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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국내외 무용 현장에 관한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관점을 소개합니다.

2022.12.15 조회 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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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현_작가

마리아 하사비의 작업에서 정지(Stillness), 그리고 〈Together〉



마리아 하사비의 작업에서 정지(Stillness), 그리고 <Together>



하상현_작가



마리아 하사비, <Together> ⓒThomas Poravas

1. 마리아 하사비의 작업에서 정지(Stillness): 프레임화된 정지 이미지와 몸의 조각적 이미지

지난 11월 5일과 6일 양일간 걸쳐 안무가 마리아 하사비는 〈투게더(Together)〉를 선보였다. 관객은 신중하게 결정되고 긴 시간을 들여 행해지는 두 몸의 움직임을 보았다. 하사비는 자신의 안무 방법을 설명할 때 종종 ‘악센트를 만들지 않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의 작업은 하나의 이미지를 전달하기보단, 움직임이 이미지를 만드는 매 순간의 과정을 중요하게 다룬다. 이는 우선적으로 하나의 움직임과 다른 움직임 사이에 위계를 만들지 않기 위함이다. 움직임 사이의 위계는 내러티브와 드라마를 만들고, 이것은 관객들이 일반적인 닫힌 의미로서의 ‘의미’를 찾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사비는 그보단 퍼포머가 노동을 수행하고 체력을 소모하면서 이미지 자체를 만들기를, 그러한 몸의 이미지가 관객과 만나 다른 차원의 의미를 발생시키기를 기대한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서 느림은 (종종 오해되듯) 내면 수행의 결과로 드러나는 선(Zen)적인 무엇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지 이미지와 또 다른 정지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경유하는 테크닉에 가깝다. 이는 내면에서 출발한 의미를 표면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보단, 표면적인 이미지 자체를 다루는 일이다.


“내 관심은 하나의 장면, 어떤 정지 상태(Stillness)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들에 있다.
한 이미지와 다음 이미지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어떤 간극이 생기거나, 아니면 추가적인
의미가 발생한다.”1


여기서 흥미롭고 동시에 혼란스러운 지점은 그의 관심이 ‘지속(duration)’이나 ‘흐름(flow)’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의 장면’이나 ‘정지상태’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라는 점이다. 이는 언뜻 보기에 하나의 튀어나온 강조점인 악센트를 지양하는 태도와 대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특정한 리듬을 사용하여 위계적 장면을 만들지 않으면서(즉 악센트를 만들지 않으면서) 정지 이미지를 다룰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안무 방법은 퍼포머가 ‘움직임의 모든 쪼개진 순간들을 완전히 인식하는 상태’를 강조한다. 움직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순간 A와 B 사이를 지정하고 이 두 이미지의 지점을 연결한다 하더라도, 퍼포머는 이미지의 두 지점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쪼개진 정지 이미지의 장소를 인식한다. 이때 정지 이미지들은 튀어나온 하나의 악센트를 만들지 않으면서 시간 속에서 평평하게 펼쳐진다. 이것이 그가 〈Plastic〉(MoMA, 2016)에서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 가는 경유 공간인 계단을 퍼포밍 공간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해당 작업은 두 분절된 공간을 연결하는 목적으로서 존재하는 사이 공간인 계단과 그곳에서 하강하는 몸을 다룬다. 두 공간의 사이 공간에서 또, 두 정지 이미지 사이에 비가시적이었던 이미지들이 가소성(plastic)으로 떠오른다.


‘WALKER’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보면 그가 다루는 정지 이미지의 면모가 좀 더 분명해진다.2 인터뷰이 아람 모사예디(Aram Moshayedi)는 하사비의 작업을 필름 매체 안에서 정지성을 다룬 또 다른 작가인 타시타 딘과 비교하며, 딘의 작업을 ‘(정지에 가까운) 움직임의 이미지(the image of movement)’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하사비의 작업을 좀 더 ‘형태의 고정성(fixity of form)’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파악했다.3 타시타 딘은 안무가 머스 커닝엄과 함께 존케이지의 <4’33>에 대한 커닝엄의 퍼포먼스를 촬영한 <Stillness>(2007)를 만든 바 있다. 이 작업은 존 케이지가 4분 33초 동안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소리들을 연주의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의자에 앉아 어떠한 ‘춤’도 추지 않는 머스 커닝엄의 몸을 고정 프레임으로 담아낸다. 필름으로 기록된 정지 이미지 안에서 역설적으로 노쇠한 커닝엄의 육체의 시간이 흐르고 있음이 나타나고, 타시타 딘은 스튜디오 공간 안의 미세한 먼지 흐름과 함께 이를 담아낸다. 이는 쇠퇴해가는 몸의 시간을, 멈춰 보이지만 흐르고 있는 것들을 담아내는 일이다.4 반면, 하사비의 작업에선 몸의 3차원성과 ‘지나가는 매 순간마다 몸을 조각한다는’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그의 정지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물질로서 신체와 중력의 관계를 다루며, 표상된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이미지의 현재적 가능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타시타 딘이 감광물질인 필름을 통해 빛(정확히는 기록된 과거의 빛)과 함께 프레임화된 정지 이미지를 다루는 것과 대비된다.5


