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화

동시대 무용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논의에 주목하고, 이를 다각도로 집중 조명합니다.

2022.05.10 조회 3225
  • 페이스북
  • 트위터
  • url복사
  • 프린트

김재리 공연이론학자 vs 임종엽 극장연구자 대담

전통적 극장 vs 탈극장

전통적 극장 vs 탈극장
김재리 공연이론학자 vs 임종엽 극장연구자 대화



팬데믹 이후 극장 공간의 전통에 균열이 생겼다. 이 균열 속에서 극장은 어떠한 공간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비평적 목소리 그리고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극장에 대한 질문은 접근성의 질문으로 그리고 대상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전통적 극장과 탈극장의 대립 구조로 김재리와 임종엽의 대담을 진행하였다.



일시: 2022년 4월 29일 오후 1시
장소: 나이로비 비스트로
참석: 김재리, 임종엽, 양은혜, 박선영
녹취 기록 및 정리: 양은혜
편집: 김재리, 양은혜



양은혜: 5월부터 8월까지 극장비평담론을 생산해 나가고자 합니다. 4개월을 관통하는 대주제는 ‘동시대 극장은 어떤 가치와 충돌하고 있는가?’로 5월의 특집 기획 주제는 ‘전통적 극장 vs 포스트 시어터’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극장의 폐쇄 이후 극장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새로운 흐름에서 재고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요, 그 첫 번째 대담으로 김재리 공연이론학자와 임종엽 극장연구자가 이론적 뒷받침을 끌어들여 극장의 고유성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공연예술인이 실험하고 있는 극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양은혜 ⓒ오창동


극장의 예외 상태: 과거와 팬데믹

김재리: 과거로 돌아가 팬데믹 이후로 극장의 기능이 변하게 된 현상을 이야기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극장이 다시 개관되어도 관객의 거리 두기, 함성 자제, 공연 종료 후 로비에 머물 수 없는 등으로 관객의 규제가 이뤄졌었어요. 유럽의 경우를 보면 무대에 서는 음악가들 간에 거리 규정, 접촉 금지 등의 규제가 있었는데 마치 극장에서 안무적인 규칙을 만들어 사람들의 동선과 공간을 통제하고 제한하는 현상으로 이뤄졌습니다. 팬데믹 전까지 극장은 다른 세계 안에서 작동되고 있었고 다른 세계관을 보여주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이러한 규정은 사회와 밀접하게 연결시킬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더라고요. 외부에서 일어나는 거리 두기, 락 다운, 행동의 규제가 극장 안에서도 사회 구조의 미적인 구조가 보이게 되는 거죠. 이러한 현상들을 보았을 때 과거에도 극장에서 이러한 폐쇄의 시기에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견주어 보면 지금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역사적인 성찰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임종엽: 극장이 폐쇄되었다 다시 열린다는 표현을 쓰다 보니 지금이 과거 1500년대 시점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극장은 ‘테아트론(theatron)’, ‘본다’라는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즉, 시어터(theater)는 보는 행위를 담는 장소이자 공간이라는 뜻이죠. 현재도 물리적으로 남아 있는 이 건축물의 기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그리스의 극장을 그 출발로 봅니다. 중세 시대, 소위 말해 로마 멸망의 기점인 400년대 중반부터 1500년이라는 시점이 오기까지 긴 시간 동안, 극장은 개관은 물론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는데 그 비워진 기간이 약 1000년 동안 지속된 것이죠. 이 시기에 극장은 어떤 건축도 이뤄지지 못했어요. 1568년 이탈리아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 11. 30 ~ 1580. 8. 19)에 의해 극장이 지어지기 전까지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를 잇는 극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극장이 폐쇄된 데에는 그만큼 나쁜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원래 그리스 시대에 극장은 제식의 용도로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한 최고의 장소,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이성이 채워주지 못하는 감성과 정신을 높게 끌어올려 주는 곳으로 도시의 배치에서 당연히 가장 높은 위치에 그 공간을 두었어요. 그리스 시대의 극장 단면도를 보면 언덕 위 신전 바로 아래가 극장이었죠. 신전은 최고의 절정이고 그곳은 아무나 쉽게 갈 수 없는 공간이었으며 그 바로 아래 있는 건축물인 극장은 보다 밑에 배치된 스토아 광장과 더 아래인 거주공간인 즉, 세속적인 장소와 분리되어 존재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을 먼 거리에서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성의 공간이었죠. 로마시대에는 극장이 그리스에서 수입되면서 원래 언덕이나 산등성이에 있어야 할 극장은 단지 편리성 때문에 도시의 거주 공간 속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때문에 배경이 원경으로 처리되지 않고, 근접한 주거공간이 바로 옆에서 직접 노출되어 일정한 공연을 위해서는 가림 막 즉 무대막이 형성되어야만 했습니다. 극장은 이때부터 일정한 연출의 틀 안으로 점점 갇히고 단지 위락으로 바뀌어 도시를 다스리는 누군가의 정치적 도구로 사용된 것이지요.
공연의 부정적 기능은 로마 멸망 이후로 금지되며 가능한 공연은 교회에서 다뤄지던 종교극 외에는 없었어요. 극장이 폐쇄되었던 약 1000년의 시간 동안, 극장은 이동식 극장인 웨건(wagon) 혹은 만시옹에서 간단한 이벤트극이나 인형극 정도의 공연을 할 수 있는 시스템밖에 없었습니다. 거리에서 혹은 광장에서 공연을 하는 시간만 극장이 등장했었다가 사라지면 그 장소는 원래의 기능으로 돌아가는 동양의 마당극과도 비슷합니다.

