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평

국내외 무용 현장에 관한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관점을 소개합니다.

2022.12.15 조회 4434
  • 페이스북
  • 트위터
  • url복사
  • 프린트

이민주_미술비평

고스트 스토리: 티노 세갈의 〈앤 리〉



고스트 스토리: 티노 세갈의 〈앤 리〉



이민주_미술비평



실체 없는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의 이름은 ‘앤 리’(Ann Lee). 《옵/신 페스티벌 2022》을 계기로 티노 세갈이 〈앤 리〉를 데려왔다. 불 꺼진 전시장에 3D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한 캐릭터가 자신을 소개하는 영상이 보인다. 시장에서 유통되었어야 할 자신이 어떻게 전시의 장소로 불려오게 되었는지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 앤 리는 자신이 영혼(ghost) 없는 ‘껍데기’이자 단지 ‘이미지’에 불과할 뿐이라며 이름을 어떻게 부르든(spell)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약 4분간 자신의 정체성을 독백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영상이 끝나고 불이 켜지면서 실제 소녀 한 명이 전시장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는 자신을 4차원으로 구현된 앤 리라고 소개한다. 꼿꼿하게 선 허리, 정확하게 마주하는 시선, 어색하게 삐걱대는 손짓. 다소 인위적인 시선 처리와 동작은 마치 로봇이나 인공지능처럼 ‘인간’적이지 않은 신체의 움직임을 수행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Anywhere out of the World, 2000 (still), DVD projected via video beamer, loudspeaker,
light, Courtesy the artist Still ⓒPhilippe Parreno

앤 리는 피에르 위그와 필립 파레노의 〈영혼 없이 껍질뿐인〉(1999-2003) 프로젝트에서 새롭게 탄생한 캐릭터다. 작업은 위그와 파레노가 1999년에 일본의 K워크 회사로부터 버려진 앤 리라는 만화 캐릭터의 저작권을 구매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2차원 캐릭터였던 앤 리는 위그의 〈백만 왕국들〉, 파레노의 〈세상 밖 어디든〉을 통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위그의 작품에서는 디지털 드로잉으로 표현되었고, 파레노의 작품에는 3차원의 이미지로 변환된 앤 리가 등장했다. 세갈은 3차원으로 구현된 파레노의 앤 리 이미지를 가져왔다. 언뜻 파레노의 작업인지 세갈의 작업인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화면 속 앤 리가 말한다. 자신은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며 아무나 자신의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다고. 앤 리의 주장은 위그와 파레노가 자신의 작업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에게도 이 캐릭터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게끔 저작권과 이용권을 부여하는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리암 길릭,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프랑수아 쿠를레 등 약 30명 정도의 작가들이 앤 리를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면서 위그와 파레노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1


‘영혼 없이 껍질뿐인’(No Ghost, Just a Shell)이라는 제목은 1990년대에 나온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의 표제로부터 빌려왔다. 애니메이션은 초고도로 기술화된 시대에 기계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는지에 관한 서사를 가지며 인간적인 기계, 기술화된 육체 사이에 남겨진 철학적 논의를 파생시켰다. 여기서 기계와 인간은 전통 서양 철학사에서 지난하게 논의해온 껍데기와 알맹이, 말하자면 신체와 정신의 관계를 유비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그와 파레노의 작업은 현대 사회의 소비 체계가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교란시키며 모든 것이 껍데기로 전락하는, 혹은 이미지로 소비되는 상황을 짚는다. 스펙터클 이미지로 점철된 세계에서 이미지는 안팎을 나눌 수 없는 상품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의 작업에서 앤 리는 소비와 생산이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당대 이미지의 유통 구조에 대한 표상이 된다. 디지털 생태계에서 무한 증식하는 이미지의 순환 조건,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 또는 이미지 생산자로서 작가의 저자성(authorship) 문제를 표면화하면서 말이다.


앤 리는 다양한 작가들에 의해 새로운 서사를 부여받았고 사용하는 주체에 따라 각기 다른 정체성을 얻었다. 그로 인해 앤 리 프로젝트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누구의 작품인지 작품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을 연출하곤 했다. 이때, 앤 리라는 이미지에 실제 몸이 개입하면서부터 작품은 이미지의 유통과 순환의 문제에서 나아가 신체와 이미지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앤 리가 실제 몸과 함께 출현하면서 캐릭터의 텅 빈 이미지와 실제 퍼포머의 몸 사이에 이격이 생기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영상이 끝난 후 문밖에서 등장하는 티노 세갈의 앤 리는 퍼포먼스에서 신체성 논의, 미술에서 몸과 이미지에 관한 화두를 끌고 온다.


