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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22.12.16 조회 5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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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리, 문지윤, 황수현과의 대화

지금, 안무를 어떻게 감각할 것인가

[상설기획: 안무론_동시대 안무 개념의 형상들]



지금, 안무를 어떻게 감각할 것인가
김재리, 문지윤, 황수현과의 대화



조형빈_춤in 편집위원



안무는 지금 어떻게 정의되고 있고, 정의되어야 할까? 근대적 주체를 세우는 것으로써, 춤을 하나의 예술 장르로 확립하기 위해 ‘쓰기’의 방법론으로 간주되었던 안무는 근대성을 표상하는 춤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안무는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춤을 옮기기 위해, 더 정확하게는 붙잡아두는 것이 불가능한 운동성을 잡아세우기 위해 고안되었으나, 춤의 ‘수행’이 더 이상 단일한 주체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동시대 예술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안무가들이 이 근대적 안무의 개념을 해체하고 확장시키고 있다.

만약 안무가 단일한 ‘쓰인 움직임의 수행’ 이상의 다른/확장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무의 모습들은 이것과 어떻게 이어지는가? 『춤in』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10월부터 12월까지 세 달에 걸쳐 각기 다른 연구자/창작자들의 안무에 대한 글을 ‘이어 쓰기’의 방식으로 싣는다. 문지윤, 김재리, 황수현 세 사람의 글이 저마다 다른 관점에서 ‘안무의 형상’을 제시하고, 마지막 12월에는 이들의 목소리를 한자리에 모아 좌담의 형식을 통해 서로 다른 안무의 개념들이 어떻게 중첩되고 틈입하고 있는지 이야기 나눠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안무의 동시대적 형상들이 예술에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나아가 지금의 안무들이 확장할 수 있는 영역을 가늠해보는 것이 이번 기획의 목표다. (기획/책임편집자: 조형빈_춤in 편집위원)



안무론: 동시대 안무 개념의 형상들

① 전시 만들기 전략으로서 안무: 집중의 문제와 네거티브 움직임의 발화_문지윤
② ‘우리’는 안무로 무엇을 할 수 있나?: ‘함께하기’를 회복하기_김재리
③ 명사적 안무에서 동사적 안무로: ‘살아있는 순간’을 조직하기_황수현
④ [좌담] 지금, 안무를 어떻게 감각할 것인가_조형빈



일시: 2022년 12월 8일
참석: 김재리(드라마투르그), 문지윤(큐레이터), 황수현(안무가)
진행 및 편집: 조형빈(『춤in』 편집위원, 모더레이터)