팬데믹 이후 지금의 길과 광장을 보면 다시 그런 과정의 반복적 순화를 보는 것 같아서 공연장의 물리적인 틀에 대해서 다시 재고해 볼 수 있는 시점이 온 것이 아닌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최초로 등장한 실내 극장은 1500년대가 되어서 비첸자의 과학 아카데미 학술원인 올림피코에 의해 학술을 위한 토론장과 강의실을 위한 공간으로 허가를 받았고 이때 팔라디오가 극장의 다양한 장치와 요소를 곳곳에 숨겨놓았습니다. 이때 조명, 음향, 무대막, 그리고 무대와 객석을 해석하는 도시적인 개념 등의 정의가 많이 이뤄졌어요. 테아트로 올림피코라는 이 극장은 르네상스라는 인본주의의 힘을 등에 업고 태어났지요. 과학 아카데미의 모임 장소로 시작된 공간에서 조금씩 공연이 이뤄지면서 이 건축물은 르네상스 극장의 전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어두웠던 1000년 동안, 기존의 공연장도 폐쇄되고 새로운 공연장은 시도조차 되지 못했던 상황에서 새로운 극장의 탄생은 인간에 관한 질문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상징이지요. 즉 개인으로의 인간 존재가 다시 중시되면서 인간 본연의 긍정적 욕망에 관한 질문이 조심스럽게 다시 열리게 된 거죠. 그게 지금의 프로시니엄 극장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극장이라는 말조차 금기시되었던 시절에서 현대 극장의 모체가 출발한 것은 50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실내 극장을 잘 사용해 오다가 팬데믹으로 폐쇄됐던 실내극장은 과연 여전히 유효할까요? 오히려 지금은 다시 이것을 깨고 도시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단순히 패턴 변화의 문제만이 아닌 사람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 본래의 극장 역할은 모든 제한된 공간을 벗어난 개방된 개념을 찾으려는 변화의 출발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동안의 극장은 주어진 공간에 맞게 콘텐츠나 공연자는 물론이고 관객들이 조율되고 각색되어야 하는 제한적인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사람들의 자율적인 참여와 주체적인 감성의 표출 그리고 자신만의 판단 자체가 중심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건축을 변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엄청난 물리적인 비용과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요. 단 유연한 평면으로써의 공간으로 유니버설 플랜(universal plan) 혹은 블랙박스 같은 말을 쓰는데 이것으로 현재의 극장을 보완해줄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변화의 개념에서 극장의 장소성과 건축물의 공간이라는 물리적 유형은 그 유지와 변화를 공존시키면서, 무대와 객석의 활용 개념을 허물어야만 한다고 생각됩니다. 즉 장소의 개념을 확장시킨다든지, 다양한 퍼포먼스를 수용하고 담아낼 수 있는 곳으로 무대와 객석의 의미구조를 변화시켜야만 할 듯한데요. 이에 대한 공간적 연구가 공연자와 건축가 사이에서 디지털 건축을 포함해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임종엽 ⓒ오창동


김재리: 마당극을 이야기했듯이 전통적으로 사람들끼리 모이고 누군가가 춤을 시작하면 그 장소가 극장이 될 수 있었어요. 스트릿 댄스도 거리 자체가 이 공간을 인간의 행위가 공간을 만든다는 지점이 분명 있었던 것 같아요. ‘본다’라는 씨어터의 개념, 스펙타클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극장이 시작했지만 극장을 ‘보는 것’에서 ‘행위’로 이동해서 본다면 행위가 드라마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행위를 하는 것과 보는 것이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맥락에서 극장의 가능성을 해본다면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보고 누가 보며 어떤 행동과 행위를 통해 장소를 탈바꿈할 수 있을지 수행성에 대해 질문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 스트릿 댄스는 미디어로 많이 보여져요. 스트릿 댄스가 과거의 흥이나 문화와 상관없이 지금은 자본에 의해 움직여지고 무대에서 이뤄지는 퍼포먼스가 미디어로 전달되죠. TV나 영상매체를 보면서도 퍼포먼스가 일어나고 있는 극장의 기능들, 내가 그것을 보고 있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공연들이 가상이지만 그 자체도 극장이라는 장소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맥락에서 비대면 공연, 온라인 공연, 가상의 공간에서 ‘본다’라는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인터페이스와 매체의 변화 흐름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위와 분산의 장소: 극장의 구조와 제도

임종엽: ‘보다’처럼 극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드라마’ 즉, ‘행동하다’입니다. 공연자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말하죠. 무대와 객석의 분리가 고정화되면서 행위 하는 이와 보는 이가 분리되어 있죠. 기존의 각론적인 원칙과 교과서적인 기원 등 때문에 얽매이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아요. 관련해 르네상스 시대 이후 구축된 실내극장의 모든 천장은 늘 하늘이나 천사들을 그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물리적으로는 이미 실내로 바뀐 공간이지만 그들의 사고에는 여전히 극장의 기원에 강하게 얽매여 있다는 증거죠. 시대가 변화하면서 극장의 구조도 단순히 행위하고 관찰하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선을 넘어 공연에 참여하는 혹은 몰입하는 다양한 방식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공간에서 다른 방식으로 참여할 때에 감정이입은 보다 밀도 있어지고 관찰이나 고찰을 넘어 통찰이나 성찰로 성장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친구들과 오페라를 관람했을 때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테너를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배우가 소리를 지를 때 같이 감정 이입이 돼서 호흡을 하더라고요. 저는 그게 부러웠어요. 그 친구가 보는 것과 제가 보는 것이 천지차이라는 것, 체험을 해야 한다는 것, 굳이 전공을 하지 않더라도 공연에 대한 체험, 즉 경험의 행위가 빠진 관람은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현대의 기술적이고 정신적인 가능성은 오히려 경계를 허물어주고 관객의 참여를 어렵지 않게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김재리 ⓒ오창동


