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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국내외 무용 현장에 관한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관점을 소개합니다.

2022.12.16 조회 3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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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을 바라보는 어떤 오해들

신비로운 몸을 쓰레기통에



신비로운 몸을 쓰레기통에
무용을 바라보는 어떤 오해들



조형빈_춤in 편집위원



Photo by Steve Barker on Unsplash


몸의 아름다움

춤에 있어 몸은 가장 중요한 매체적 근본이다. 춤이 하나의 예술로서 발화하기 이전,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몸으로 추어지는 것을 ‘춤’이라고 불러왔다. 전근대의 시기에 우리는 몸으로 추지 않는 것을 춤이라고 간주하지 않았고, 몸이 아닌 것 위에서 움직이는 운동성을 춤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몸이 아닌 것을 춤으로 부르는 것이 허용될 때는, 오로지 그것이 은유로서, 하나의 표현의 방식으로서 어떤 아름다움을 지칭하기 위한 문학의 영역에서만 가능했다). 인간의 몸, 사지로부터 발생되는 운동성은 춤을 구성하는 핵심이었다.


이는 근대의 시기를 훌쩍 뛰어넘은 지금에서도 마찬가지다. 춤의 역사 안에서 몸은 그 자체로 숱하게 춤의 주제가 되어왔고, 몸을 이야기하기 위해 추어진 춤들도 무수히 많다. 심지어 몸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춤은 그것을 매개하는 통로로써 몸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춤의 개념을 해체하고 몸을 떠난 운동성을 드러내는 작품에서도 우리는 몸을 본다. 몸은 춤에 있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참조점이자 우리의 상상을 피워내는 불쏘시개다. 우리는 저것을 춤으로 인지하기 위해 항상 몸을 필요로 해왔다. 안무가 쓰기의 방식을 정의하는 방법론으로 자리잡기 이전의 시대에서부터 몸뚱아리에 붙어있는 사지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정지하는 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동시대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마찬가지다. 몸은 여전히 무용의 안에 자리한다.


그렇다면 춤 안에서 몸은 얼마나 중요할까? 움직임을 구성하는 것으로써의 안무, 혹은 완성된 퍼포먼스로서의 춤의 무대 안에서 우리가 몸을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어떤 미학들을 감지하는 방식은 우리의 춤 감상에서 얼마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 이 질문은 다시 말해, 우리가 몸의 어떤 것을 경유해 춤을 평가하는지 질문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어떤 무용 작품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무용에게 바라는 미학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는가? 혹은 장소에 따라 달라져 왔는가? 불변하는 ‘몸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기실 이 질문들은 벌써 한 세기도 더 전에 모던댄스가 출현하면서부터 숱하게 던져져 왔던 질문이다. 춤은 하나의 예술 장르가 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것 - 운동성 - 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 ‘아름다움’을 붙잡고 반복적으로 전시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안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이 전략적인 강박, 까딱해서 놓쳐버리면 춤도 예술도 무엇도 아니게 되어버릴 것이라는 위태로운 생존의 문턱에 놓여져있던 ‘운동성’이라는 쪽지는, 결국 어느새 춤이 가슴팍에 당당하게 빛내어 붙이고 다니는 명찰이 되었다. 이제 춤은 ‘아름답기 때문에’ 예술의 멤버십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여기, 춤이 당당한 예술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명찰을 빛나게 닦고 있던 시기, 예술에는 뭔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회화가 지켜왔던 관습들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에서 무참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고, 그전까지 노력하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아름다움’은 파편화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춤 역시도 그 흐름 안에서 어떤 궁극의 표현(그리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육체)을 찾아 나서거나, 일상의 동작들을 무대 위에 올리거나, 무용수의 육체가 아닌 곳에서 춤을 찾아내는 분주한 시간들을 보냈다.