현대 무용과 미술의 언어를 모두 경험한 티노 세갈의 퍼포먼스에서 특징적인 지점은, 그가 현대 무용계의 퍼포먼스와 구분되는 방식으로 ‘미술 퍼포먼스’를 강조한다는 점이다.2 제롬 벨의 무용단원이었던 티노 세갈은 미술관 혹은 전시장이라는 제도적 영역을 퍼포먼스에서 중요한 개념적 무대로 삼아왔다. 그는 미술의 문법으로 자신의 퍼포먼스를 일종의 ‘연출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이라고 부르며, 미술관이라는 장소성을 작업의 필수적인 재료로써 활용하는 것이다.3 퍼포머와 관객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관계 맺도록 제안하는 그의 퍼포먼스는 훈련된 신체의 움직임, 혹은 몸의 기술적 율동과 감각을 전하기 위한 형식이 아니다. 하나의 조각이 공간 안에 놓이면서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의 작업에서 퍼포머의 신체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자 미디어다. 그의 퍼포먼스에서 퍼포머는 무대 위를 활보하는 동적 대상이기보다, 관객을 무대 위로 올려놓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 것이다. 요컨대 티노 세갈 작업의 퍼포머티비티는 퍼포머와 관객의 몸에 있지 않고, 그 몸들이 매개하는 상황 자체에 있다.


13세 소녀 앤 리가 2차원의 평면 이미지에서 3차원의 입체 이미지를 거쳐, 비로소 4차원의 시간 세계로 진입했다. 그 시간의 장소는 미술관이라는 역사적인 시간이 두텁게 쌓인 곳. 공연계의 퍼포먼스가 하나의 서사를 바탕으로 특정 캐릭터를 조명하거나, 혹은 움직임에서 서사를 도출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면, 미술계의 퍼포먼스는 미술관이라는 장소적 구조를 중요한 형식적 요소 중 하나로 삼는다. 전통적인 맥락에서, 미술관은 표백된 공간으로서 회화나 조형 작품 등 고정된 이미지를 보여주기에 용이하지만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하기엔 적절하지 않다. 무대와 객석이 구분 없게 펼쳐진 공간, 시선의 모든 방향을 허용하는 장소에서 움직이는 몸은 온전한 시각적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미술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퍼포먼스는 하나의 사건 자체를 발생시키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미술관의 신체는 경험을 유발하는 매체로 간주된다. 퍼포먼스를 ‘연출된 상황’이라 부르며, 미술관이라는 장소성에 기대고 있는 세갈의 태도는 앞서 말한 소위 ‘미술관 퍼포먼스’의 전략을 구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상 밖으로 뛰쳐나온 (것으로 설정된) 퍼포머가 시선을 관객 한 명에게 고정한 채 묻는다. “충분히 바쁜 것과 아무 일도 없는 것” 사이에서 어떤 걸 선택하겠느냐고. 혹은 “기호와 멜랑꼴리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 있냐고. 관객은 주어진 질문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여 답해야 한다. 다소 짧은 대화가 오간다. 지금까지 세갈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앤 리의 질의는 관객을 한 명의 공동 창작자 혹은 또 다른 퍼포머로 초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퍼포먼스에서 앤 리는 관객의 대답 혹은 역질문에 별다른 말을 얹지 않는다. 한 번의 질문과 한 번의 대답으로 둘의 대화는 끝나고 만다. 단번에 답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질문 앞에서 관객이 앤 리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의 생각은 무엇이냐고. 예상치 못한 역질문 탓일까? 퍼포머와 관객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준비된 말이 없어 답할 수 없는 듯했다. 서로를 향해 말하고 있지만 퍼포머와 관객 사이에 아무런 상호 작용도 없어 보였다. 비단 퍼포머 한 명의 어리숙함이라기엔 다수의 회차에서 동일한 상황이 반복됐다.