김재리: 극장에 정해져 있는 물리적인 세팅으로써 제4의 벽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을 어떻게 깰지 고민하는 것이 안무와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컨템퍼러리의 안무가들은 관객과 무대의 분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무대와 객석의 구조를 바꿔서 객석의 관객이 창작자의 수준으로 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할 수 있지만 관객의 반응이 없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되죠. 포스트모던 시대 이전까지 극장의 무대는 구역을 위치별로 분할하는 번호가 정해져 있었어요. 중앙은 주인공, 주변은 주인공의 배경이 되는 무용수들로 배치가 되죠.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의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1919. 4. 16 ~ 2009. 7. 26)이 시도했던 무대에서 카메라의 작업은 이 위계를 무너뜨리죠. 누가 무대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중요한 것이 아닌,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사라지게 하는 카메라의 프레임이 안무의 새로운 프레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극장의 공간, 장소에 대한 비평적인 질문이 안무의 형식을 만드는 데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요. 커닝햄의 포스트모던에서 사용했던 카메라 워크처럼 무용의 기술의 접근이 아닌 중심이 어디인지 보는 것을 중요시한 거예요. 무대를 빈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대에는 엄청난 권력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무대의 중앙에 선 사람, 조명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구분되어있고 안무가와 무용수들은 그 안에서의 힘들의 원리에 매우 민감한데요, 극장의 물리적인 변형의 차원을 너머 보이지 않는 힘의 구조를 뒤집을 수 있는 것으로써 코레오그래피가 하나의 미적 실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임종엽: 연극에서 부조리연극은 그에 대한 반항의 시도가 조금 이루어진 것이죠. 사진에서도 언캐니(uncanny) 같은 개념이 사물이나 상황에 대해 낯설게 보는 것을 통해 새로운 미학을 발견하게 되고요. 이처럼 공연자가 보여주려는 것을 관객이 보러 가는 것인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러 가는 것인지, 겉으로는 안보이지만 보여지게 될 것을 관객인 내가 찾으러 가는 것인지 등의 질문으로 행위와 보는 것의 질문을 좀 더 확장시킨다면 이를 해석하는 여지도 무척이나 다양할 것 같아요. 코레오그래피 또한 위계에 의한 질서가 아닌 펼쳐 놓음으로써 관객이 능동적으로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어떤 화두만 있고 그로 인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따라 전체적인 흐름이 바뀌지 않을까요? 재즈처럼요. 극장을 설계하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관객은 극장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보지 못하는데 그 공간은 바로 객석이기 때문이에요. 극장의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은 출연자죠. 그런데 사실은 고대의 그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극에서 연기자는 연결고리를 제시하는 화두의 역할만 하는 것이고 정작 중요한 것을 찾아가야 할 극의 본질은 관객이 직접 창출해 찾아가야만 합니다. 공연을 관람한 후 관객이 무대를 올라갈 수만 있다면 어떨까요? 관객은 공연 시작 전 암전이 되었다 조명이 들어오면 마법처럼 바뀌어 있는 무대만 보았지 극장의 전체 구성과 구조를 보거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낮아요. 잠시라도 공연자가 되어보면, 무용가로 그 공간에 직접 서보거나 내 몸을 그 공간 속에서 움직여본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거나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재리: 독일에 갔을 때 낯선 극장을 경험했었는데 티켓을 샀던 극장의 로비가 공연이 끝나고 나오니 바(bar)로 바뀌어 있었어요. 관객이 공연이 끝난 후에도 계속 극장에 머물게 하죠. 이때야말로 극장이 보는 것을 넘어 대화를 하면서 정치적인 공간으로 변하는 시점입니다. 무대의 커튼콜로 작품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극장에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 사이에서 비평, 담론, 미학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는 곳으로서 막이 내려도 극장이 여전히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극장은 공연이 끝나면 나가라고 하죠.

임종엽: 그것은 극장이라는 공간의 역할에 절대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에요.

김재리: ‘공연을 어떻게 유지시킬 것인가? 한 시간 공연이 아니라 그 감흥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 관객이 공동 관람을 한다 해도 객석의 옆자리에 있는 사람과 교감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로비로 나오면 서로의 감상을 구체적으로 말하게 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흥을 받을 수도 있어요. 배우와 이야기도 할 수 있고요. 로비에서의 경험을 하면서 한 시간의 공연성이 아니라 이 공연을 지속시키고 흘러가는 시간도 공연의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방식이 하나의 기획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

임종엽: 한국의 극장 건축사를 바라봤을 때 비극이 거기에 있는 것 같네요. 지자체의 생색내기 식 문화사업으로 극장을 설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극장을 지을 때 물질적 자본주의에 물려 있는 객석의 규모가 기준이 된 거죠. 덩치가 큰 극장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닌데 말이에요. 극장을 지을 부지는 제한되어 있는데 객석을 넓히면 피해를 보는 것은 무대에 서는 사람입니다. 다시 고대 그리스 극장을 볼까요? 그 시대의 공간별 기능이 현재 극장의 용도를 지칭하는 용어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현 극장의 상태에 비평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대에 배우가 입장하는 길은 이승과 저승을 찢고 들어오는 길(parodos)이기에 신과 인간 사이의 제3의 사람이었어요. 이 길의 이름은 패러독스(paradox, 역설)라는 용어의 기원이 됩니다. 오케스트라가 지금은 음악의 공간으로 되었지만 원형무대의 형태를 띤 이 장소는 무대와 객석이 만나는 접선(tangent line)의 공간이었어요. 무대인 원과 객석의 직선이 만나는 한 점이었어요. 악시스 문디(Axis Mundi)라 하며 그곳에서 뛰면 인간이 신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라는 곳으로 암시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극장에서 점점 무대를 작게 만들면서 객석을 늘리는 것은 중심이 없어지고 주변만 커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지 않아도 그 행위에는 정확한 의미를 둬야 하는데 말이에요. 때문에 극장 공간의 구성을 삼등분으로 나누어야 하지 이등분으로 나누면 큰 오류를 일으킵니다. 극장의 도면에서 포이어(foyer)라는 용어를 사용해요.