왼쪽부터 문지윤, 황수현, 김재리, 조형빈 ⓒ오창동


안무의 형상들

조형빈: 세 분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늘 좌담의 자리는 저희가 『춤in』에서 세 달 동안 이어온 ‘안무론: 동시대 안무 개념의 형상들’이라는 기획을 마무리하는 자리입니다. 그동안 세 분 선생님께서 각각 안무에 대한 글을 써 주셨고, 일종의 이어쓰기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글들을 서로 보시고 난 후에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맨 처음 이 ‘안무론’의 기획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은, 작년 11월 모므로살롱에서 스튜디오그레이스의 기획으로 열렸던 ‘안무랩’에서 김재리, 문지윤 두 분 선생님께서 나누셨던 토론을 보았을 때입니다. 그때 두 분께서는 ‘안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미 이야기를 나누셨는데요. 저는 관객으로 그 자리에 참여했었는데, 흥미로웠던 것은 두 분이 같은 ‘안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신기했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죠. 지금 2022년에 사람들은 저마다 ‘안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고 아마도 각자의 역할이 어디인지에 따라, 비평가나 안무가, 큐레이터들이 저마다 바라보고 있는 ‘안무의 형상’이 다를 것 같았습니다.
안무라는 것을 무용의 역사의 관점에서 정의해본다면, 거칠게 ‘낡은 것’ 정도로 정의 내릴 수 있겠습니다. 하나의 구조로서, 혹은 근대적인 체계로서 무용-공연이라는 매체의 속성을 완성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필요했던 개념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런 측면에서 ‘안무’는 과거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도 동시에 따라옵니다. 모더니즘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출현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반대항으로서 스스로를 형상화하는 대신 그 무수한 갈래들을 다변화하면서 모더니즘의 체계에 맞섰던 것처럼, 안무의 시간이 근대와 함께 만료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이후에 오는 것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들을 선생님들과 함께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이번 기획 안에서 각자 주셨던 글들을 다 읽어보셨겠지만, 서로 바라보시는 안무의 모습이 각기 다르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떤 지점에서는 깊게 연결되는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를 해주시면서, 쓰셨던 글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더불어서 글을 쓰시고 나서 생각이 변화한 부분이나, 혹은 다른 분들의 글을 보면서 연결 지을 수 있었던 부분들도 간단히 언급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문지윤: 저는 아트선재센터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문지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조형빈 선생님께서는 김재리 선생님과 제가 굉장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웃음) 다만 활동하고 있는 분야가 다르고 그래서 출발점이 다르다는 생각은 듭니다. ‘안무’라는 단어는 일종의 기술적 용어이기도 하지만 개념적(conceptual) 용어로도 쓰이고 있거든요. 저는 안무의 개념이 동시대 예술 안에서 이런 공통점으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안무라는 용어가 갖고 있는 탄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어원적으로 따져본다면 안무(choreography)라는 단어에는 ‘쓰기(graphy)’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죠.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에게 있어서 ‘쓰기’는 일종의 확장의 전략이었습니다. 1차 대전 이후에 철학자들이 주체를 어떻게 확장해서 사유할 수 있을지,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적 관계를 어떻게 확장해 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는 와중에 데리다가 전략으로 세웠던 것이 바로 이 ‘쓰기’라는 기술이었습니다. 이 ‘쓰기’의 확장성은 결국 유령론(hauntology)으로 연결되면서 다양한 가능성이 들어올 수 있는 데리디안적 전환으로 이어졌는데, 저는 이것이 안무의 개념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2000년대에 유럽에서 현대미술 생산의 여러 플랫폼들이 구조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현대무용가들이 미술관에 들어오는 안무적 실험들이 발생하기도 했죠. 말하자면 실천과 이론 양쪽 모두에서 동시다발적인 변화들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저는 쭉 안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인데요. 안무는 아마 이런 여러 가지 복잡한 지형 속에서 하나의 전략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신체라는 단일한 주체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한계로서 연결되었던 개념이 풀려나는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안무적 실험들이 일어났던 것이죠.
『춤in』 안무론 기획의 두 번째 글인 김재리 선생님의 글에서 안무가 ‘함께하기(togetherness)’의 전략이었다면, 저는 조금 더 마이크로한 레벨에서 큐레토리얼 실천(practice)의 전략으로 사용되는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큐레토리얼 실천이 시공간을 배열(arrange)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안무에도 역시 유사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교차되면서 서로의 제도에 충격과 균열을 가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났던 두 가지 춤-전시가 있었는데, 재미있는 건 큐레이터 입장에서는 그것을 ‘춤’이라고 부르고, 안무가 입장에서는 ‘전시’를 했다고 부르더라고요. 그렇게 춤-전시가 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케이스, 자비에 르 루아(Xavier Le Roy)가 안토니 타피에 재단(Fundacio Antoni Tapies)에서 했던 전시와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가 바일(WEILS)에서 했던 전시를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장르로 부르기 어려운 이 임시적인 대피소 같은 곳에서 만나는 춤-전시들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에요. 제도적 역할이나 한계, 일단 예산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에 2000년대 초반에 시장이나 제도가 강건했을 때 가능했던 짧은 사건이었다고 봐요.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의 경우 8주 동안 20~30명의 댄서들과 함께 전시를 했거든요. 그 에너지와 예산, 힘은 지금은 다시 반복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더 애틋한, 제가 경험했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재미있었던 것은 저와 김재리 선생님이 안무를 일종의 전략으로, 기존에 무용 제도 안에서 했던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질문을 한 것이라면 황수현 선생님은 ‘무엇을’이라는 질문이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넘어가는 연결점을 보여주신 것 같아서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지윤 ⓒ 오창동

