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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국내외 무용 현장에 관한 다양한 장르 예술가들의 관점을 소개합니다.

2022.03.08 조회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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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자의 저자성 새로운 주체성으로서의 큐레이토리얼(the curatorial)의 가능성

매개자의 저자성
새로운 주체성으로서의 큐레이토리얼(the curatorial)의 가능성



문지윤_큐레이터



창작자와 작품을 관객에게 매개하는 기획자는 매개자로서 저자성을 어떻게 획득하게 되는가? 기획자가 구성한 맥락에 초대된 작가와 창작품의 접점에서는 다양한 담론과 해석이 이뤄진다. 이번호 주제 ‘저자로부터 걸어 나온 춤’에서는 안무가의 저자성뿐만 아니라 매개자의 저자성을 함께 다루며 공연예술과 시각예술의 각기 다른 매개자의 저자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매개자의 저자성이라는 개념은 역설적이다. 서양 근대에서 발전한 저자의 개념은 유일무이한 것의 창조자로서 이해되었다. 그러나 매개자는 이와 다르다. 매개자는 무엇을 창조하는가? 저자성이라는 개념이 고유성을 바탕으로 한다면 매개자의 저자성이란 매개자의 특정한 고유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가능한 일인가?


서양 근대에서의 창조자 개념이 위협받는 곳은 디지털 네트워크 세계이다. 디지털 기술이 발생시킨 시공간에서 우리 모두는 매개자이자 창조자이다. 디지털 시공간은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가 남긴 디지털 지문들로 인해 무한한 팽창한다. 우리의 존재의 흔적은 갈수록 정밀해지는 알고리듬 속에서 실시간 매개된다. 우리가 특별한 생각 없이 누르는 좋아요와 클릭들은 누군가에게 거대한 이윤을 남기고, 이러한 이윤을 바탕으로 디지털 세계에서의 매개자들은 창조자로서 인정받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 저자성이 유일무이한 것에 대한 창조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면, 디지털 시대에 저자성은 구축한 네트워크의 볼륨과 사이즈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이 네트워크는 관람객의 참여를 통해 발생한다. 관람객은 더 이상 저자가 완성한 작품을 수동적으로 향유하는 자가 아니라 매개자로서의 저자성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다.


동시대 예술은 여전히 아날로그 세계의 생산 규칙과 유통, 소비의 작동 방식아래 성립한다. 이는 최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작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서양 근대 법체계에서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저자들을 중심으로 동시대 예술의 질서가 구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큐레이터라는 저자성은 오히려 디지털 세계에서의 매개자의 저자성과 유사한 점이 많다. 따라서 아날로그 세계관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동시대 예술에서 큐레이터라는 저자성이 허약한 기반 위에 작동하는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현대 미술 전시에 대한 소개 기사에서 전시의 큐레이터의 이름 자체가 빠져있는 경우는 허다하다. 전시 생산이 독자적인 창조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는 전시라는 특정한 창조물의 저자이지만, 큐레이터의 저자성은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아티스트의 저자성에 비하면 너무나 일시적이고 고유성이 결여되었기에 이윤을 창출하는 아카이브에 남지 못하는 것이다.


큐레이터쉽이라는 허약한 저자성을 기반으로 하는 전시라는 창조물은 서양 근대에서 이해되던 춤의 존재론과 유사하다. 한번 발생하고 나면 재현되는 것이 불가능한 전시처럼, 춤 또한 일시적이며 유한하며 무대가 막이 내리면 아카이브에 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양한 기록 영상, 자료들이 발생할 수 있지만 그것의 아카이브는 결코 특정한 시공간에서 발생했던 전시를 대신하지 못한다. 다른 상황, 시간, 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하기에 가변적이고 유한하며, 그렇기에 유통의 장에서 전시는 모래위에 성처럼 허약한 기반에서 작동되는 것이다. 하지만 탈자본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허약한 존재론적 기반 위에 놓인 큐레이터쉽은 저자성에 내제한 위계성으로부터 탈주하여 창조의 열린회로 속에서 끝임 없이 차이를 발생시키는 벡터(vector)이다. 한 작가의 작품이 어떠한 큐레이터쉽을 통과했는지에 따라 발생하는 미세한 차이들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창조의 열린회로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전시라는 매개체는 다중적 경험을 생산하는 기제이다. 전시라는 매개로 인해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새로운 경험의 가능성이 발생하고, 참여자의 다중적 경험이 의미망의 열린회로를 발생시킨다는 측면에서 큐레이터쉽의 작동 방식은 디지털 네트워크 세계에서 정보가 생산되고 유통되고 공유되는 방식과 유사한 점이 많다.1