로비(lobby), 홀(hall)이 될 텐데 이 용어는 다른 건축물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극장에서만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일반적인 로비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에요. 포이어는 단순히 공연의 인터미션이나 종료 후에 관객이 만나고 음료를 마시며 쉬는 공간이 아닌 철저하게 교감을 하는 공간입니다. 신적인 접촉을 한 공연자와 이를 본 관객들이 서로의 생각을 함께 나눌 공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내가 느낀 게 맞아?’라고 확인하는 것, 엄청난 사회적 공감대와 차이를 확인하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르네상스 극장이 말굽형의 객석 형태가 된 것은 관객이 무대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앉은 자리에서 반대편의 객석을 볼 수 있도록 관계의 배려를 적용한 공간 설계였어요. 나는 오늘 누구와 왔는데 저 자리의 누구는 어떤 사람과 왔는지를 확인하며 사회 속의 인간적 관계를 읽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그리고 그 관계를 다시 포이어 공간에서 확장시키는 겁니다. 거기서 개인적인 관계에서 사회적인 확장이 일어나고 또 다른 관계의 권력적 구조가 파생되기도 하지만 극장 구조에서 마주 볼 수 있는 공간이 빠진다는 것과 소통을 위한 포이어 공간의 중요성을 누락한다는 것은 진지하게 다시 고찰해 봐야 할 부분이에요. 물론 독일의 근대 극장에서는 개인의 가치가 평등함의 소중함으로 이어지며 계급의 구조를 빼고 영화관처럼 오로지 무대만 보도록 설계하던 시기도 있었어요. 시대마다 필요에 의해 그 요소를 조정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이전에 강점인 구조가 상실되는 것도 있지요. 기존의 긍정적 기능의 구조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 활성화를 시켜보면 좋지 않을까요?
극장을 연구할 때 동양에는 극장 다운 극장이 없었어요. 일본은 가부끼나 노극장이 형성되어 있긴 하지만요. 그러나 서양에서 건축의 절정 같은 꽃은 극장이에요. 도시의 꽃과 같은 공간으로 시민에게 사랑받는 공간이며 가장 화려해도 되는 공간으로 설계 당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최신의 기술이 다 들어갈 수 있기에 극장을 설계하는 것을 건축가들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전통공연은 단순한 연회장의 개념이 강했던 면이 있지요. 우리는 공연 방식이 달랐는데 왕의 앞에서 이뤄지던 연회거나, 귀족이 즐기던 공연은 주로 사대부 집 방 안에서, 민중들은 마당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공연을 즐겼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도시형태, 팬데믹으로 극장에 대한 질문과 변화된 니즈를 살펴보았을 때 ‘스트릿’을 다시 정의해본다면 우리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양 도시 역사의 핵심은 광장문화에요. 규모가 크든 작든 광장 중심으로 도시설계가 이루어지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광장이라는 문화나 개념이 없었고 주로 모든 것이 길의 문화였죠. 광화문도 길게 난 길을 확장하여 광장이라고 하지만 본래는 길입니다. 길이 광장이 된 사례는 서양에서도 있었지만 길은 행인이 스쳐 지나가면서 다른 목적의 행위를 하던 중에 우연한 소통이 이뤄지는 곳이에요. 때문에 인위적으로 행위를 하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면 어색해져요. 공연을 관람한 장소로부터 뒤풀이가 이어지고 인접한 경험을 통한 몰입감으로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켜나가는 과정의 공간이 더 잘 설계되어야 할 것 같아요. 아마도 자신의 생활 혹은 삶과의 연결 측면에서는 길 문화의 공연은 분명히 더 나은 장점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공연의 장소가 반드시 물리적인 길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길의 개념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탈극장의 생태학적인 실천

이토 도요(伊東豊雄, Ito Toyo)의 센다이 미디어테크,
출처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217861#home