김재리: 저는 드라마투르그 작업을 하고 있는 김재리입니다. 작년부터 탠저린 콜렉티브라는 콜렉티브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3월에 갤러리 시청각에서 팀으로서 첫 전시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저도 문지윤 선생님 글을 보면서 굉장히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안무가 고정된 개념이나 이론이라기보다 상황에 맞게 계속 자기 몸을 바꿀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안무가 미술관이나 극장, 장소가 가지고 있는 역사나 물리성, 그곳에 오는 사람들에 따라 거기에 맞게 자기 모습을 계속 바꾼다는 것이죠. 안무에는 그런 유동성이 분명히 있고 환경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기 변형성이 있어요.
저는 어떤 것들을 만드는 과정 안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그곳을 안무가 발생하는 장소라고 보았습니다. 거기서 발생하는 것들, 노동, 협업, 실천, 리허설, 프로세스 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이 자체를 안무로 보게 된다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조금 더 긴밀하게 볼 수 있을 거예요.
또 무용 안에서도 안무적 실천을 더 열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안무에 대한 비평은 항상 완결된 형태(form)를 가지고 안무의 구조, 형식, 스타일을 이야기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안무가 어떻게 전략적으로 사용되고 실험되는지, 또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지에 따라 안무의 개념이 달라지는 모습들을 현장 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저의 관점이 있었어요.
작년에 문지윤 선생님과 만났을 때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면, 저는 “안무가 곧 큐레이팅이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문지윤 선생님은 “큐레이팅은 안무적이다.”라고 하셨었죠. 그런 지점에서 연결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문지윤 선생님이 방금 말씀하신 것과 같이 큐레이팅이 시공간을 조직하고 배열함으로써 어떤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관객들이 와서 그 에너지를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저는 큐레이션이 안무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큐레이팅에 관심을 갖고 지금 하고 있는 콜렉티브를 통해서도 그 문제를 다루면서 작품 하나가 갖는 힘이 너무 미약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시대에는 누군가 작품을 만들면 그것이 예술의 지형을 흔들고 파급력을 가졌기 때문에 한 명이 갖는 힘이 굉장히 컸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는 어떤 안무가도 다 개별적으로 보여요. 자아와 주체가 정말 다른 방식으로 흩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예술이 저마다 개별적으로 정치화되는데, 저는 이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액티비즘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미학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바로 안무가 이런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들을 연결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보았어요. 언제든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려면 한 명에게 집중된 안무적 전략보다는 여러 개체로 존재하는 것들의 연결, 즉 큐레이션의 방식을 띠고 있어야 하는 거죠.
이런 방식의 안무 전략은 예술 영역뿐만 아니라 어떻게 모이느냐에 따라서 사회적인 현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어요. 소셜 코레오그래피적인 관점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흩어짐과 모임, 사회적 현상 안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도 안무의 관점을 통해 형태를 발견할 수 있어요. 황수현 선생님도 몸의 내부에서 시작하지만 그것이 공적인 측면이나 문화 사회적 측면으로 확장되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드러내고 연결시키는 배치, 가시화의 방식이 바로 안무라고 생각합니다.

황수현: 저는 안무하고 있는 황수현입니다. 저는 무용수로 오랫동안 활동을 했었고, 지금은 ‘이 시대에 춤 공연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무용수로 춤을 추는 것은 역할이 분명했는데, 안무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안무를 그냥 ‘춤을 만드는 일’이라고 했을 때에는 별로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고, 또 저 스스로 경험했던 영역 안에서 갖고 있었던 질문과 의심들을 춤을 만드는 입장에서 구체화하는 것이 어려워서 과연 ‘안무가 무엇인지’ 계속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저는 무용수 활동을 딱 10년을 하고 그만두었고, 그 후에는 안무가로 전향한 케이스에요. 보통은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고 이렇게 전향한다는 개념으로 가기가 쉽지 않은데, 저는 역할을 아예 바꿈으로써 각각의 역할을 좀 더 들여다보고자 했어요. 안무에 대해서 고민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이것이 너무 전지전능한 어떤 힘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무엇을 갖다 붙여도 다 ‘안무가 되는’ 현상들을 보면서 그것을 개념화하고 정의 내리기보다, 실질적으로 어떻게 이것을 방법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누군가 저에게 안무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그냥 “무용수의 마음을 사라.”고 이야기하거든요. 마음을 사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아주 큰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이 결국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안무적 환경을 만들어야 동기를 유발할 수 있고, 안무가가 이것을 잘 가이드하지 않으면 오히려 무용수들이 반발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무용수들이 가지고 있는 안무와 안무가에 대한 호기심, 이 긍정성을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가 저에게는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안전한 작업 환경이었어요. 안무가라고 하면 권력이나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 지시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인데, 이 역할이 자칫 왜곡되면 소통이 잘 되지 않는 구조가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이런 부분들을 최대한 줄여나가면서 상대방 이야기를 끌어내고, 지금 작업에서의 불편함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었어요.
제가 했던 작업 중에서 ‘울어야 하는’ 작업이 있었는데, 사실 공공장소에서 갑자기 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특히나 누군가 앞에 있을 때 울려면 내가 눈물을 흘린다는 그 행위에 대한 사회적 판단이 엄청나게 개입해요. 남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내비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시도들을 할 때, 여기에 비판이 들어오면 이것을 작업으로서 만들어내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이 구조를 와해시키고 싶었고, 그런 환경들을 만드는 것이 저에게는 ‘안무’적인 부분들이었습니다.
2019년의 작업이었던 〈검정감각〉을 연습하던 때였어요. 이 작품은 눈을 감고 소리를 통해서만 무용수들이 서로를 인지해야 했는데, 서로를 진심으로 믿고 의지해야만 가능한 맥락들이 있었거든요. 한번은 연습을 하는데 소리 안에서 실수가 나왔어요. 그런데 그 실수가 누구 안에서 나온 것인지 파악하기가 힘들어서 피드백을 줄 수가 없는 거예요. 분명히 문제가 발생했는데, 무용수들 안에서도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냥 서로 귀를 닫아버리더라고요. 작품을 하는데 이런 불편한 기류가 생기니까 연습실 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졌어요. 그래서 하루는 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액션을 취했고, 그제서야 무용수들도 풀어지면서 ‘무엇인지 찾을 수가 없어서 사실 듣고 있지 않았다’고 서로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제가 이 작품에서 발현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눈을 감음으로써 오는 위험함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서로가 의지하고 돌보는 방식으로의 안무를 수행해나가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거든요. 이런 경험들, 안무를 하면서 계속 저 스스로도 성장하는 구조들이 저에게는 흥미로웠고, 이 안무의 경험들이 사회적으로도 발현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황수현 ⓒ오창동