타시타 딘, 〈Merce Cunningham performs STILLNESS (in three movements) to John Cage’s composition 4’33” with Trevor Carlson, New York City, 28 April 2007 (six performances; six films)〉(2008) 출처: 구겐하임

2. <Together>(2019-2022): 하지의 겹침을 통해서 본 ‘함께함’의 이미지

하사비의 작업이 정지된 점 이미지 사이를 이동하는 움직임의 테크닉이라면, 이를 지나가는 매 순간의 신체는 조각적 논리를 따르며, 구조적(tectonic)으로 다뤄진다. 여기서 하사비가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는 “tectonic”이라는 단어는 특별히 지질학적 구조를 뜻한다. 인간이 밟고 있는 지대인 지구의 표면을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중력에 의해 쌓인 것이며, 고정되어 보이지만 천천히 이동하고 있는 판임을 떠올릴 수 있다. 신체의 표면을 (중력에 잡힌) 아주 천천히 이동하는 판으로 상상해보는 일은 하사비의 작업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몸이 ‘조각적’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몸은 조각 재료나 땅과 같은 무기물이 아니다. 몸은 우선 살아 있는 생명체이며, 뼈와 근육, 신경은 조각보다 좀 더 움직이기 위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살아 있는 몸을 ‘형태의 고정성’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행위를 제한하며, 이로 인해 취약해진 신체 상태를 발생시킨다. 이는 정적인 부동성을 뜻하는 ‘Stillness’와 더불어 강제적인 힘에 의해 멈춰지는 ‘Stop’을 떠올리게 한다.6 취약함을 만들어내는 ‘정지성(Stop)’은 하사비의 작업에서 중단되지 않은 이미지의 이동에 비해 덜 조명되는 것 같지만 그의 작업을 지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이번 작업 <Together>에서도 ‘하나의 붙잡고 있는 공간(one place of hold)으로부터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과 ‘정지 이미지 안에서 조각적인 형태를 만드는 방법’이 등장한다. 끊이지 않는 움직임과 몸으로 멈춰 있는 형태를 만드는 일은 우선적으로 중력과 관계하는 일이며, 이 때문에 하체 컨트롤이 작업의 중심에 오게 된다. 인간의 신체 중 얼굴과 손과 같은 상체 부위가 상대적으로 타인을 향한 표현과 사회적 소통에 특화되어 있다면, 발과 다리와 같은 하체 부위는 생존을 위한 실질적인 움직임에 참여한다고 볼 수 있다. 얼굴은 수많은 근육을 조합하고, 미세하게 움직여 감정을 표현하고, 성대와 혀, 입술은 근육을 조절해 언어를 말한다. 손은 대상과 접촉하여 자신의 신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연장하며, 특정한 움직임을 통해 사회적인 기호를 형성하기도 한다.


반면 발과 다리와 같은 하반신은 중력에 대항해 서 있거나 두 다리로 걷는 등, 스스로의 몸을 지탱하고 이동시키는 좀 더 실질적인 움직임과 관계가 있다. 누군가는 이를 ‘생존의 기반이 되는(infra-)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7 인간은 잠든 몸의 수평적 상태로부터 수직으로 일어나기 위해 하체를 사용한다. 또 행위를 하기 위해 공간을 이동하며, 이때 두 다리를 사용한다. 일어나기와 걷기. 이들은 평소엔 인식하기조차 어려운 움직임이지만, 개인의 유기체적인 생존을 위한 기초가 된다. 이를 위해 하체는 다양한 움직임의 경로와 리듬보다는, 단순하고 효율적인 반복을 통해 발달한다. 상·하체의 이런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하사비 작업에서 등장하는 끊임없는 지속적 움직임은 사실상 상체로 구현하는 것이 훨씬 쉽다. 상체는 일상에서 단련된 수많은 움직임 방식을 기반으로 다양한 속도로 움직일 수 있으며, ‘지속적으로(uninterrupted)’ 움직이는 것 또한 상대적으로 더 쉽기 때문이다. 반면 다리와 같은 하체를 이같이 움직이는 것은 훨씬 어렵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사비는 하체를 지속적으로 움직이길 선택한다. 이때 몸의 조절할 수 없는 떨림과 호흡은 몸의 의식적인 통제를 벗어나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서 이 같은 통제할 수 없음은 안무의 일부가 된다.