김재리: ‘아르코예술극장 40주년’ 행사 기획을 할 때 공공극장으로서 공연과 극장에 대한 질문을 했었어요. ‘공공성’의 화두를 놓칠 수 없었는데요, 극장에 많은 대중이 확보되면 그것이 공공이 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만 극장의 원래 기능을 보면 개개인들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론장으로써 다양한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곳이에요. 구역별로 비용과 배치가 차등되는 객석과 달리 로비, 복도 공간을 어떻게 개방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니 그것이 기획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동시대 안무가들은 극장, 블랙박스의 클리셰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극장에서 할 수 있는 시도들이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하면서 화이트큐브의 미술관으로 가는 흐름을 보이기도 해요. 안무가들이 거리로 나가거나 다른 장소, 다른 역사를 지닌 공간에 대한 탐색에 흥미를 갖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극장은 끝난 것인가? 국내에서는 무용제작극장을 가져본 적도 없어서 무용을 위한 극장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하거나 행위를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극장을 빠져나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임종엽: 건축의 각론 수업에서 문화시설의 3대 축을 박물관, 도서관, 공연장으로 보는데요, 현재 극장의 문제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건축물이 도서관이에요. 시에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박물관을 짓고, 더 여유가 생기면 도서관 그리고 지금에서야 예비군 훈련장 정도로 사용하던 극장이 아닌 극장 다운 극장을 지어보자는 흐름으로 가고 있어요. 도서관 공간에 대한 고민이 풀리고 나면 문화적 인식 수준이 극장으로 넘어오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현재 도서관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연결을 하고 있는데요, 요즘은 이미 영상 디지털 기반의 영상 서비스 시대로 넘어갔기 때문에 글자가 없어지는 시대거든요. 필요하다면 문서도 디지털화된 파일을 다운로드 받기에 굳이 도서관까지 가서 찾지 않죠. 그러다 보니 과거의 열람실은 조용히 책을 보고 지식을 쌓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개방된 공간으로 책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활발한 공간으로 바뀌고 있어요. 때문에 새로운 도서관을 지을 때에는 수장고와 열람실이라는 큰 두 개 축에서 열람실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생긴 겁니다. 기존의 건축 유형으로 도서관을 묶어두어야 하는지 고민이 생긴 거죠. 일본의 프리츠커 수상 건축가인 이토 도요(伊東豊雄, Ito Toyo, 1941. 6. 1 ~현재)는 도서관을 ‘미디어테크’라는 말로 바꾸었어요. 도서관과 갤러리, 스튜디오가 뒤섞여 있는 보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공간이죠. 이처럼 이미 과거에 정해진 건축물도 기능이 폐기되거나 용도의 명칭을 바꿀 수도 있어요. 혹은 건축역사에서 의해 명칭이 의외의 공간에서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씨어터라는 명칭은 대형병원의 수술실에서도 전통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최초에 수술을 시작할 때 해부를 할 수 있는 시체가 귀하다 보니 극장의 구조에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운데 개복이 이뤄져야 하다 보니 서양의 병원에서 수술실은 씨어터라고 정했고 현재까지 그 습관이 이어지고 있어요. 이처럼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성격, 퍼포먼스, 관람의 방식과 성격이 바뀐다면 그 명칭이나 공간의 사용 방식에 대해서 유연하게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극장은 폐기되어야 하는가? 아니죠. 체험 공간으로 또 다른 참여형 스튜디오가 될 수 있고 과거의 극장이라는 신체적 구조가 갖고 있는 의미를 활용한 새로운 기획의 공연이 이뤄진다면 얼마든지 물리적 극장의 진정한 역할과 유효함이 가능하죠. 단, 기존에 굳혀져 있는 극장을 사용해야 한다는 제한으로 인해 보다 더 다양한 실험을 해야 하고 퍼포먼스가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면 여전히 매우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알도 로시(Aldo Rossi)는 ‘자살하는 건축(a place where architecture ended and the world of the imagination began)’의 개념으로 ‘세계의 극장(Teatro del Mondo, 1979~1981)’이라는 수상 극장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구축하고 해체했었어요. 당시 베니스 시장이 시를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극장 건축을 지원하겠다고 했으나 알도 로시는 일시적인 하루살이 극장을 짓기 원했는데요. 극장이 물질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이상 공연장이라는 건축물의 제한된 기억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극장의 본질을 꿰뚫었기 때문이에요. 공연이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으로 공연 시작 전 암전을 통해 내가 봤던 기억에서 고정된 장소는 모두 사라져 줘야 영원히 그 시점에 내가 우연히 만난 시간을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을 통한 장소가 사라지면 절대적인 그 공연의 순간, 그 기억은 못 바꾸죠. 영원히 변함없이 가져갈 수 있는 기억이 되는 순간을 추구한 것이지요. 공연이 시작되면 일정한 장소의 극장은 강을 따라 내려갔고 공연이 끝나 관객이 극장에서 나올 때는 전혀 다른 곳에 내리게 되었어요. 그것을 극장이라고 본 거죠. 극장은 기억의 장소이자 집합체로써 그것을 극장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았어요. 반대로 몇 백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극장은 그에게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극장이라는 신체가 바뀌지 못하는 것, 그러나 장소만 바꿔줘도 완전히 새로운 극장이 되는 거예요. ‘세계의 극장’은 중세 시절 수레형 극장과 연결돼요. 있었다 사라지는 그러나 기억에서 유일하고 영원한 것이지요.


알도 로시(Aldo Rossi)의 세계의 극장(Teatro del Mondo),
출처 https://spadoniaa.com/Rethinking-Teatro-del-mondo


김재리: 베니스는 곤돌라가 교통수단이기에 수상 극장이 낯설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극장도 문화적으로 받쳐줘야 하고 외부 생태계나 사람들의 인식이 극장의 내부와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극장 자체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극장의 주변, 극장이 주변으로 확장할 수 있는 생태계가 극장의 질문을 다시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관객에 대해 생각할 때 경영적인 마인드에서 관객을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마인드로 바라보았을 때 극장으로의 접근성과 극장이 주변으로 확장되는 것에 대해 아이디어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극장까지 오기 위해서 이동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만 보아도 이 흐름과 직결하여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이동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요. 극장도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이죠. 하지만 휠체어 장애인이 극장에 오기 위해서는 자원봉사자가 필요하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것도 비장애인보다 몇 배의 시간을 투자해야 해요. 또한 모든 극장에서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지도 않고요. 극장에서 공연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좀 더 생태계적으로 확장해서 ‘극장은 누구에게 열려있나?’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임종엽: 건축적으로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라고 하는데, 이동에 장애가 될 것을 최대한 낮춰주는 것, 턱을 없애는 것으로 건축에서 시작이 되었죠. 이런 환경 조성을 건축법에 조성을 해도 될 텐데요, 다시 알도 로시 얘기를 하자면 그가 말년에 발행한 『과학적 자서전』을 보면 그는 ‘건축을 하기 전에 건축을 잊으라’는 말을 합니다. 건축을 하기 전에 건축가가 알고 있는 모든 상투적인 건축을 버려야 한다는 거지요. 비유를 하자면 옷을 입기 전에는 입게 될 옷을 생각하지만 착용을 하고 활동하는 동안 옷은 자신의 몸이 된 것이기에 잊게 돼요. 때문에 그가 말하는 진정한 건축은 ‘사라지는 건축’ 그러나 가장 적절하고 편안한 그래서 일상 속에서 나의 몸이 되는 진짜 건축입니다. 로마에 가면 2000년 전의 건축물도 즐비하지만 박제된 조형물이 아닌 생활 속 실제 건축물로 기능하고 있어요. 로마인들의 생활권 안에 역사적인 건축물이 섞여 일체화되어 있습니다. 경복궁처럼 사람이 직접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그어 놓고 개방을 정하는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건축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하나의 조형물로 전락한 것이지요. 과거의 실내 극장의 천장에 하늘을 그렸던 것은 극장이 광장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1700년대 이탈리아 건축가 지암바티스타 놀리(Giambattista Nolli, 1756. 4. 9~1756. 7. 1)의 피겨 앤 그라운드(figure & ground) 지도를 보면 도시를 그리는데 도시 구조 패턴을 쉽게 보기 위해 길과 광장은 하얀색으로 남기고 건물은 검은색으로 칠했어요. 그런데 극장은 대형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테두리만 그리고 내부를 흰색으로 비워두었습니다. 물리적인 지붕이 있는 건물이지만 그가 보았을 때 극장의 근본 태생은 누구나 들어왔다 나갈 수 있는 외부공간이었던 것이죠. 그만큼 극장은 다양성을 수용하고 재생산하고 확장할 수 있는 공간임에도 기능만 가능한 기능으로써 제한되는 공간이 되는 것은 극장의 태생과 반대되는 양상이에요. 장소 개념을 다양성으로 보되 기존 극장 구조의 틀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재생산할 수 있는 공연은 하되 실험해야 하는 퍼포먼스는 새로운 장소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열린 극장: 환대와 배제의 문제들