조형빈: 네, 감사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좀 나누어보려고 하는데요. 아까 김재리 선생님 말씀하셨던 전시는 어떤 내용인가요?

김재리: 저희 콜렉티브에서 하려는 전시는 문화 사회적으로 춤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들인데요. 주제를 ‘코레오포비아’, 즉 ‘춤 혐오’라는 것으로 잡고 어떤 혐오의 역사들을 되짚으면서 이것들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전시입니다. 저희는 이번에 춤을 추지 않고 노래를 불러요. 아홉 개의 노래를 만들고, 가사도 쓰고 작곡도 했어요.

문지윤: 흥미로운 것이, 안느 임호프(Anne Imhof)나 보리스 샤르마츠(Boris Charmatz),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처럼 파편화된 씬들을 조직하거나 컨택 임프로비제이션을 통해 작업을 만드는, 유동적이고 파편적인 것들을 가지고 무빙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작업들이 춤-전시에서 상당히 많았는데요.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합창을 한다는 거예요.

김재리: 티노 세갈(Tino Sehgal)도 있죠.

문지윤: 그렇죠. 합창이라는 것이 사실은 소리를 통해서 몸이 하나로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어떤 몸이 생겨나는 것이잖아요.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유령론의 맥락에서도 읽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노래를 통해서 새로운 유령론적인 몸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흥미롭게 들려요.

김재리: 저희는 전시장에서 노래를 하는 것은 아닌데, 저희 프로젝트에는 컨셉이 있어요. 작품을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춤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떨쳐버리고 공기 중에 흩어질 수 있는 매체로 노래를 선택했어요. 유령론과도 연결될 수 있을 텐데, 어디서 들리는지 모르지만 우리와 함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목소리라는 것이 무용 안에서도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나뉘는 일종의 정치성을 드러내는 방식이었고, 이것을 활용해 기원을 알 수 없게 하울링처럼 맴도는 유령론으로서의 노래가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같이 있기를 시도하는 일종의 합창이 된 거죠.

황수현: 저 역시도 작품에 보이스를 사용하는 작업들을 해왔는데요. 그것이 시작된 계기는 2016년 〈I want to cry but I’m not sad〉 작품 이후에 감정에 대한 것들을 트레이닝 하면서 목소리의 톤이 감정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것을 가지고 실험을 하면서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또 다른 작품을 하게 되었죠.
제가 춤에서 계속 주목하고 있는 것들이 ‘보여지기’의 폭력성이에요. 극장 구조가 가지고 있는 방식이 기반하고 있는 시각 중심의 폭력적인 힘들을 느꼈었고, 굉장히 수동적이거나 공격적인 이 힘들을 어떻게 다른 감각들로 무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어요. 원고에도 썼던 내용인데, 우리가 춤을 출 때에는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훨씬 더 많이 활성화되거든요. 그런데 춤을 볼 때에는 너무나 좁은 하나의 감각으로 좁혀지는 아쉬움이 있는 거죠. 이런 다른 감각들을 드러내기 위해 목소리를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했던 공연은 3개의 공간에서 퍼포머 3명이 각자가 퍼포먼스를 하는데, 관객은 갤러리의 구조상 이 세 공간을 절대로 한 번에 시야에 담을 수 없어요. 공간적 구조가 한쪽을 항상 놓치게(missing) 만드는 것이 흥미로웠고, 그것을 일종의 상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이 사운드였어요. 결국 목소리들이 작동하는 안무적 구성, 그리고 그 안에 관객을 포함시킬 수 있는 울림이나 진동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죠.
저는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공연의 형태 중에 하나가 관객참여형 공연인데요. 관객을 일으켜 세워서 끌어들이는 ‘참여’의 방식을 싫어하지만, 제 공연에서는 대신 관객을 ‘포함’하는 것을 고민해왔어요. 〈검정감각〉에서는 40분 동안 무용수들이 계속 눈을 감고 퍼포밍을 하는데,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각자가 목소리를 내면서 그것을 통해 다른 퍼포머의 위치와 시간을 인지하거든요. 무용수들이 끊이지 않고 소리를 계속 내는 방식인데, 그럼으로써 사운드의 파동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울림들이 관객에게 일종의 감각적 전이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실험을 했던 공연이었습니다. 사운드는 여기서 스코어일 뿐만 아니라 공간을 채우는 장치이자 물질인 것이죠.