<Together>는 관객석의 뒤편에서 두 퍼포머가 걸어와 15cm 위에 흰색 판 위에 올라가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시작되는 장면은 앞서 말한 하체로부터 출발한다. 두 퍼포머는 발을 약 30°의 비일상적인 예각으로 두며, 몸의 중심을 한발에서 다른 발로, 상체를 하나의 각도에서 다른 각도로 천천히 변화시킨다. 관객은 몸의 정면 이미지가 특정한 각도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지는 하지의 위치와 중심 변화는, 이내 타인의 하지에 자신의 하지를 가까이 붙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때 두 몸의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개별성을 잃고 겹쳐지는데, 이때 둘이 아니라 하나인, 다리가 4개가 달린 이상한 몸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어떠한 미세한 각도에서만 성립되는) 이러한 겹쳐진 몸의 이미지는 작업의 제목인 ‘함께함’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Together>는 ‘걸음의 리듬을 변형시켜 다리를 타인에게 붙게 한다’는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이는 ‘두 다리의 걸음’이 음악에서 기준이 되는 템포인 ‘모데라토’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음악에서 4/4박자와 모데라토는 바로 이 인간의 ‘정상적인’ 걸음걸이에서 기원했다. 우리는 걸으며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또 하나의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이동한다. ‘걷기’는 몸과 몸의 이미지를 이동시키는 신체적인 행위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동’은 몸들을 각기 다른 장소로 흩어지게 하여 각 신체의 개별성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데라토 템포’와 ‘걷기’는 인간이 신체적으로 건강한 두 다리를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한 ‘정상 세계’에서의 리듬을 전제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몸이 아프거나, 사고로 인해 다치게 되면 가장 먼저 변화하는 것은 이 같은 ‘걸음의 리듬’과 ‘자세(position)’다. 다쳐서 움직일 수 없게 된 몸, 잠든 몸, 혹은 죽어서 땅에 묻힌 몸은 장소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한 장소에 사물처럼 머문다. 누군가 다가올 것을 기다리며 좀 더 수동적인 무엇이 된다.


하사비의 걷기, 어쩌면 더 이상 걷기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이뤄지는 하체 이동은, 이 같은 ‘정상적인' 걸음의 리듬과 템포를 끈질기게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인 한쪽 다리를 타인의 다리 옆에 둔다. 우리는 계속해서 신중하게 변하는 다리들의 위치로 인해, 그곳에서 4개 또는 3개의 다리를 본다. 혹은 1개의 다리를 본다. 다리가 아닌 하나의 멈춰 있는, 이동하지 않는, 이동하는 능력을 기꺼이 포기한 무언가를 보기도 한다. 이러한 이상한(queer) 몸의 이미지와 리듬은 그가 다루고자 하는 “함께함”이 무엇인지를 떠오르게 한다. 때론 고개를 뒤로 젖혀 외부를 향해 목을 드러낸 취약성으로, 때론 젖힌 머리의 무게를 타인의 어깨에 기대며, 때론 붙어 있지만 기대지 않으며. 간격을 두고 붙지 않으며. 겹쳐지고 이내 떨어지며. 피부의 색 차이를 바라보게 하다가도, 무게에 눌려 붉어지거나 하얘진 살들로 시선을 돌리게 하며, 개별적인 몸과 생존의 기반이 되는 하지를 타인에게 붙여내는 불가능한 이미지를 상상하게 하며, 함께 하기.