김재리 ⓒ오창동


김재리: 팬데믹 이후 극장의 기능이 복합적으로 되기를 원하는 것인지 기존의 극장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인지 극장을 잘 연구하면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문화, 극장이 위치해 있는 지역, 관객, 극장이 해왔었던 기능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이것이 소셜 퍼포먼스가 되어야 한다는 고민들을 하게 돼요. 극장에 올 수 있는 관객은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대부분의 극장에 영유아, 육아를 하는 사람들, 장애인, 티켓비가 없는 사람들, 한국어 지원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들은 오지 못하는 등 극장은 배제의 원리가 오랜 시간 작동해 왔어요. 그러다 보니 모두에게 열려 있고 서비스할 수 있는 지역의 문화센터나 사설로 만들어진 공간, 그들이 접근하기 편한 곳에서 이뤄지는 공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극장이 기본적인 시설로써 다양한 관객이 올 수 있도록 접근성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극장에 들어와서야 극장의 공공적인 기능, 열린 장소를 논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임종엽: 일본의 경우, 마을을 꾸밀 때 마을에 영적인 나무를 심는다든지, 신비한 장소를 발굴해 냅니다. 예를 들어 마을의 모퉁이로 돌아가는 곳은 중요하다고 하여 마킹을 해놓습니다. 이러한 마킹 행위는 마을 사람들이 그 공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공감하는 것이죠. 우리는 풍수지리를 외치지만 풍수는 패턴화 된 것에 비해 그들은 체감을 하는 것입니다. 기운의 좋고 나쁨을 체감하면서 좋은 장소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나쁜 장소는 보완해 나가는 것이지요. 물론 행정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건에서 우리가 함부로 장소를 선택한다는 것은 기대치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행정가들이 금을 그어놓고 도시를 구성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공연을 하기 좋은 장소라고 지정해 놓은 곳을 비어만 놓아도 엄청 성공일 거예요.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사업의 메카가 되는 장소를 우선시하지 문화에 투자하는 마인드로는 못 가고 있어요. 지역을 입체적인 행정체계로 접근한다면 여러 접근들이 생길 수 있으리라 보는데요, 극장은 본래 불특정 다중집회시설이기에 관객이 극장에 올 때는 뜨문뜨문 오지만 공연이 끝난 시점에는 한 번에 많은 인원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안정성을 고려해 대부분 저층형으로 배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함부르크의 엘프 필하모니(Elbphilharmonie Hamburg)는 오래된 벽돌 창고 건축물의 상부를 활용하여 8층 이상의 대형 창고 건축물 꼭대기에 공연장을 넣었어요. 끝나고 나면 관객들은 9층이 넘는 층을 내려와야 하는데도 이런 불편함은 기계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오히려 어려운 동선의 이동은 이벤트가 되었고 이 건축물이 도시의 상징이 되었어요. 공간에 적극적인 기술적 적용과 활용은 장애를 비롯한 모든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생각과 시도가 중요하지요. 기술의 활용은 이럴 때 빛을 발합니다.

김재리: 팬데믹으로 극장이 폐쇄되면서 유럽에서는 기존 극장 공간을 창작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곳도 많았어요. 무용은 2~3일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공연이 종료돼요. 하지만 창작공간으로 탈바꿈하면 2~3달 지속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전환이 가능합니다. ‘극장은 필히 공연을 보여줘야만 하는가? 필히 외부에 완성된 작품을 보여줘야만 하는가?’라는 질문도 생깁니다.
반면 우리의 극장은 위치해 있는 지역과 그곳 시민들과 동떨어져서 예술가들만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전유물로 기능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극장 관객을 보면 모두 외부인들이지 지역 시민들은 거의 전무합니다. 극장과 이웃하는 지역민임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는 것이죠. 극장 내부에서 예술가들의 실험, 프로그래밍만 할 뿐 지역과 극장을 연결하거나 지역민이 이웃하는 공간으로 극장을 다루지 않는 것 같아요.

임종엽: 공감대가 핵심인데 그런 것이 이뤄지지 않는군요.

김재리: 대조되는 일례로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 1949. 12. 30 ~ 현재)가 프랑크 푸르트 발레단의 상주 안무가의 임기가 만료되었는데 지역주민들이 반대했고 주민들이 3년 동안 돈을 내서 운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극장에서 어떤 공연이 이뤄지는지에 따라 극장의 상징과 그 지역의 예술이 결정되는 것이기에 시민의 목소리가 더 컸던 것이죠.


임종엽 ⓒ오창동


임종엽: 지인과 중산층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 그 기준은 부채가 없는 30평의 집, 중형차, 월급이 500 이상, 일 년에 해외여행 1회 등의 기준들이 중산층의 유형을 결정한다면, 유럽에서 중산층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의의 개념이 분명하고 하나 이상의 비평지를 일정하게 구독하며, 외국어를 하나 이상 습득하고 독선적이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포함되어 있는 등 신사가 갖춰야 하는 요소들로 정의합니다.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고 다짐만 하면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때문에 이런 경제적인 소유 목적과 정신적인 풍요로움 사이에서 우리는 큰 격차를 느끼게 됩니다. 공감대를 만들어나가기에는 우리나라가 점점 더 어려운 사회가 되고 있죠. 런던 사람이 런던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은 일주일에 연극을 한 번은 본다는 것이더라고요. 런던에는 어디에서나 크고 작은 연극 공연장을 접할 수 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슬리퍼를 끌고 공연을 보러 갈 수 있어요. 가치관을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연결되는 것 같아요. 문화 인식의 향상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캠페인 식으로는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 같고, 공연문화를 진짜로 즐기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더 많이 보여야 해요. 그래야 그 경계가 허물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김재리: 사회적 공간으로 극장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해 보이고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이슈들은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고 압도적이에요. 실제 드라마는 무대가 아닌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연결고리를 극장이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예술가들이 극장 안에서 바꾸려고 하는 노력은 역사적으로 실패의 반복으로 이어져 왔던 것 같아요. 외부의 시선으로 극장을 바라보면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좀 더 안무적, 여기서 안무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건을 지탱하는 구조를 의미하는데요. 사건의 주체와 행위들,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작동하는가를 구조적으로 보면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을 극장과 어떻게 관계 맺게 할 것인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포스트 팬데믹과 극장의 미래