차이를 발생시키는 벡터로서 큐레이터쉽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큐레이터라는 단어의 어원에 새겨져 있는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에세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철학자 스테판 노워티(Stefan Nowotny)는 「큐레이터가 강을 건너다: 하나의 우화(The Curator Crosses the River: A Fabulation)」라는 에세이에서 큐레이터의 어원인 큐라(cura)라는 신화적 인물상에 대한 우화를 소개하고 있다.2 큐라는 큐레이터의 어원이자, 영어 단어인 케어(care), 즉 돌봄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 우화는 로마 제국 시대의 작가 하이기누스(Gaius Julius Hyginus)의 『이야기(Fabulae)』에 수록되어 있다. 노워티는 큐라라는 여신이 강을 건너는 자로 표현되어 있음을 주목한다. 큐라는 왜 강을 건너는가? 큐라는 무엇을 하고자 강을 건너는 것인가? 강을 건너는 것에 우리는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Constantin Hansen,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큐라(cura)가 강을 건넌다.3

큐라는 강을 건너서 펼쳐져 있는 대지로 나아간다. 그리고 여기서 무언가를 창조하는데 큐라는 이것을 호머스(humus)라고 불렀다. 여기서 라틴어 호머스는 인간을 뜻하는 영어 휴먼(human)의 어원이기도 하다. 강을 건너는 자인 큐라의 창조 행위에서 흥미로운 점은 큐라가 호머스를 혼자서 창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큐라는 대지의 신인 텔루스(Tellus)의 도움으로 호머스의 물질적 실체, 즉 신체를 발생시키고, 로마신화에서 최고의 신인 주피터(Jupiter)에게 영혼을 불어넣어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다양한 협업으로 인해 호머스가 창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머스의 창조 이후 저작권 싸움이 벌어진다. 큐라, 주피터, 텔루스가 각각 호머스의 저작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이들은 주피터의 아버지 새턴(Saturn)을 심판으로 초대하고, 새턴은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다. 호머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큐라가 저작권을 행사하고 죽으면 영혼은 주피터가 그의 육체는 텔루스가 가지는 것으로 정리했던 것이다.


영혼은 주피터가, 신체는 텔루스가 제공했다면 큐라는 무엇을 했는가? 큐라가 무엇을 했기에 호머스가 살아있는 동안 저자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큐라의 창조 행위의 핵심은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강을 건너는 큐라의 행위는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큐라는 강을 건너서 주피터와 텔루스에게 창조에 참여하기를 초대하였다. 강을 건넌다는 행위는 자신의 인숙한 장소를 떠나 새로운 비전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 비전과 용기를 바탕으로 큐라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영역에 전문가를 초대하여 호머스를 빗어내기 위한 협업의 네트워크를 구성한 것이다. 그것이 큐라의 창조였다. 큐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 강을 건너고 주피터와 텔로스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차이를 발생시키는 자였던 것이다.