왼쪽부터 조형빈, 문지윤, 김재리, 황수현 ⓒ오창동


안무, 공간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전이

조형빈: 대화가 흥미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에 선생님들 각자의 글에서 다르게 느낀 부분이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또 연결되는 부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부분에서 서로가 연결 지점을 느끼셨는지 말씀을 조금 더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지윤: 황수현 선생님이 말씀하신 감각의 전이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데요. 제가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의 Work/Travail/Arbeid(작업/작업/작업)을 관람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이 전시에 대해서 알고 갔던 것이 아니라 기대를 하나도 하지 않고 갔는데, 제가 관람을 하러 들어간 날이 전시의 마지막 날이었더라고요. 아침에 전시장에 들어섰는데, 놀라웠던 것은 거기에 전시기간 두 달 동안 40명의 무용수들과 관객들이 매일 8시간씩 감각을 나눴던 공간들이 다 쌓여있는 것이 느껴졌어요. 처음에는 그냥 빨리 들어갔다 나올 생각으로 전시장에 들어갔는데, 그 장면을 보고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어요. 황수현 선생님 말씀대로 사람이 모이고 만들어진 공통의 감각들이, 60일 동안의 에너지가 거기에 쌓여있고 그것을 축하해주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와 있더라고요. 물론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의 춤도 아름다웠지만, 제가 그곳에서 하루 종일 봤던 것은 어떤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그 안에 있음으로써 느껴졌던 감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받았던 감각이 제가 수많은 전시를 보고 좋은 예술작품을 접했던 경험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경험이었고, 거기서 내가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언어화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것을 이번 안무론 원고를 통해서 네거티브 무브먼트라는 개념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존재가 이것을 만들어 가는데 하나의 액티브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껴졌고, 블랙박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관객의 존재 이유, ‘포함되는’ 관객이 느껴져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황수현: 전시장에서 작업을 해 보면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관객의 태도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전시장의 관람객은 내가 스스로 무엇을 할지 열려 있는 상태로 전시를 감상하거든요. 그런데 극장의 관객은 작품이 나에게 무엇을 줄지 수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요. 이것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경험이 있는데, 같은 작품을 가지고 여러 공간에 올린 적이 있었어요. 한번은 아주 작은 극장에서, 또 한번은 연극제에 참여해서, 마지막에는 갤러리에서 했었는데, 조명의 차이 같은 것들도 있었겠지만 관객의 태도가 정말 확연히 다르다는 게 느껴졌거든요.
갤러리에서 공연을 하면 관객은 저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고 작품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 많은 일을 하게 되는 구조 같은 것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때에는 작품 안에서 심리적인 것들까지도 다루게 되었습니다. 관객이 어떤 태도로 이 안에 들어오게 되는지, 단순히 동선뿐만 아니라 관객의 심리적인 상태들은 어떤지, 또 공간의 크기는 관객에게 어떤 태도를 불러일으키는지, 이런 고민들 다양하게 하게 되었어요.

조형빈: 그래서 저도 글을 읽고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문지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네거티브 움직임이 극장의 관객과는 어떻게 연결될지, 관객의 수동성을 넘어서서 공연에 포함하기 위한 전략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런 것들이 궁금해졌거든요.

황수현: 미술관에서 공연을 할 때에는 관객의 힘이 강하니까, 보다가 중간에 보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1시간이라는 공연 시간 동안 관객을 어떻게 끌고 갈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시간 안에 놓이게 할 수 있을까를 안무적으로 고민했던 것 같아요. 이를 테면 1층 공간에서 지하로 내려오는 동선 안에 어떤 특정한 유도를 넣는다면 퍼포먼스를 놓치지 않고 계속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보게 하는’ 순간들을 만드는 데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반면 극장의 경우는 이미 과도하리만치 ‘보고’ 있죠. 〈검정감각〉은 그래서 공연을 하는 퍼포머의 힘을 약하게 했을 때 이 ‘보는’ 힘을 약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랬을 때 관객이 공연에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했어요. 또 중요한 것은 거리감의 부분인데, 또 다른 제 작업인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의 경우는 작은 극장 안에서 객석을 원형으로 만들고 사이사이에 퍼포머를 위치시킴으로써 관객에게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써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략들은 사실 작은 극장에서만 가능한 방법이라,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업의 경우 저한테 굉장히 큰 미션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리는 작품인데, 극장 자체가 저에게도 강력하기도 하고 무용수 인원 규모 자체도 커서 고민되는 지점들이 많습니다. 이 신작의 경우 원고에도 썼지만 많은 인원이 모여서 하는 공연이 줄어들고 또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을 거치면서 집단이라는 규모가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동시에 작은 작업들이 많아지면서 작업이 너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공유되는, 일종의 특권처럼 느껴지는 상황들을 좀 다르게 보고 싶었죠.