한편으로 무용의 영역이 아니었던 곳에서 몸을 들여다보는 일들도 발생했다. 완성된 무대, 빈틈없이 짜여진 환영의 세계로서 무용이 세계를 품으려는 욕심을 드러내고 있었다면, 퍼포먼스 아트(performance arts)라고 불리는 일련의 장르 안에서는 예술가들이 몸 안에 세계를 담기 시작했다. 여기서 몸은 세계를 구성하는 일원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를 은유하는 상징이었다. 퍼포먼스 아트에서 몸은 무대에서 발굴된 것이 아니었기에 지켜야 할 미학적 관습이 존재하지 않았다. 문을 닫고 방(무대) 안에서 세계를 건설하는 대신 세계를 향해 몸을 열어젖혔기에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름다울 수’ 없었다.


관습의 측면에서, 또 역사적 맥락의 측면에서 공연(performing arts)으로서의 무용은 퍼포먼스 아트와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일을 걸어온 이 두 가지의 예술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몸을 재료로 삼는다는 것이었다(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어떤 방식의, 다양한 교류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누군가가 몸은 추방되는 대신 소환되어야 하는 것이며,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온 권력이 바로 몸 안에 담겨있다고 이야기했다. 춤은 그렇게, 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무용이 추구하는 것들

무용이 만들고자 했던 세계 안에 담긴 무용-몸이 추구하던 아름다움은, 몸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예술가들이 만들기 시작한 세계-몸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고도로 훈련된 정제된 몸, 세계 너머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완벽히 자유로워야(가벼워야) 하는 몸,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상상하기 힘든 유연성과 비일상을 구현하는 몸은 세계와 잘 맞지 않았다. 그것은 계속해서 ‘아름답고자’ 했으나 자꾸만 어긋났다. 그렇다면 무용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나는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세상 밖의 몸을 가지고 상상하지 못한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는 관습으로서의 미학을 버리고 세계를 몸에 넣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후자를 농당스(non-danse)라 불렀다.


무용이 예술로서 어떤 미학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상기의 질문을 던졌을 때, 거기에는 시대와 장소에 대한 물음도 섞여있었다. 그것이 언제 어디서 작동하는지에 따라 무용은 다른 것들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2022년의 한국이라는 지형 안에서 무용이 무엇을 바라보는지 들여다보려면, 이 지형이 빚어내고 있는(그리고 추구하고 있는) 아름다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모던댄스의 황금기를 1990년대로 정의한다면,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유산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정한 무용-몸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훈련을 거쳐야 하는지, 특정한 세계-무대를 건설하기 위해 어떤 소양들이 필요한지, 한국의 춤이 지켜나가고 있는 미학적 관습은 확고하다. 그것은 시대의 그림자이지만 오히려 세대를 뛰어넘어 활약한다. ‘아름다움’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그것을 지켜나가는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무용은 특정한 미학적 관습을 다양한 방식과 끊임없는 작품 생산을 통해 지켜나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미학적 관습’을 세계-몸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일어난다. 현대무용이 만들어내고 있는 몸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쉼 없이 달리는 운동성이 구현해내고 있는 스펙터클은 그 자체로 몸을 가속화시킨다. 무대(세계) 밖에서는 그저 탄탄하고 조용할 뿐이었던 몸이, 무대 안에 들어가면서 풍부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이 땅에서 세계 너머로 가속한다. 그리고 이 미학적 ‘추동’의 과정을 무용이 아닌 바깥의 시선으로 읽어낼 때 이야기가 발생한다.


좁게는 퍼포먼스 아트, 넓게는 시각예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몸은 그것이 세계를 품고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전시장 안에 전시될 때 사건을 발생시킨다. 몸은 전시장(무대)이 아닌 곳에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몸은 기본적으로 세계의 구성원이며, 그 안에 들어있을 때에는 세계를 어긋나거나 찢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부분적으로 떼어져 전시장에 솟아났을 때, 다시 말해 화이트큐브라는 맥락(context)에 들어왔을 때 비로소 몸은 세계를 휘두른다. 아주 작은 세계의 일부였던 몸이 세계 전체를 끌고 거기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대(stage)의 경우는 어떨까?