마리아 하사비, <Together> 기록 영상 캡처 (옵/신 페스티벌 2022)
  1. 1) 11월 6일 일민미술관에서 진행한 아티스트 토크 중 마리아 하사비의 말
  2. 2) WALKER: Stillness and Spectacle: An Interview with Maria Hassabi, https://walkerart.org/magazine/interview-maria-hassabi-aram-moshayedi-staging
  3. 3) 베르그송과 하이데거는 서로 다른 이유로 시간이 지금-지점(now-point)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비판했다. 먼저 베르그송은 고립된 지금과 같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시간은 분절할 수 없는 연속이고, 이는 설탕이 입에서 녹는 것처럼 다른 대상과 접촉하면서 ‘지속’을 통해 경험되는 무엇이다. 반면 “하이데거의 경우 ‘지금-지점의 연속’이 가지는 문제는 ‘지금’ 아니라 ‘연속’이다. 그는 시간의 각 순간이 나중 순간을 위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싫어했다. 그의 시간성은 고립된 지금-지점을 시간의 비단 같은 흐름으로 전환시키는 것과는 관계가 없고, 고립된 순간을 이전보다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레이엄 하먼, 『쿼드러플 오브젝트』, 「하이데거 보론, 시간 없는 시간성」 참조.)
    하사비의 정지 이미지는 하이데거의 고립된 현재적 시간성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이는 매 순간의 모든 ‘정지된 점’의 이미지를 악센트가 없이 평평하게 펼쳐놓는 그의 방법론과 관계가 있다. 관객은 이를 통해 비위계화된 순간들 속에서 특정한 정지 이미지를 만날 수 있게 된다. 하사비의 작업에서 이 같은 비위계화된 배치는 이미지의 표면성을 다루기 위한 미니멀리즘 조각의 방법론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무용과 같은 신체를 매체로 하는 예술의 경우 이러한 ‘배열’은 시각적인 배치를 넘어 시간 속에서 이뤄진다. 이는 필연적으로 ‘사라지는 대상’을 배열하는 구성, 특히 리듬과 관계 맺는다. 하사비의 방법론은 모든 과거의 ‘사라지는 순간’이 실제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정지된 현재’로 존재한다고 설명하는 하이데거의 기이한 시간성과 닿아 있다.
  4. 4) 타시타 딘는 주제적으로 “버려진 대상들, 이미 완료된 과거 사건들의 잔여들이 어떻게 현재에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는가”를 필름 매체를 통해 다룬다. 김지훈 연구자는 이러한 대상들을 ‘쇠퇴하는 것’이라고 명명했다. 이에 관련해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논문을 참고. 김지훈, “쇠퇴하는 것들을 구원하기-타시타 딘의 전시의 영화에서의 유물론과 존재론,” 『현대미술사 연구』 34, 2013.
  5. 5) 현대 과학에서는 빛과 물질은 이중성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물리학계에서는 빛이 파동인지 입자인지에 대한 오랜 논쟁이 있었고, 현재는 빛은 때에 따라 파동성(거시세계)을 띠기도 하고, 입자성(미시세계)을 띠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이 두 성질은 상보적으로,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볼 수 없듯 한 번에 나타나지 않는다. 빛과 마찬가지로 물질도 특정한 상황에서는 파동성을 가질 수 있다.(드브로이의 물질파) 이처럼 (이미지의) 연속성(파동성)과 불연속성(입자성)은 건널 수 없는 경계 같은 것이 아니라 상보적이며, 동시에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6. 6) 사라 아메드는 메를로 퐁티의 연장 가능성(I can do) 현상학을 뒤틀어 경유하며, 연장될 수 없음의 감각과 불가능성(I can not do)의 현상학인 파농의 현상학을 언급한다. 여기서 신체는 공간과 사물에 새롭게 접속되고 확장되기보다는, 백인성의 공간에서 응시되고, 불리고, 멈춰지며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Sara Ahmed, Queer Phenomenolpgy, “The Orient and Other Others: Reproducing Whiteness.” 참조.
  7. 7) 사회 기반 시설을 뜻하는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의 ‘infra-‘는 인간 신체의 하반신처럼 보이지 않게 ‘아래에’ 있는 것들을 뜻한다. 하체의 움직임과 그 기능은 조각의 바닥으로부터 60cm 공간을 생각하게 한다. 이 공간 안에 있는 정보는 쉽게 시야에 잡히지 않고, 이 때문에 종종 조각에서 ‘죽은 공간’으로 불린다. 전통적인 조각은 특정 형상만을 시야에 보여주기 위해, 좌대라는 비가시적인 사물로 이 죽은 공간을 채워왔다.
하상현_작가 몸과 사물을 바라보는 경험을 혼동하며, 그것들이 섞여 들어간 작업을 해왔다. 목소리가 없고 드러날 수 없는 존재들과 그들이 외부에 나타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진다. 《디램》(윈드밀, 2022), 《포즈들》(보안여관, 2021), 《동물성 루프》(이민주, 허호정 기획전, 공-원, 2019), 《아이소메트릭》(문래예술공장, 2018), 《플래시메모리-칼(Carl)》(신촌극장, 2017), 〈구걸하는 포즈〉(대안공간 루프, 2015), 〈0kg Today〉(플레이스 막, 2015) 등에서 퍼포먼스와 사물, 영상기록물이 결합된 작업을 보여줬다.
shha91@gmail.com
옵/신페스티벌 2022
  • 작품명: 투게더
  • 연출: 마리아 하사비
  • 일시: 2022.11.5. 오후 4시, 7시 / 2022.11.6. 오후 5시
  • 장소: 일민미술관
  • 공동기획: 옵/신 페스티벌, 일민미술관
  • 홈페이지: http://obscenefestival.com/festival/programs/together
  • 공동기획: 옵/신 페스티벌, 일민미술관
하상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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