문지윤: 그런 측면에서는 해오름극장이 오히려 훨씬 퍼블릭한 공간이 되겠네요.

황수현: 맞아요. 그런 부분에 주목하고 싶었고, ‘다수’라는 것이 가진 약함에 대한 고민들을 하는 중입니다.

김재리 ⓒ오창동

김재리: 저는 미술관에서도 작업을 하고 극장에서도 작업을 하는데 극장이 훨씬 힘들어요. 극장이 가지고 있는 구조도 그렇고, 관객이 기가 빼앗긴다고 느낄 정도의 몰입을 요구하는 곳이기도 하죠. 또 안무가로 하여금 ‘너는 조용히 해, 내가 말할 테니까.’ ‘이건 엔터테이닝이 아니야, 공연 중간에 박수를 치면 안 돼.’라고 말하게 하고 관객을 분리시키는 극장의 구조가 있는데, 어쩌면 이런 부분 때문에 안무가들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만들어졌던 것 같아요.
관객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 우리가 포용(inclusion)이라고 부르는 부분도 사실 거기에는 중심이 이미 전제되어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너’를 포함시킬게, 라고 말하는 구조가 있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메테 잉바르첸(Mette Ingvartsen) 같은 안무가의 공연은 관객이 어떤 행위를 해주지 않거나 피드백을 주지 않으면 거기서 그냥 공연이 중단되어 버려요. 말하자면 관객 독점(exclusive)의 공연인 거죠. 이 정도로 정치적인 힘을 발생시키는 형태가 아니라면 장애인, 혹은 다양성을 고민하는 포용의 방식들도 사실은 중심이 있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어요. 이런 부분에 있어서 미술관은 훨씬 열려있고, 미술관에 무용이나 안무적인 퍼포먼스가 들어갔을 때 제도적인 비평이 자연스럽게 생산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티노 세갈의 〈키스〉같은 작품을 보면 매표소 앞에서 갑자기 두 사람이 키스를 하는 것을 맞닥뜨리게 되거든요. 그런 것을 마주쳤을 때 ‘여기 내가 생각했던 그곳이 맞나? 이건 공연인가 아닌가?’라고 돌아보게 되는 감각적인, 촉각적인 경험을 일으키는데, 한편으로는 미술이라는 거대하고 견고한 역사 안에서 단지 이 정도의 감각의 전이만 이루어져도 충분한 걸까, 이런 것을 생각해보게 돼요. 어떤 해프닝으로서 잠깐 마주치는 이런 느낌을 만들어 주기 위해 굳이 우리가 미술관에 들어가야 할까, 어떤 구조를 전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극장에서 잘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관객을 포용하거나 관객에게 감각을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이 필요한 미술관에서 하고, 무용에서의 작업들은 지금 황수현 안무가가 해오름극장에서 준비하시는 것과 같이 역사 안에서 우리가 극장에 대해서 고민해왔던 지점들, 몰입을 분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to be’보다는 ‘to becoming’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식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할 것 같아요. 회화 작품 보듯 스쳐 지나가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극장 안에서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공연이 아주 미묘하게 변화되는 것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갑자기 퍼뜩 깨닫게 되는 변화를 몰입을 통해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극장의 구조가 더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거죠.

문지윤: 재미있는 것은, 말씀하신 것처럼 마리아 하사비(Maria Hassabi)가 계단에서 굴러내려오고 티노 세갈이 매표소 앞에서 키스하는 것들이 처음에는 놀라움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제는 더 이상 관객들도 그런 것들을 보고 놀라지 않거든요. 이미 다 바이럴이 돼서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것들이 많아요. 사실 감각을 자극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자극점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무감각해진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죠. 그런 점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미술관과 안무가들의 밀회가 끝났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다만 그러면 이제 앞으로는 무엇이 올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가 있어요. 공간적 차이를 통해 감각의 전이를 발생시키는 것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지금 굉장히 재미있는 것이, 저희가 1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초반에 ‘안무’라는 단어가 잠깐 나오고 그 뒤로는 이 단어를 전혀 쓰지 않고 있어요. 저는 이것이 안무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해 안무라는 것은 일종의 출발점인 것이죠. 각자가 가지고 있는 관점이 다르더라도 제도와 실천에 대해서 비평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다른 실천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출발점이 바로 안무인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문제는 ‘무엇이 안무인가’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안무라는 개념을 하나의 툴 박스(tool box)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것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형빈 ⓒ오창동