무용이 줄곧 건설하는 세계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어떤 것이라고 할 때, 비무용-예술의 관점에서 무대 위에 올라오는 몸들은 그것 자체로 위력적이다. 현실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대 위의 몸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우리가 가늠하기 어려운 영역을 뛰고, 돌고, 날아오르는 이 비현실적인 몸들은 들판을 수놓은 화려한 꽃들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 꽃들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왔기에 위력적인, 하나하나가 강력한 미학적 무기로 보인다. 여기엔 세상을 뚫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세계를 아름다움으로 상찬하고자 하는 무용의 분위기를 어떤 공연들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 지난 여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 올려졌던 국립현대무용단의 <HIP合>과 같은 공연들도 그러하다. <HIP合>은 기획공연으로 세 작품이 묶여서 트리플빌로 하루에 공연되었는데, 각기 다른 세 명의 남성 안무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주제의 이 작품들을 함께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어떤 분위기들을 읽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이재영의 <메커니즘>은 안무가에 의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움직임의 동세적 탐구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이재영의 작업들은 점점 미니멀해지는 흐름을 가지고 있는데, 올해의 작업에서는 오직 움직임과 운동성을 통해 몸으로 구조를 짓고, 그것이 물리적으로 어떤 탄력성을 지니는지 실험한다. 몸을 통해서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가 ‘메커니즘’ 자체가 되면서 뼈와 근육, 몸의 물성이 구현하는 운동성의 스펙터클만이 남는 것이다. 이어지는 지경민의 <파도>는 다양한 매체적 실험을 작품 안에 도입하면서, 제법 많은 무용수들로 운동성의 흐름을 구축한다. 거기에는 분명 위트와 이야기로 간주될 수 있는 모종의 내러티브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파도’라는 거대한 운동성의 은유가 작품의 빠르기, 구성, 몸의 조합들을 만들어낸다. 정철인의 <비보호>는 굉장히 강한 주제적 흐름 안에서 운동성을 밀어붙이는데, 관객이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 힘의 충돌과 방향, 무수히 많은 벡터적 구성이 작품의 미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세 작업이 추구하는 바는 제법 명백하다. 그것은 이 시대의 커다란 ‘미학적’ 흐름 안에 들어와있으며, 각각의 안무가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사한 방향을 바라본다. 거기에서 우리는 몸의 쉼 없는 헐떡임, 달리고자 하는 욕망, 무대를 통해 관객을 압도하고자 하는 스펙터클과 같은 것들을 발견한다. 이것이 우리가 목도하는 시대적 ‘미학’이다.


그런데 이것을 만약 비무용-예술의 관점에서, 그리고 무용-예술의 관점에서 각각 해석해본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뛰어다니는 몸들은 이미 무대 위에 정제되어 올라왔으므로, 만약 그것들이 세계를 품고 있는 몸이라고 간주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세계가 처한 위기나 스트레스, 당면한 과제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그것이 심지어 몸과 관련된 것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또한 강박적인 운동성, 가속화되는 몸은 어떤 사회적인 시스템에 대한 은유일 수 있고, 그것을 구현해내는 방식 - 물리적인 펄쩍임과 날아오름 - 이 우리에게 주는 ‘아름다움’을 통해 몸을 상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은 아름답다. 이것이 비무용-예술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HIP合>이다.


몸이 지닌 아름다움, 위에서 두 가지 차원으로 정의한 이 ‘아름다움’의 문제는 ‘무대 위의 몸’을 맞닥뜨렸을 때 난망해진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이 ‘시대적 미학’을 따라가는 길인지, 혹은 몸을 무대에서 파낸 다음 그것의 민낯을 보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여기서 몸은 세계-무대-다시 세계로 파내지는 삼중의 영역을 넘나든다. 앞 선 단계에서 아름다움이었던 개념이 이내 내팽개쳐졌다가, 다시 복귀한다. 우리가 여기서 오로지 쉽게 감각할 수 있는 것은 몸, 일상이 아닌 몸, 세계의 일원이 아닌 몸이 가진 신비로움뿐이다.