임종엽: 결국 춤은 춤을 통해서 사회에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고, 그 장치는 물리적이고 유일한 극장이었으면 좋겠어요. 프로시니엄의 앵글을 통해 무엇인가를 집중해서 보는 것인데 ‘우리 주변에서 나는 과연 어떤 앵글을 잡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생명 이후에 모든 몸짓이 무용이고 그래서 무용은 계속 호흡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연속된 기록이죠. 댄스의 어원 탄하(tanha)는 생명의 욕구이니까요. 즉 매일 삶의 일상과 그것을 지속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만이 모든 가치를 생산한다고 봅니다. 단지 많이 만들거나 보려는 작위성에서 의도를 덜고 조금은 천천히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힘 같은 것이요.

김재리: 프로시니엄에서 사각형으로 고정된 프레임이 아닌 시간에 따라 서로 다른 주체에 따라 프레임이 ‘이동’의 과정을 만들어낸다면 그 자체가 춤의 시퀀스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 더 다양한 것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무용의 역사를 보면, 극장의 프레임에 대한 비평을 통해 춤의 형식을 변화시키는 것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발레는 프로시니엄이라는 장치에 맞춰져 평면적인 무용수들의 몸짓을 규정하듯이 이 정면성을 해체하기 위해 만든 입체성, 볼륨에 입각한 현대무용 분야의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요. 독일 현대무용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돌프 본 라반(Rudolf von Laban, 1879. 12. 15~1958. 7. 1)도 바우하우스 시절의 극장을 디자인하는 건축가였습니다. 극장의 물리적 장치에 끼워 맞춰진 신체보다 신체 그 자체를 하나의 건축물(Moving Architecture)로 바라보고 현대무용을 만들기도 했다는 역사를 살펴보면 무용 분야에서 극장 공간이나 장소, 건축을 염두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장르를 변형시키는 흐름에서 또 다른 공간을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춤추는 자와 공간을 설계하는 자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상공간으로 넘어가 보면, 팬데믹 시기에 우리가 어떻게든 공연을 창작하기 위해서 창작 공간이 가상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요 많은 안무가들이 극장에서 했던 것을 가상공간에서 재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었습니다. 극장에서 체험했던 감각을 가상에서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 춤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감상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극장의 요소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새롭게 주어진 공간을 처음부터 다시 탐색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리적인 극장 안에 있는 재료와 작동 방식 등이 그 안에서 가능했던 것처럼 가상에서도 그 공간이 갖고 있는 재료와 작동 방식 등을 토대로 가장 원천적인 수준에서 질료적인 탐색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극장의 것을 그대로 가져오는 시도를 번번이 실패하면서 ‘가상의 공간은 실제 극장을 구현하기에는 부족하다, 허구의 공간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웠습니다.

임종엽: 비대면 공연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할지 탐색하는 데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현장에서와 같은 동일한 호흡이겠지요. 현실에서의 무대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문제로부터 어떻게 공연을 실현해 연기자와 관객이 하나의 공감대를 통해 유일한 시간과 장소의 기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지를요.


왼쪽부터 임종엽, 양은혜, 김재리 ⓒ오창동


양은혜: ‘온라인 극장’이라고 칭하지만 저는 극장이 없고 온라인 공연만 이뤄지는 것에 대한 질문을 갖게 돼요. 온라인 공연 전후로 포이에의 기능은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팬데믹 초창기에 공연영상을 송출하든, 게임엔진으로 가상공간을 만들어 공연을 개발하든지 간에 공통적인 사람들의 향수는 극장에 오가는 길과 극장의 소음, 극장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의 만남 등 잉여가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비대면 공연에서 ‘온라인 극장(online theater)’, ‘디지털 씨어터(digital theater)’ 등 ‘극장’이라는 명칭은 붙지만 극장은 사라지고 공연만 이뤄지는 현상에 대한 비평적 사유가 필요한 시점은 아닐지 생각해요

임종엽: 다시 고대 그리스 극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제의의 의식, 결국은 생각을 구조화해나가는 ‘사유’가 극장 공간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최소한의 원리와 규칙으로 따라야 할 것은 있겠지만 형식에 의한 제의가 아닌 마음가짐에 의한 제의가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그것을 갖게 만들어주는 데에 장소와 공간이 빠진다면 과연 가능할까요? 어떤 것을 이루는데 과정은 필수적입니다. 프로세스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내가 여기서 출발해 저기로 간다는 것은 공간 이전에 시간을 사용한다는 것으로 시간을 할애해야만 공간을 획득할 수 있다는 거죠. 시간의 차이 없이 공간을 취하겠다는 것은 실질적 공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지로의 공간도 가능하겠지만 체험이 없는 이미지는 굉장히 공허해질 것이라 봅니다. 물질적 공간인 아날로그성을 우리가 적대시하거나 무용지화 시키는 경향도 현시대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절대 바르지 않아요. 디지털이 극도로 발전하여 로봇과 매우 유사한 인간을 만들어 그것이 너무도 인간 같을 때에도 우리는 그 완벽함 때문에 로봇인지 사람인지를 의심합니다. 그래서 입술이 살짝 떨린다든지, 자기도 모르게 어딘가를 긁는다든지 등의 불특정 요소를 포함시켜야만 그것이 진짜 인간이 아닐까 믿게 되는 것이죠.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그런 섬세함을 파악하는 감각과 능력이 절대 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완벽한 빈틈을 보이는 것 속에서 온전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최소한의 빈틈의 요소가 공간의 이동과 장소를 비슷하게만 만드는 것은 너무 본질을 잊어버리도록 만드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디지털 기술이 무언가를 단지 유사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근본과 영감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능력을 오히려 퇴화시키고 둔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요? 차라리 그 정도의 기술문화의 침투는 같은 장르가 아닌 다른 이름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근본에서 출발한 이름을 쓰기에는 새로운 개념과 수용의 문제가 너무도 어려울 것 같네요.