우리가 ‘함께’ 안무하는 법

조형빈: 안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이 대화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제가 궁금하다고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는 ‘협업’에 대한 것인데요. 김재리 선생님께서 글에서 일종의 정치적 행위로써의 협업을 이야기하셨죠. 글을 읽으면서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많은 고민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큐레이션 방법론으로서의 안무, 그리고 구조나 형식으로서의 안무를 들여다보았을 때, 무용 작업 이외의 영역에서 협업의 작업은 가능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들었거든요.

김재리: 무용이라는 장르 자체가 기본적으로 공동으로 작업을 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관계 혹은 관객을 통과하면서 사회적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죠. 저는 그 안에서 오랜 시간 반복되어 온 어떤 위계의 질서, 특히 한국의 맥락 안에서 ‘안무가 선생님’들에게 배우면서 공연을 만들어나가는 작업 방식에 대해 다른 개념을 제안해보고 싶었어요. 또 몸을 컨트롤하는 무용수의 입장에서 몸을 통제하고 검열하면서 발생하는 정치적인 문제들, 그리고 작업이 끝난 후 결과에 대해 분배를 논의하는 이슈들도 있죠. 창작자의 이름은 우리 모두가 알지만 머스 커닝햄의 무용수가 누구인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협업이라는 것이 노동이나 실천의 관점에서 분업이 아니라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 될 때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습니다.
1989년 이후에 컨템포러리라는 단어가 출현하던 시기,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붕괴되면서 자유주의 안에도 공동체나 공동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왔고 그 맥락들이 예술에 분명히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 이야기가 꼭 2022년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예술에 적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신자유주의 안에서 개인이 상품을 만들어서 그것의 주인이 되는 방식 같은 것들에 대한 비평을 돌아보면서 협업에 대한 일종의 제안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제가 글에서도 도래하지 않을 유토피아라고 언급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무용이나 안무의 메커니즘 안에서 우리가 항상 이야기하는 주체와 대상의 문제들, 어떻게 모일지에 대한 방법을 고민하는데, 실천의 과정 안에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덩어리가 되는 것보다 개별적인 것들이 반짝반짝하게 모일 수 있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차원에서는 우리가 안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봐요. 좀 더 인식론적인 차원이죠. 우리가 안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협업의 방법론도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협업의 방식을 취하지만 실제로 원하는 것은 안무가가 주인이 되는 것일 수도 있어요. 협업을 바라보는 저마다의 생각이 다를 때 결국 그것이 깨지게 되는데, 공동으로 제안하고 같이 실천하고 상상할 수 있지만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할 때 결국에는 증거가 남지 않거든요. 실제로 같이 하고 있지만 계약서에는 갑과 을이 맺는 용역 계약서라고 되어 있고요. 이런 부분에서 협업이 하나의 방식이나 도구로만 사용될 뿐 정말로 우리가 같이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황수현: 제가 협업을 여러 번 경험하면서 취했던 방법은 역할을 정확하게 분리하는 것이었어요. 역할을 분리한다는 것은 안무가, 무용수, 드라마투르그와 같은 역할들이 가진 책임과 권리, 의무를 생각해보자는 것이거든요. 역할로 구분한다면 모든 사람들의 비중이 똑같을 수 없을 거예요. 물론 작업 마다도 다 달랐던 것 같아요. 어떤 협업에서는 오히려 나의 역할을 안무보다 움직임 디렉팅으로 정의하면, 저는 스스로 협력자라고 생각하고 작업에 임하게 돼요. 자칫 제가 협업자로 들어가면 또 거기서 그만큼의 책임을 내가 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거든요.
무용수들과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제가 무용수로서 경험했던 작업들 중에서도 ‘너의 것을 다 꺼내놔봐’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들이 있었거든요. 내가 정말 나의 것을 다 꺼내놨을 때 아무리 공동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올라가도 결국 작품은 안무가의 것으로 귀결돼요. 그래서 저는 안무 작업을 할 때 오히려 무용수들에게 꺼내라고 하지 않아요. 대신 제가 어떤 것들을 제안하고, 무용수가 그것에 대한 피드백을 주면 제가 또 거기에 피드백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저는 거기에서 협업이 정확하게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또 무용수가 힘을 갖는 순간은 무대 위죠. 무대가 시작되고 나면 제가 아무리 뭘 하려고 해도 불가능해요. 물론 무대 위에서 무용수가 지나치게 자기 표현을 드러내면 작품은 다른 것이 되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목표를 계속해서 제안하고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김재리: 그런데 역할을 정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왜냐면 안무가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으니까요. 이미 일어날 일을 다 예측한 다음에 진행하는 것은 창작의 속성과도 맞지 않는 것이고요. 안무의 과정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것에 대한 기대없이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되풀이하는 지루한 방식이 될 것 같아요. 서로 의존하고 함께하고 감정을 나누는 과정은 안무의 중요한 실천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안무적인 환경 안에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인데, 제 글은 이것 자체에 대한 비평입니다. 만약 이러한 구조에 대해 실험을 한다고 하면 콜렉티브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콜렉티브의 이름을 내세우고 각자의 이름을 지우면서, 작업을 공동의 차원이나 사회적 차원으로 넘길 수 있는 출발점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안무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유지하는 형태(form)도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다만 이런 비평적 관점이 여전히 지금 우리 사회에는 필요하고, 제가 저자성(authorship)이나 소유권(ownership)을 이야기하는 대신 우정(friendship)을 이야기한 것도 이 안에 있는 바운더리들을 더 풀어서 공동의 작업으로 만드는 사회적 안무(social choreography)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어요.

