생활에서는 관찰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을 그런 움직임의 세부적인 것까지 사람들은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저드슨 무용단의 공연에서 나타나는 편안하고 태평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다양한 무용 콘텐츠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란히 선보이는 연출, 그리고 일상적인 논리를 피하려는 그들의 무용이 얼마나 신선한지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그들의 무용에는 “진지함과 인접하고 있는 난센스, 발레처럼 우아한 동작과 뒤섞인 저속한 익살(buffoonery), 고도의 공연 기교(virtuosity)와 대비되는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서투름, 진부하고 평범한 것(banality)과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는 미적인 마름다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저드슨 무용단에 대해 지나치게 과한 칭찬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공연 무용의 폭과 가능성을 확대시켰으며”, “화려한 혼란(splendid chaos)을 창조”함으로써, “그것을 우리 시대의 지적인 추세와 결부시켰다”고 끝맺었다. 저드슨 무용단이 휴즈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당시에 그가 쓴 글들(11)을 읽다보면,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가 언급한 이들의 무용 공연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휴즈가 쓴 비평에 대한 불만들은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그러한 불만들 가운데 일부는 무용계의 유명 인사들이 제기한 것도 있는데, 캐서린 던햄(Katherine Dunham)과 링컨 커스틴(Lincoln Kirstein)이 대표적이었다. 1960년대에 휴즈의 비평을 읽었던 독자들은 발란신(Balanchine)이 스트라빈스키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악장들(Movements for Piano and Orchestra)에 맞춰 원래대로 하얀 색 의상을 입고 펼친 공연에 대해서는 휴즈가 호평을 한 반면, 검은색 의상으로 갈아입었을 때는 회의적이었던 것을 두고 특히 격분했다.(12) 그럼에도 그가 이들 두 가지 버전을 비교한 것은 그럴듯하지 않은가? 휴즈는 첫 번째 버전은 하얀색 타지 마할(Taj Mahal), 두 번째 버전은, 제안은 이루어졌지만 무대에는 결코 올리지 못한 검은 것에 비유했던 것이다. 또, 커스틴은 포드 재단(Ford Foundation)이 최초로 무용 부문에 지급한 막대한 지원금에 대해 휴즈가 상반된 입장을 보인 것에 대해서도 격분했다. 당시 이 지원금은 죄다 커스틴이나 발란신이 이끌던 뉴욕 시립 발레단 및 그로부터 파생된 단체들로 돌아갔는데, 이 때 휴즈는 발란신이 재단 측의 자금 지원을 받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그들로부터 파생된 단체들에게는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자칫 자신이 보기에 더 가치 있다고 여긴 무용들, 예컨대 아메리칸발레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re)나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등등이 외면 받을 수 있다고 있다고 생각해서인 것이다. 그러자 새로 등장한 비평가인 알린 크로체(Arlene Croce)는 그녀의 잡지 <발레 리뷰(Ballet Review)>지 첫 번째 호에서 그녀가 휴즈의 나쁜 사고방식과 글 버릇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다.(13) 하지만 저드슨 무용단의 무용수인 제임스 워링(James Waring)은 휴즈를 방어했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뉴욕 타임즈>지 같이 유명한 매체들의 지면은 아니었지만, 어딘가에서 그를 성자라고까지 부르기도 했다.(14) 결국 <뉴욕 타임즈>지는 휴즈를 교체하기로 했으나 이 결정사항을 그에게 먼저 알리지 않고 발표해 버렸다. 당시 그는 유럽에 있었는데 (1965년 늦여름), 이런 전후 사정 때문에 <댄스 뉴스(Dance News)>지의 편집장인 아나톨 츄조이(Anatole Chujoy)가 그에게 따로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그는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귀국한 휴즈는 1965년 9월 11일까지 계속해서 <뉴욕 타임즈>지에 무용 관련 글을 썼다. 그러다 런던에 거주하고 있던 그의 후임자인 클라이브 반스(Clive Barnes)가 다음 날에 자신이 쓴 <Critic's Credo>라는 글을 발표했고, 이윽고 그가 뉴욕의 무용계에 대해 정기적으로 비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휴즈는 다시 음악으로 복귀했고, <뉴욕 타임즈>지의 예술 담당 편집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아이러니한 사실은, <뉴욕 타임즈>지에 반스를 최초로 불러들인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휴즈 자신이었다는 점이다(1964년 11월에 영국의 무용 통신원으로 시작). 휴즈는 저드슨 무용단의 가치를 자신이 알아 본 점에 대해 훗날 인생의 말년까지 두고두고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질 존스톤과 알렌 휴즈가 저드슨 무용단에 대해 썼던 초기 비평들은 단지 무용 공연을 감상하는 관객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저드슨 무용단 출신의 무용수들에게도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공연 활동을 한 층 더 발전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는 피드백도 제공했다. 덕분에 이들 무용수들은 수없이 많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저드슨 무용단에서 실험해 볼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러한 공연 내용 가운데 일부를 여전히 발전시키고 있다. 이런 점을 보면, 1960년대에 부토(Butoh)와 탄츠테아터(Tanztheater), 그리고 저드슨 무용단이 탄생한 이후 무용에서 정말 혁명적인 무언가가 존재해왔는지는 의문스럽다.