큐라의 강을 건넌다는 행위에서 파생되었던 주피터와 텔로스와의 협업은 호머스라는 존재를 창조하기 위해 특정한 협업체제를 발생시켰다. 노워티가 큐레이팅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추적하면서 강을 건너는 자인 큐라의 이야기에 주목한 이유는 큐레이팅이라는 작업에 내제한 이러한 창조의 협업체제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큐레이팅은 협업체제를 발생시키는 창조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큐레이팅이라는 동사의 형용사인 큐레이토리얼(the curatorial)은 고유성을 바탕으로 하는 서양 근대의 저자성을 바탕으로 하는 주체 개념 너머 매개자로서 작동하는 새로운 주체성을 설명하는 개념어로서 이해될 수 있다. 큐레이토리얼이라는 주체성은 직업인으로서의 큐레이터의 작동방식을 내포하지만 그것에 국한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라는 명사는 현실 정치 체제를 구성하는 제도, 역사, 규칙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지만, 이것을 ‘정치적’이라는 형용사로 제시했을 때는 정치의 제도, 역사, 규칙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개념어로 이해될 수 있다. 형용사로 제시되는 이러한 개념어들은 기존의 명사 혹은 동사가 어떠한 의미 형성의 망을 통해 성립되었는지 질문을 던지기 위해 제시된다. 형용사로서 제시되는 개념어들은 기존의 의미망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던 인식론적 조건과 새로운 긴장 관계와 다이내믹을 발생시키기 위한 ‘철학적’ 질문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동시대 안무실험들 중에서 큐레이터의 작동 방식과 닮아있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이러한 작업들이 서양 근대 무용 제도와 불화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안무에 대한 다른 이해이다. 안무를 더 이상 일시성이라는 춤의 존재론에 대항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안무가-저자성의 위계성을 벗어나 끊임없이 경험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전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비에 르 루아(Xavier Le Roy)의 <회고전(Retrospective)>은 영원성을 담보하는 화이트 큐브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가하며 전시로서의 춤, 혹은 춤으로서의 전시가 발생시킬 수 있는 열린회로로서 예술 경험의 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르 루와는 한정된 공연시간이 전제된 블랙박스와 달리 관람객의 입장과 퇴장을 일정시간 통제할 수 없는 전시라는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회고전>을 매번 다른 경험이 생산되는 열린회로로 제안하였다. 르 루아의 주요 작업들을 기준으로 삼되, 이 작업을 설명하는 각각의 퍼포머들은 이 작업과 연관된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여 관람객에게 들려준다. 따라서 <회고전>은 어떤 퍼포머가 참여하는지에 따라, 어떤 관람객이 이 퍼포머들을 대면하는지에 따라 매번 다른 경험이 생산되는 것이다. 마치 차이니즈 위스퍼 게임이 본래의 문장을 완벽히 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듯, 저자와 저자 사이를 옮겨가며 발생하는 매개자의 저자성은 저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증폭시키면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 차이를 통해 매개자로서의 저자성이 발생하기도 하고, 또 위협받기도 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예시와 같이 나는 저자로서의 주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협력의 체제와 네트워크를 설명하는 개념어로서의 큐레이토리얼이라는 작동 방식이 동시대 안무 실험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목하는 동시대 안무 실험의 특징은 이들이 고유성을 전제하는 위계적 저자성 너머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협력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협력의 네트워크는 큐라가 강을 건넜듯이 자신이 익숙한 환경, 제도, 체제에서 벗어나는 전환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전환의 작동방식은 큐라의 어원이 가리키듯 주의, 관심, 돌봄에 기초하고 있다. 저자들 사이의 협력의 네트워크를 구성한다는 것은 사이의 공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네트워크의 작동은 서로를 향한 돌봄을 실천함으로서 실행되는 것이다.

  1. 1) 물론 현실적 제도에서 전시가 열린회로로서 제시되는 경우는 쉽지 않다. 큐레이터쉽이라는 허약한 저자성으로 인해 위계적 저자들과의 협업의 공간이 쉽게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나는 큐레이터쉽 안에 내제된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2. 2) Stefan Nowotny, “The Curator Crosses the River: A Fabulation” in The Curatorial: A Philosophy of Curating, Jean-Paul Martinon (ed), London: Bloomsbury Academic, 2013.
  3. 3) Stefan Nowotny, “The Curator Crosses the River: A Fabulation”, in The Curatorial: A Philosophy of Curating, London: Bloomsbury Academic, p.51.
문지윤_큐레이터 문지윤은 큐레이터이자 확장된 현대예술의 실천을 연구하는 이론가이다.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큐레이터학을 전공하였다.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 제출한 박사 논문 「Choreo-graphy: The Deinstitutionalisation of the Body and the Event of Writing」에서 동시대 예술가들이 코레오그래피라는 춤추는 몸을 쓰는 기술을 어떻게 전시 만들기라는 시각예술생산 기제를 해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작동시켰는지 분석하였다. 공공예술, 건축, 퍼포먼스 프로그램 등 확대된 예술의 영토에서 일해 왔으며 아트선재센터, 백남준아트센터,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일했으며 영국 리버풀 비엔날레에서 프로그램 총책임자를 역임했다. 현재 가천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국민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주요 역서로는 안드레 레페키(Andre Lepecki)의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Exhausting Dance)』가 있다.
moonjeyun@gmail.com
문지윤_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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