바깥의 눈으로 무용-몸을 바라보면 몸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것이 된다. 꺼내진 적 없는, 그러나 항상 우리 곁에 있었던,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우리의 무지로 인해,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차마 올려다볼 수 없었던 그것의 현현(顯現), 몸은 거기에 놓임으로써 신성(神聖)을 획득한다. 우리가 근대를 통해 끊임없이 외면하고 제거하고자 했던,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의 개별성을 온전히 담고 있었던 몸들, 그것을 이제 제단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는 행위가 어찌 환희에 차 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성상을 파괴하라

우리는 오랫동안 춤이 추구해왔던 몸의 조형적 미학에 익숙해져 있었다. 운동성이 촉발시킨 춤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춤일 수 있게’ 만들었고, 그 ‘아름다움’ 속에서 몸은 가속화의 욕망을 탑재하고 빛의 속도로 날뛰었다.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강하게. 이것은 무용의 미학을 완성하기 위한 정언명령이었다.


그리고 이 조형적 미학에 신비로움이 덧씌워진다. 여기서 무대 위의 몸이 지니는 신비로움은 이중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무용-몸이 구현해내는 현실 너머의 ‘아름다움’(‘어떻게 저렇게 높이까지!’)이 불러일으키는 숭고함(그것은 나의 몸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로부터 떼어낸 몸이 가진 위력, 그 힘에서 나오는 신비로움이다. 무용-몸은 잘 정제되어 무대 위에 세워졌기에 신비하며, 동시에 세계가 아닌 곳에 들어와 있기에 신비하다. 그것은 성스럽다. 내가 객석을 박차고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지 않는 한, 이 약속을 마음에 담고 그것을 깨지 않기로 선언하는 한, 나는 이 신비로움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몸이 아니지만 그래서 신비로운, 무대 위의 몸은 내 몸과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용-미학적 관점에서, 과연 그러한가? 무용-예술이 바라보는 관점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다면, 그리고 그것을 보는 눈이 담겨있는 사회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면, 우리는 미학 그 자체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정불변의 단단한 몸을 지켜내고 그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구축하려는 무용의 에토스는 어디까지 작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신비로움에 대한 적극적 의심을 밀어붙이기 위해, 또 하나의 공연을 들여다보자. 동일하게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올해 4월에 올렸던 <2022 안무랩> 역시, 지금의 미학적 흐름 안에 들어와 있는 공연들이었다. ‘안무랩’이라는 컨셉 때문에 이것을 완성형의 공연으로 보기보다 일종의 과정 공유로 보아야 한다는 특이점이 있지만, 4인의 안무가가 저마다 선보인 작업들은 각각이 지닌 힘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장수미가 선보인 <꿀렁꿀렁 감각 에이징>은, 미학적으로 보기에 어쩐지 석연치 않은, 이상한 기류를 만들어내는 공연이었다.


〈꿀렁꿀렁 감각 에이징〉에서 무용수들은 초반부의 속도감 있는 씬이 지나가고 나서는 대체로 느리게 움직이는데, 첫 씬을 포함해서 이 공연이 만들어내고 있는 장면들은 ‘미학적’으로 아름답기 어려운 것들이다. 뛰어오르기보다 구르고, 달리기보다 걷고, 들어서 던지기보다 몸을 포개는, 자꾸만 덜컥 걸려 넘어지는 느린 속도의 감각이 공연 전반을 주무른다. 그리고 포개진 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운동성의 스펙터클 대신, 무게와 기울임을 통해 천천히 흘러내리는, 마치 퍼포머의 몸 위에 흘러간 수십 년의 시간처럼 미끄러져 내리는 슬라임들이다. 이것은 신비롭지 않다. 거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물리적 세계를 넘어선 가공할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나조차도 가지고 있는 끈적끈적한 몸뚱아리의 흔적과 증거들이기 때문이다.