각주(Footnotes):

(1) 질 스톤이 1960~1970년 사이에 쓴 칼럼들을 모아 선집으로 엮은 <Marmalade Me> (E.P. Dutton; New York; 1971)의 서문과 실제 그녀가 쓴 칼럼들을 참조할 것.
존스톤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룬 범위를 알아보고자 한다면 다음 링크를 참조. http://jilljohnston.comhttp://deeplistening.org/site/content/jilljohnstonliterary-archive-appeal
(2) 심지어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에 대해 언급한 것도 있다. 그는 저드슨 무용단을 중유럽의 탄츠테아터(Tanztheater)와 연결 지었다. 언뜻 보기에 저드슨 무용단 소속 무용수들 가운데 존스톤이 언급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모리스 블랑(Maurice Blanc)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필자가 그녀가 쓴 모든 칼럼들을 전부 들여다 본 것은 아니다.
(3) 레슬리 새틴(Leslie Satin)은 자신이 집필에 참여한 책(<Reinventing Dance in the 1960s>,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03)의 3장에서 휴즈는 무용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조언을 구할 일이 생기면 그의 친구인 프레드 헤코(Fred Herko)와 헤코의 멘토인 제임스 워링(James Waring)에게 달려갔다는 주장을 언급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던 시기에 휴즈는 그들이 자신의 입장이었다면 무엇을 보러 갈 것인지 묻곤 했다. 그럼에도 헤코와 워링 혹은 다른 어떤 사람도 휴즈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지는 않았다. 저드슨 무용단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한 것은 온전히 존스톤 자신이 결정한 것이다.
(4) The New York Times; August 19, 1961: Connecticut College.
(5) The New York Times; December 16, 1961: Bejart's Ballet of the 20th Century.
(6) The New York Times; October 4, 1961: Kirov's Swan Lake. The New York Times; September 7, 1962: Bolshoi's Swan Lake.
(7) The New York Times; June 17, 1962: Apollo.
(8) The New York Times; August 6, 1962: Aureole.
(9) The New York Times; May 17, 1964: Lipizzaners.
(10) The New York Times; May 31, June 17, June 24, 1962; August 22, 1965: Think pieces.
(11) The New York Times; May 31, June 10, June 17, and June 24, July 17, 1962; Feb. 9, June 26, Fall 2010/Spring 2011
(12) The New York Times; April 10 and April 21, 1963: Movements. 여성 무용수용 검은색 레오타드(leotards)는 4월 10일에 열린 이 발레의 두 번째 공연에서 사용되었다. 휴즈는 이 사실을 독자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출연자들 가운데 여주인공을 맡은 수잰 패럴(Suzanne Farrell)이 레오타드 색 교체를 요구했었던 것이다(15). 그런데 그녀는 생각을 바꿨고, 그 뒤로 쭉 공연에 하얀색 레오타드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짐작컨대 휴즈는 실제로는 “검은색” 레오타드를 입고하는 공연은 결코 본적이 없었을 것이다. <뉴 요커(The New Yorker)> 지의 클레어 맥켈웨이(St. Clair McKelway)는 휴즈가 의상 색깔에 초점을 두는 걸 가지고 놀렸지만, 알린 크로체(Arlene Croce)가 요약한 것처럼(13), 클레어 맥켈웨이는 실수로 검은색과 하얀색을 바꿔서 얘기한 것이었다. 그런데 휴즈가 첫 번째 “하얀색” 공연에 대해 쓴 비평에 딸린 마사 스워프(Martha Swope)의 사진은 검은색 레오타드를 입고 리허설을 했던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13) "Hughesiana," Ballet Review 1, #1; 1965
(14) 필자의 기억에 따르면, 알린 크로체가 알렌 휴즈를 칭찬하는 제임스 워링(James Waring)의 편지를 <Ballet Review> 지에 실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저드슨 무용단을 이슈로 다뤘던 <Ballet Review> 1, #6나 그 즈음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15) Holding On to the Air by Suzanne Farrell with Toni Bentley (Simon & Schuster, 1990; University Press of Florida, 2002).



권말 주(End Notes):

위의 텍스트는 미국무용평론가협회(Dance Critics Association)에 내는 뉴스레터인 <DCA News>의 2010년 가을 호와 2011년 봄 호에 처음으로 게재되었다. 저드슨 무용단에 대해 잭슨이 쓴 글을 루이스 호스트는 게재하길 거절했는데, 이 글은 <댄스 매거진(Dance Magazine)> 지의 1964년 4월 호에 "Naked in Its Native Beauty"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최근에 그가 저드슨 무용단에 대해 쓴 글은 미국무용유산엽합(Dance Heritage Coalition)의 웹 사이트에 “American Dance Treasures-the First 100”라는 항목에서 볼 수 있다.




조지 잭슨(George Jackson)_무용비평가 조지 잭슨(George Jackson)이 무용에 대해 비평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50년대에 시카고 대학 재학 중에 대학 신문에 글을 썼을 때였고, 그 이후로는 워싱턴 스타((Washington Star)나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런던 타임즈(Times of London), PBS, 그리고 NPR 같은 일반 매체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전 세계 4개 대륙에 걸쳐 각종 무용 잡지들-최근에는 <Ballet Review>와 <Dance Chronicle>, <Dance Magazine>, 그리고 <danceviewtimes.com>)-을 통해서도 비평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는 비엔나와 런던, 쿡노에(Cogenhoe), 시카고, 뉴욕, 그리고 워싱턴 DC에서 거주했다. 어렸을 때는 피겨 스케이트를 탔다가 나중에는 발레 수업을 들었으며, 대학에서는 미생물학(microbiology)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엔 과학 연구원과 강사, 그리고 편집자로 일한 바 있다. 현재는 소설을 집필 중이다.


원문은 DCA News (the Newsletter of the Dance Critics Association) 2010년 가을호/2011년 봄호에 발행되었으며 2012년 9월 12일 Movement Research's online publication,
Critical Correspondence (https://movementresearch.org/publications/critical-correspondence)에 재발행 되었다.


조지 잭슨(George Jackson)_무용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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