작업에 성공과 실패를 따질 수 있다면, 일방적인 질문과 변수를 용인하지 않는 퍼포먼스/상황은 그 연출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앤 리라는 캐릭터가 빈 껍데기라는 설정을 상기한다면 퍼포먼스는 퍼포머와 관객 간의 상호작용이나 관계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껍데기에 불과한 대상과의 대화는 애초에 공회전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퍼포머가 던진 질문을 되짚어보자. 기호와 멜랑꼴리에 대한 질문은 결국 이미지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멜랑꼴리가 기호/언어화될 수 없는 것을 포착하려는 시도로부터 실패한 상실의 정서라고 할 때, 앤 리는 온전히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이미지의 성질과 관련한다. 말하자면 앤 리의 실제 출현은 살아있는 몸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한 이미지를, 한 개인과 개인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미지의 표피를 드러내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텅 빈 이미지로 소비되던 앤 리가 실제 몸으로 지금 시간에 위치하게 된 정황은 그 얄팍함 자체를 수행적 대상으로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Anywhere out of the World, 2000 (still), DVD projected via video beamer, loudspeaker,
light, Courtesy the artist Still ⓒPhilippe Parreno

상술한 것처럼, 티노 세갈의 퍼포먼스는 현대무용의 안무와 공연의 조건을 전제로 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미술의 관습을 빌려온다. 미술관이라는 역사적 장소, 전시의 조건, 미술의 제작과 생산 시스템 위에 몸을 올려두면서 신체가 이미지로부터 소외되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러한 그의 전략은 무용과 미술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체를 대하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춤과 무용이 찰나의 순간을 위해 몸을 꾸준히 훈련시키고 기술화한다면, 미술의 몸은 이미지를 매개하기 위한 대상이자 수단이 된다. 그 몸은 신체의 움직임 자체보다 동작과 동작 사이의 불연속성, 신체의 어긋나는 움직임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상상하기를 제안한다. 경험하지 않은 대상을 관념적으로 그리는 일. 즉 상상(imagination)의 기제가 이미지의 근원적인 성질이라고 할 때 이미지를 매개하는 대상으로서 몸은 언제나 실체 없는 유령적 움직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상과 실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오늘의 실정에서 언제 어디서든 존재할 수 있는 몸과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다. 유비쿼터스 환경을 지나 메타버스의 세계에 진입한 이미지의 물질적 위상을 질문하는 것, 그 동시적 출현에서 소외되는 신체에 관여하는 것이다. 모든 곳에서 출몰하는 몸과 그 몸이 매개하는 이미지가 여기저기 실체 없이 순환하고 있다. 지금 앤 리처럼.

  1. 1) M/M Paris, http://www.mmparis.com/noghost.html, accessed 30, November, 2022.
  2. 2) 티노 세갈은 전통적으로 시각예술은 물질적인 것이 영구적인 대상으로 정박되는 것을 욕망한다고 말한다. 한편 그의 관점에서 춤은 시각예술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그것이 생산될 때 사라지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물질적인 것보다 행위의 변환에 초점을 맞추면서 생산과 비생산을 동시에 창출하는 것이다. 세갈은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프레임 안에서 미술과 춤이 충돌하는 지점을 작업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Jessica van den Brand, Tino Sehgal: Art as immaterial commodity, LAP LAMBERT Academic Publishing (February 4, 2015), p. 5.
  3. 3) 같은 글, p. 17.
이민주_미술비평가 이민주는 서양화와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글 쓰고 전시를 꾸린다.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의 관계를 짚은 《동물성 루프》(공-원, 2019)를 공동 기획, 다큐멘터리 이미지의 미학성과 정치성을 조명한 《논캡션 인터뷰》(의외의조합, 2021)를 기획했고, 제5회 GRAVITY EFFECT 미술비평공모 2위를 수상했다. 이미지가 만드는 사건과 기록성에 주목하며 비평적 글쓰기를 고민한다.
demojoo926@gmail.com
옵/신페스티벌 2022
  • 작품명: 앤 리
  • 연출: 티노 세갈·필립 파레노
  • 형식: 라이브 워크, 영상
  • 일시: 2022. 11. 4 ~ 11. 20 12:00 ~ 18:00 (월요일 휴관)
  • 장소: 에스더 쉬퍼 서울
  • 홈페이지: http://www.ob-scene.com/festival/programs/ann-lee
이민주(미술비평가)


목록

댓글 0

0 / 3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