문지윤: 무용 안에서 소유권은 분명 민감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오히려 무용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이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안무는 몸을 통해서 발생하니까요. 미술에서 소유권은 전적으로 물질에 귀속되어 왔죠. 큐레이터와 작가가 프로덕션을 같이 하는데 큐레이터가 이야기한 것이 작업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잡았다고 해도, 이 작업의 소유권은 분명하게 작가에게 있죠. 그것이 엄청난 금액으로 팔린다고 해도 말이에요.
그래서 몸은 자본주의 안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생각도 들어요. 인간의 몸 앞에서 같은 몸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멈춰 세울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이 있거든요. 그런 저항성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용이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요. 또 미술이 계속해서 무용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티노 세갈 같은 작가들이 스코어를 계속 만들어서 판매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저항할 수 있는 몸’들’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조형빈: 지금 말씀해주신 것들이 황수현 선생님 글과 김재리 선생님 글에서도 함께 이야기되고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정말로 그게 이상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안무를, 일종의 운동으로서의 안무(choreography as a movement)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무엇을 정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고민들을 발생시킨다는 지점이 중요하겠죠.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주셨는데요. 오늘 좌담은 이제 여기서 마무리할까 합니다. 저희가 나눈 이야기들이 안무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들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무론 기획이 진행되었던 세 달 동안,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 분 모두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창동
김재리_드라마투르그 안무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13-2014년 국립현대무용단 드라마투르그로 재직했다. 현재 독립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고 있으며, Tangerine Collective의 구성원이다.
문지윤_큐레이터 문지윤은 큐레이터이자 확장된 현대예술의 실천을 연구하는 이론가이다.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큐레이터학을 전공하였다.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 제출한 박사 논문 “Choreo-graphy: The Deinstitutionalisation of the Body and the Event of Writing”에서 동시대 예술가들이 코레오그래피라는 춤추는 몸을 쓰는 기술을 어떻게 전시 만들기라는 시각예술생산 기제를 해체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작동시켰는지 분석하였다. 공공예술, 건축, 퍼포먼스 프로그램 등 확대된 예술의 영토에서 일해 왔으며 아트선재센터, 백남준아트센터, 주영한국문화원에서 일했으며 영국 리버풀 비엔날레에서 프로그램 총책임자를 역임했다. 현재 가천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국민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주요 역서로는 안드레 레페키(Andre Lepecki)의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Exhausting Dance)』가 있다.
moonjeyun@gmail.com
황수현_안무가 황수현은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다. 퍼포밍과 관람 사이에서 작동하는 감각-감정-신체의 관계에 주목하며 그 사이의 새로운 감각 또는 낯선 신체 경험의 잠재성을 탐구한다. 최근 ‘공연예술에서 신체를 매개로 하는 작업은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미래의 감각-감정-신체에 관해 탐구하고 있다. 안무작으로는 〈저장된 실제〉(2014), 〈I want to cry, but I'm not sad〉(2016), 〈우는 감각〉(2018),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2019), 〈검정감각〉(2019), 〈음------〉(2020)등이 있다.
hwang.soohyun@gmail.com
조형빈_춤in 편집위원 공연을 보고 글을 쓴다. 몸과 움직임이 무대 위에서 발생시키는 맥락들에 관심이 있으며, 몸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을 주로 해왔다. ‘노동하는 (예술가의) 몸’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고, 최근에는 근대성을 뛰어넘는 수단으로서 몸의 정동을 다시 들여다보는 중이다. 몇 번의 무용 작업에 드라마터그로 참여했다.
rdculousdance@gmail.com
조형빈_춤in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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