건축가에게 건물과 건축은 굉장히 다르거든요. 단어로는 빌딩(building)과 아키텍처(architecture)로 구분되는데요, 건축은 텍토닉(tectonic)의 최고 원리(arche)를 찾았다는 뜻이고 건물인 빌딩과 다른 아르케(arche-)의 정신이 깃든 구축물을 칭합니다. 건물이 건축과 유사하다고 같은 것은 아닙니다. 동일하다는 것과 달리 유사하다, 비슷하다고 할 때에는 그 진리에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용어의 수용자는 불쾌하겠죠. 무용도 한글로는 춤, 영문으로는 댄스(dance), 발레(ballet) 등 여러 용어가 있겠지만 그 용어가 유지되려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중심 축, 불변의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춤이 생명의 호흡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살아 있어야 하지, 살아 있어 보이는 것은 이단이죠. 비슷한 것은 최고를 추구해도 가짜일 수밖에 없어요.


래디컬 씨어터: 되돌아가기의 전략

김재리: 비평이 부족한 것도 이러한 해석과 사유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임종엽: 혁신적이고 급진적(radical)이라고 할 때도 그 단어는 라틴어의 ‘rādix’로부터 파생된 것인데 이것은 뿌리와 연결됩니다. 급진적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간다는 것이죠. 즉 급진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래야만 다시 새로워지는 것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진리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며 시도해보는 것은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영혼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도 유사합니다.

김재리: 급진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이 한 뿌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하지만 창작자들 스스로 본질을 찾는다, 본질로부터 시작한다는 맹목적인 말들은 좀 위험해 보여요. 창작자 본인의 습관이나 관심을 본질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 ‘오리지널리티’로 불리는 것들이 권력을 갖고, 그것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이미 정해져 있죠. 내가 가진 아이디어나 주제를 깊이 파내어가려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에 대한 비평과 질문이 필요하고, 그런 면에서 온라인 극장뿐만 아니라 무용이나 공연에서의 비평 부족으로 인한 아쉬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임종엽: 이론을 영어로 theory라고 하죠. 제 대학원 연구실 이름이 ‘teatro’에요. teatro와 theory는 같은 어원이에요. 이론이란 단어도 극장의 언어에서 시작했거든요. ‘본다’는 것은 관점이 있다는 것이고 이는 일정한 이론의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에게 비평은 필수적인 것이에요.

김재리: 이론, 비평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사 춤’ 즉, ‘춤과 비슷한 것을 춤이라고 치자’, ‘일단 만들고 새롭게 해보자’는 식으로 창작에 바로 착수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극장이라면 극장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없이 ‘이것이 극장이라면 공연을 만들자’로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죠. 작업에서의 단계나 지금의 현상을 정확히 목격하는 이론, 눈이 없는 거죠.

임종엽: 극장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건축도 사람도 보다 더 극장다워져야 합니다. 극장을 뛰어넘을 수 있죠. 우린 아직 그 근본의 바닥을 가보지 못하다 보니 다시 뛰어오를 수 없어요. 마치 아직 바닷속의 그 끝도 다 가보지도 않고, 오히려 와닿지도 않는 우주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요.

김재리: 극장을 다루는 경향들이 극장을 넘어선 탈극장과 같은 개념어들이 나오고 있고, 극장의 생명이 끝난 것처럼 새로운 공연이어야 한다는 것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지금까지 우리는 극장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아요. 실제로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고, 혹시 우리가 극장의 이면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 행위 이후에 무엇이 올 것인가에 대한 미래에 대한 질문도 하지 않기에 더 헤매는 것 아닌지 질문해 봅니다. 복도, 폐쇄되었던 기간, 시간성, 기억 등이 극장에 내재되어 있는 것(곳)인데 극장은 공연하는 곳이라는 하나의 기능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용도도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사용하지도 못하는 시점에서 이다음 시기의 극장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거죠.

양은혜: 오늘 긴 시간 대화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극장의 어원과 시초를 현시점의 극장에 빗대었을 때 더 진취적이고 유연한 극장을 상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해 이렇게 많은 질문을 했던 시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현재 극장 공간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비평적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만큼 극장의 본질을 잃지 않되 시대에 맞는 극장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김재리_드라마투르그 국립현대무용단의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무용과 퍼포먼스 분야에서 독립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하고 있다. 안무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연구자로서 컨템퍼러리 댄스와 안무에 관한 몇몇 논문을 발표했다.
jaeleekim32@gmail.com
임종엽_인하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1987년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 후, 1989년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 이후 종합건축사사무소 장에서 3년 8개월간 근무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 국립건축대학에서 Dottore di laurea 취득, 마리오 벨리니(Mario Bellini) 사무실에서 1년간 실무를 하였다. 이후 숙명여자대학교 조교수, 2000년에 인하대학교 건축학과에 부임하였다. 2007년 5월부터 약 3년간 해안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디자인팀 본부장을 역임하였다.
teatro@inha.ac.kr
김재리 공연이론학자,임종엽 극장연구자


목록

댓글 1

0 / 300자

  • yeon2022-05-19

    좋은 대화 내용을 통해 많은 것 배우고, 느끼고, 고민하게 됩니다. 좋은 대화 잘 읽었고, 감사합니다.