이 공연을 비무용-예술적 관점과 무용-예술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또 어떤 이야기들이 가능할까? 여기서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의 다른 관점이 작품으로부터 무엇을 읽어내느냐보다, 그 둘의 차이가 지금의 무용에 무슨 질문을 던지는지이다. 몸이기 때문에 덧씌워지는 신비성과 무용 안에서 몸이 추구하는 조형적 아름다움은 서로 엉켜, 무용 안에서 몸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 몸으로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다. 특히나 이 두 가지가 겹쳐지면서, 다시 말해 몸에 덧씌우는 신비성이 무용이 구현하고 있는 조형적 아름다움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될 때, 우리는 몸에 대해서도, 또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서 부여되는 조형적 신성의 대상은 오로지 ‘신성’일 뿐, 절대로 몸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숭상하기 위해 신비로워했고,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그것을 신비롭게 만들었다. 우리는 달 대신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에 몸은 복잡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세계를 열거나 세계로부터 빠져나가거나 혹은 세계를 끌고 들어온다. 그리고 이 들락날락의 과정에서 신비로움이 씌워졌다가, 벗겨졌다가, 곱게 포장된다. 우리는 몸을 몸으로서 보기 위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떠받들기 위해 본다. 신비로움은 거대하고 품격 있는, 비루한 핑계가 되었다.


말로써 이루어진 온갖 상찬이 몸을 뒤덮어버리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제 그만 몸을 신비로움으로부터 꺼내야 한다. 몸을 그것으로부터 해방시켜서 무대 아래로 집어던져야 한다. 빠르고 번쩍번쩍한 가속의 시대는 더 이상 세계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미학을 빙자한 어떤 침묵의 경향들, 이 무거운 조용함이 무용을 휘어잡고 있다. 우리는 연단 위에서 몸을 끄집어 내어 시궁창에 던져야 한다. 바닥에 내던져 짓밟고 질질 끌고 다녀야 한다. 그것이 살찌고 늙어가고 찢어지는 몸이어야만,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것은 무용이 작품을 만들어가는 아주 유용한 전략이기도 하다. 작품이 세계에 대해,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전략을 택해야만 작품의 이야기가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사가 천사의 언어로 아무리 세심하게 이야기한들, 그것은 인간에게 가닿지 않는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몸은 침묵할 뿐이다. 무용이 몸을 떠나서 존재하거나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예술이라면, 그것을 더 잘 다듬고 그것으로 말하기 위한 전략을 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성상을 파괴하자. 몸이 부러지고 찢어져 뼈와 살을 드러냈을 때여야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몸임을 안다. 단단한 대리석 안에 갇혀 숭상받는 존재는 숭상받는 것 이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만약 아름다움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우리는 몸을 폐기해야 한다. 더러운 오물에 날것으로 던져져 피와 땀에 절은 하찮은 것이 되어야 한다. 몸이 내 눈앞에 굴러다닐 수 있어야 그것은 예술로서 살아날 수 있다. 몸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져 하잘것없는 것으로 만들자. 그것이 우리가 무용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조형빈_춤in 편집위원 공연을 보고 글을 쓴다. 몸과 움직임이 무대 위에서 발생시키는 맥락들에 관심이 있으며, 몸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을 주로 해왔다. ‘노동하는 (예술가의) 몸’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고, 최근에는 근대성을 뛰어넘는 수단으로서 몸의 정동을 다시 들여다보는 중이다. 몇 번의 무용 작업에 드라마터그로 참여했다.
rdculousdance@gmail.com
조형빈_춤in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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